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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2단계 행동계획이 담긴 합의문안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본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식 발표는 이틀 후로 미뤄졌지만, 지난 2·13 합의에 이어 2단계 행동계획에 합의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프로세스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의 문안이 공개되지 않아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석대표들을 발언을 종합해보면 회담 목표치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연말까지 영변 핵시설(5MWe 원자로, 재처리 시설, 핵연료봉 제조공장)을 불능화하고 플루토늄의 생산·사용·재고는 물론이고 농축우라늄 의혹 해소를 비롯한 핵 프로그램의 신고가 담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북한은 이러한 불능화와 신고의 정확성과 완전성에 대한 적절한 검증 방안도 수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2단계 비핵화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도 담겨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95만톤의 중유에 해당하는 에너지 지원을 중유와 노후한 발전소의 개보수 지원으로 나눠 합의문안에 명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초미의 관심의 모았던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도 '연내'라는 시점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의지를 표명하는 수준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 앞둔 노 대통령 어깨 가볍게 해줘

 

이러한 회담 결과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프로세스가 탄력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외 대북강경파들은 '연내 불능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회의론을 많이 피력했지만, 이번 6자회담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실상의 불능화'에 합의함으로써 이러한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미국이 지금까지 공언해온 것처럼 연내 불능화 합의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본격화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곧 열릴 것으로 보이는 6자 외무장관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개시를 선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둘째는 지난 10개월간 축적된 북미간의 신뢰 구축이 빛을 발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공고해질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는 점이다. 회담 직전에 불거진 북한-시리아 핵거래설과 부시 대통령의 '야만 정권' 발언이 회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팽배했지만, 이들 문제가 이번 회담에서 논란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이는 북미 양측이 상대방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불신'의 기초로 삼았던 과거의 북미관계와는 상당히 다른 맥락으로 북미관계의 신뢰가 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는 내일(2일) 평양행에 나설 노무현 대통령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어 보다 실질적인 논의와 합의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다는 점이다. 기실 "남북정상회담이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는 국내 보수파들의 정치 공세로서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다.

 

남북관계와 6자회담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두 수레바퀴에 해당된다. 그런데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둘 사이의 선순환 구도를 만들지 못하면, 그 의미와 파급력인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6자회담 합의는 남북정상이 두 개의 수레바퀴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사전에 덜어주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최후의 결단, 김정일의 '핵 억제력 포기'

 

이처럼 한반도 비핵화가 5부 능선을 넘어섰다고 해서, 앞날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니다. 우선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정확성 및 농축 우라늄 문제 의혹 해소의 진정성이 '검증의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핵심적인 상응조치인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 종료를 북한의 2단계 비핵화 프로세스와 어떻게 '행동 대 행동' 차원에서 연계해 해결할 것인가도 난제 가운데 난제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이 이미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핵무기 및 핵물질의 폐기이다. 이는 내년부터 시작될 3단계 비핵화 및 평화 프로세스에 해당된다. 그런데 2단계까지의 북한의 핵포기에 대한 상응조치는 주로 경제적·외교적 사안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3단계, 즉 북한의 핵무기 및 핵물질 폐기는 경제적·외교적 상응조치를 넘어 한국과 미국의 군사적 상응조치를 요구한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이른바 '핵 억제력'을 선군정치의 표상이자, 군사적 억제력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이는 결국 핵무기 포기는 경제적·외교적 상응조치로만 풀 수 없는 새로운 '협상의 법칙'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협상의 법칙의 중심에는 군사적 상응조치가 자리잡고 있다.

 

군사적 상응조치에는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의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하고 있는 미국의 핵우산뿐만 아니라, 한미합동군사훈련, 주한미군 재편, 북방한계선(NLL), 그리고 한반도 군축 등 대단히 까다롭고 민감한 문제들이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군사문제'를 다뤄야 할 이유

 

9·19 공동성명, 2·13 합의, 그리고 이번 6자회담 합의문안 타결 등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함의를 갖고 있지만, 어려운 문제들은 뒤로 미루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동시에 뒤로 미뤄진 문제들을 앞으로 풀지 못하면, 한반도 정세가 또 다시 역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열린다. 이번 6자회담 합의가 두 정상의 어깨를 가볍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미뤄져온 난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3단계 비핵화 및 평화 프로세스의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까지 탕감시켜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역사적 과제의 중심에는 한반도 군사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핵문제의 기본구도가 북미관계에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북핵 해결은 '한반도 군사문제 해결'이라는 큰 틀의 접근법을 요한다. 그리고 한반도 군사문제의 핵심에는 북미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핵심의제가 한반도 군사적 긴장완화 및 군축이 되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당장 합의가 어렵더라도 최소한 남북한 정상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포괄적인 문제 해결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기초는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만 지난 10여년간 한반도를 짓눌러온 핵문제와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딛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태그:#6자회담,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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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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