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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설렘에 여정을 생각하게 되는 가을, 그 가을이 조금씩 깊어가면서 어디론가 휑하니 떠나고 싶어 오래 전 찾았던 아늑한 사찰 수도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숲의 향기를 접하며 홀로 걷는 길, 그러나 외로움은 없고, 숲의 내부로 깊이 진입 할수록 되려 마음이 가벼워진다. 수도암이 가까워 져서인가 계곡 물소리가 크게 들리고 따라서 피안의 정토는 온유하게 나를 맞아준다.

 

수도암은 청암사와 함께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도선은 청암사를 창건한 뒤 수도처로서 이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00년에 포응화상이 건물을 1차 중수하였다고 전해오며, 2차 중수는 1969년 법전화상에 의해 선원과 함께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암이 자리 잡은 터는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옥녀가 비단을 짜는 모습을 한 형상이라고 한다.

 

수도암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우측에 단청을 하지 않은 한옥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관음전이다.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인데 무수한 세월의 흐름에도 수도암의 관음전은 나름대로의 멋스러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관음전 마당을 지나 본 전각을 향해 막 진입하려는데 계단 입구에서 3마리의 사자가 그리고 계단의 맨 위에서 3마리의 용이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안으로 들어서라는 의미인 듯하다.

 

'외인출입금지'라고 쓰여진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살며시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그 곳은 다름 아닌 선원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베를 짤 때 날을 감는 도구인 도투마리에 해당하는 선원, 이 선원을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각이라 하여 선불당(選佛堂)이라고 한다.

 

 

선원을 빠져나와 나는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인 대적광전 안에는 풍만하고 위엄 있는 보물 제307호 석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불상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 북석동 부처골에서 만들어 졌는데 이 곳까지의 운반을 걱정하던 중 홀연히 한 노승이 나타나 운반을 자청하였으며 노승이 부처를 등에 업고 쏜살같이 산을 넘어 수도암에 다다르는 순간 그만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따라서 화가 치민 노승은 산신을 불러 '이 산에는 앞으로 칡넝쿨이 없도록 하라'고 호령한 뒤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후부터 수도암 근처에는 아예 칡넝쿨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 전 대적광전 뒤에 있던 수백 년 묵은 전나무가 고목이 되어 기울어져 옆에 있던 약광전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밤 그 전나무가 이유 없이 ‘쿵’하고 뽑혀서 약광전 위를 넘어 100m거리로 날아가 떨어졌다고 한다.

 

헌데 나무가 지붕 위를 넘어 갈 때에 3층 석탑의 중간부분인 한 모서리를 떨어뜨렸고 그 때 ‘아차’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고도 전해온다.

 

대적광전 앞에 우뚝 서있는 동서쌍탑(보물제297호), 동탑은 단층기단이며 서탑은 이중기단으로 되어있는데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을 모셨으며, 1층 탑신에 모서리 기둥을 세기고 각 면에 감실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다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넣어놓았다.

풍수학적으로 보면 대적광전이 있는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이며 도량의 두 석탑은 바로 베틀의 기둥이 된다고 한다.

 

방문을 열고 대적광전 내부를 살펴보니 부처는 여전히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기미년 3월1일 독립운동 때 이 부처가 온 몸에 흥건히 땀을 흘려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비로자나불, 사실 현상세계에 나타난 부처님의 원래모습으로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가 바로 비로자나부처이다. 진신 또는 법신이라고도 일컫는 비로자나부처는 범어로 ‘vairocana’ 인데 한문으로는 ‘遍一切處, 光明遍照, 遍照’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즉 불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이다.

 

수도암 대적광전 마당에서 반대편을 향하면 가야산의 상봉이 손에 잡힐 듯한다. 마치 한 송이 연꽃처럼 솟아 오른 가야산, 그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겨울엔 백련이 되고 가을엔 홍련이 되며 풍수학적으론 실을 거는 끌게돌이 된다.

 

약광전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대적광전과 같이 1969년에 지었는데 내부에는 보물 제269호인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다. 두 어깨에 걸쳐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며, 두 손을 무릎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를 들고 있는 석불의 광배에는 연꽃무늬, 덩쿨무늬,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뒷 편의 벽화에 명약인 천도복숭아가 보인다.

 

사찰의 뒷 편에 숨겨진 풍경도 때론 은은한 운치로 다가온다. 장독대와 다리를 건너 조그맣게 보이는 나한전, 특히 석교 아래의 잔잔한 연못은 우리 전통 정원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한전을 향해 걸어가다 보니 왼쪽으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듯한 산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수도산 등산로였다. 매년 서너 번은 오르게 되는 곳이라서인지 새로움보다는 친근감이 가슴깊이 스민다. 갑자기 해발1317m인 수도산으로의 클라이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하지만 어떡할거나 시간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수도산으로의 등정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는 분주히 나한전을 향해 걸어갔다.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을 모신 나한전, 나한은 비록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민간신앙에는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시간 반 정도를 소비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따라서 수도암 입구의 약수 한 사발을 쉼 없이 들이켰는데 금세 갈증이 사라지고 다시 힘이 솟구친다.

 

실상, 공양간 뒷편에 있는 석교를 지나는 것으로 수도암을 둘러보던 내 발걸음도 마무리 되었다. 어느덧 가을의 짧은 해도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탓에 나는 오늘의 사찰여정을 이쯤에서 접고 법전스님이 흩트린 생각 한 구절을 떠올리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어두운 날을 살았던 건 어두운 마음으로 살았던 거다. 문득 나를 놓고 기다리면 말없이 서있는 것들과 말없이 지나가는 것들이 보인다. 저 숲은 제 몸 하나 푸른 것으로 늘 푸른 날 속에 서있고 그 곁에 모여든 새들의 울음소리는 그 푸른 날 속으로 번지고 있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어리석은 날을 살고,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의 시간을 사는 거다. 겨우 손톱만한 마음으로 부처의 세상을 만날 수나 있을지.

덧붙이는 글 | 수도암은 수도산 산행 후 잠시 여분의 휴식을 가지고 돌아 볼 수 있는 아늑한 사찰이다. (수도산 단풍은 아마도 11월 초순이 지나야 절정을 이룰 것 같음)


태그:#수도암,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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