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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공로훈장단 장부에 21호 기입된 차도선의 건국공로훈장증.
 건국공로훈장단 장부에 21호 기입된 차도선의 건국공로훈장증.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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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범도, 뛰는 차도선'

홍범도 의병장과 함께 의병을 모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항일무장투쟁으로 일본군을 격퇴하며 친일파 처단에 나섰던 함경도 산포수 출신의 의병장 차도선(車道善). 3대에 걸친 항일투쟁 투신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된 아들과 손자들이 사형·무기징역 등의 옥고를 치르면서 집안은 풍비박산난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이지만 차도선 가문의 의병투쟁과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위 독립운동가들의 상해임시정부 활동과 달리 항일무장투쟁에 목숨건 민중들은 사진을 찍거나 기록을 통해 자신들의 항일투쟁을 역사에 남길 겨를이 없었다. 그건 호사스런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민중의 무장투쟁이 역사에 사라졌듯이 차도선의 의병투쟁 또한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들과 손자들의 중국 공산당 혁명과 해방 후 북한 재건사업 참여, 항미원조(抗米援朝; 6·25전쟁 당시 미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지원하던 중국의 외교정책) 참전 그리고, 중국 거주 등은 냉전적 사고에 갇힌 남한의 역사학계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아울러 3대에 걸친 전면 항일투쟁에 따른 필연적 가난과 후대들의 힘겨운 삶은 가문의 독립투쟁을 호소할 겨를조차 없앴다.

윤보선 정부는 차도선 의병장에게 1962년 3월 1일 내각수반 송요찬 명의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직계 가족 모두가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 훈장은 전달되지 못했고, 보훈처가 보관했던 훈장은 2003년 6월 19일 손녀 차월겸(63)에 전달됐다. 정부는 지난 95년 중국 길림성 무송현 두지동 옛집 타작마당에 묻혀 있던 유해를 대전국립묘지 현충원에 모셔와 안장했다.

신출귀몰 차도선 의병부대가 거둔 '후치령전투' 승전보

부하들과 함께하고 있는 홍범도(가운데) 장군
 부하들과 함께하고 있는 홍범도(가운데) 장군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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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선 의병장과 후손들의 행적이 파악된 것은 연변의 한 재야사학자에 의해서였다.

일명 '자전거 사학자'로 불리는 연변의 재야사학자 강룡권(1999년 작고) 선생은 지난 91년 연변의 조선족 잡지 <장백산> 1월호 '역사의 발자취' 란에 차도선의 무장봉기와 3대에 걸친 항일투쟁, 가계사(家系史)를 담은 '차도선과 그의 후예들'을 게재했다.

이를 중심으로 차도선의 의병투쟁과 집안 내력을 정리해본다.

1863년 1월 29일 함남 북청군 풍산면(보훈처 공훈록에는 '함남 갑산'으로 기록됨)에서 태어난 차도선(애명 차천리)은 광산노동자(사금채굴업자), 해산군인(대한제국군 진위대 하사로 복무) 출신이라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산포수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가 의병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는 1907년 일제가 조선군대 강제해산에 이어 '총포및화약류단속법'을 제정해 북청의 포수 73명의 사냥총을 빼앗았다는 소식이었다. 차도선은 북청군 풍산면을 중심으로, 홍범도는 안산과 안평 두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았다.

차도선과 홍범도는 그해 11월 15일 68명의 포수가 모인 가운데 북청군 안평사 언방골에서 무장봉기를 선포했다. 당시 44세로 연장자인 차도선이 도대장(都大將), 39세인 홍범도가 부대장(副大將)을 각각 맡았으며 의병부대 이름은 '차도선 의병대', '홍범도 의병대' 등으로 불렸다. 이들은 봉기 다음 날인 16일 친일파 모임인 일진회원이며 안산면장인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하고, 22일, 23일 이틀 동안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일본군과 순사 등 10여명을 사살한다.

의병부대에 의한 피해가 커지자 북청군수비대 미야베 보병대위는 그해 11월 25일 60명의 일본군을 후치령에 투입하며 토벌에 나섰으나 산포수 생활로 지형지세를 꿰고 있는 차도선과 홍범도의 지략과 전술에 희생자만 남긴 채 퇴각한다. 후치령 전투는 조선북부지방에서 일제에 거둔 첫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의병부대는 12월 초순에 북청·풍산·황수원·갑산·삼수 일대에서 기습전으로 일본에 타격을 주었고, 12월 15일엔 장항리(獐項里)에서 화물과 우편 호위병을 기습하였으며, 16일에는 장항리에서 아오또 대위가 이끄는 일군과 교전하였고, 26일에는 삼수군 중평장에서 함흥수비대가 파견한 일제 기병대와 격전하면서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이들의 맹활약이 알려지면서 부대원이 1000여명으로 급속히 늘어나 4개 부대로 재편하기에 이르렀다. 12월 31일 일제가 의병을 섬멸하겠다며 삼수진에 대한 두 번째 공세를 가해오자 차도선-홍범도 부대는 천연요새인 삼수(三水)로 유인했고, 3시간에 걸친 응전 끝에 일본군은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도주했다.

다음 해인 1월 9일 북청주재 50연대 제3대대장 미츠끼 소좌는 병력 200여명을 증강한 가운데 직접 토벌에 나섰다. 차도선-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대병력이 삼수를 포위공격하자 소수 병력으로 시간을 끌며 저항토록 한 뒤, 다음날 새벽 6시에 갑산읍의 일본군수비대를 기습했다. 9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수비대를 궤멸시키고 우편국 등 각 기관을 소각했다. 이 때 일본군 생존자는 달아난 1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제 귀순공작에 말려든 차도선... 계급장 떼고 홍범도 부대에 합류

차도선 의병부대가 중국 임강현장에게 무기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띄운 문건
 차도선 의병부대가 중국 임강현장에게 무기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띄운 문건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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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선-홍범도 의병부대가 봉기한 이후 3개월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토벌에 나섰으나 소탕은커녕 피해가 막심했다. 일본군은 2월부터 3월까지 가족을 인질 삼아 의병이 산에서 내려오면 식량을 준다는 등 선무공작과 귀순공작을 전개했다.

당시 의병부대는 탄약이 떨어지고 식량난에 처하는 등 어려운 시기였다. 1908년 3월 12일 서간도 임강현장(臨江縣長)에게 보낸 문건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총대장 격인 모사장(謀事將) 박충보(朴忠保)와 도대장 차도선, 부대장 홍범도 명의로 보낸 공함(公函) 내용은 이렇다.

"청한 양국은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서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듯, 어찌 수수방관만 하겠는가. 왜가 감히 창궐하여 두 나라 국경을 범했으니, 갑오의 변은 귀국으로서는 분노요. 병신의 변은 우리나라의 수치가 아니던가.
(敬啓者 淸韓兩國 本是脣齒之勢也 脣亡則齒寒 傍觀可乎 扶傾可乎噫 彼倭酋 何敢猖獗於兩境哉 甲午之變 貴國之所憤 丙申之變 我國之所恥)

그 분노와 수치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으리오. 고로 머리를 숙여 명을 받들겠사오나. 우리나라가 편벽한 바다 한쪽에 자리하고 국토 또한 작으며 1, 2인의 의사가 거사를 창의했으나 무기가 낙후하고 병사들의 훈련 또한 매우 부족한 편이므로 특히 청을 드리는 바이다. 공문을 보신 후 무기 천[ ]기를 허락해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所憤所恥 豈不報雪 而俯其首廳其命 故離我國偏在海隅之偏小 豈無一二人義士特倡小義 然器械之利鈍 士卒之鍊習 不足不及 故玆敢仰請 照亮後器械千[]特許之地切要)"

적지 않은 의병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하산했다. 차도선은 홍범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해 엄중한 위기를 넘기겠다는 계산으로 휴전 제안을 띄웠고, 이를 담판 짓기 위해 3월 7일 25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 오쿠무라 중위를 만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속을 어기고 무장해제시켰으며 이에 저항하는 좌대장(左大將) 태양욱(太陽旭)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유인하기 위해 차도선을 감금했다. 2개월 넘도록 갑산헌병분견소에 갇혀 있던 차도선은 5월 7일 탈출해 홍범도 부대에 합류했다. 홍범도는 과오를 반성하며 백의종군하겠다는 차도선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차도선은 도대장이 아닌 의병으로 계급장을 떼고 무장투쟁에 다시 나섰다.

"왜놈 말소리 들리지 않는 두메산골에 가서 살겠다"

3대에 걸친 항일무장투쟁 가계도. 차도선의 아들과 손자 등은 모두 항일투쟁에 투신한다. 유례를 찾기 힘든 항일투쟁이지만 그의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3대에 걸친 항일무장투쟁 가계도. 차도선의 아들과 손자 등은 모두 항일투쟁에 투신한다. 유례를 찾기 힘든 항일투쟁이지만 그의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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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차도선이 탈주하자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차도선의 아내와 친형 차도심에게 인두질 등의 고문을 가했다. 고문 끝에 풀려난 아내는 1916년 3남1녀의 자식과 조카 차원식(차도심의 외아들)을 데리고 중국 무송현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굶주림이 심해지자 외동딸을 민며느리로 주었고, 딸의 이름과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차도선의 아내는 1940년 10월 사망했고, 일본 경찰의 고문에 시달리다 도주한 차도심은 동생 가족과 합류해 살다 1933년 73세로 사망했다. 차도심은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양포(洋砲 양총), 칼, 화약, 탄약 등을 제조해 의병부대에 공급하는 등으로 동생의 의병투쟁을 도왔다.

1919년 4월 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士)를 조직해 만주의 황국보(黃菊甫) 등과 연락하여 200명의 독립군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같은 해 9월에는 무송현에서 500여명의 독립군 등을 훈련시키는 등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무렵 나이(60대 중반에서 후반 추정)가 들어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왜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두메산골에 가서 살겠다'며 무송현의 첩첩산중인 두지동에 들어가 만년을 보낸다. 차도선은 12가구 50~60명이 사는 이 마을에서 자신의 집을 서당식 학교로 꾸민 뒤 마을 어린이 10여명에게 반일 계몽교육을 10여년간 시켰다.

차도선은 1938년 3월 일제에 참변을 당한다. 중국 동북3성에 괴뢰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무장투쟁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마을을 소개(疏開)시키기 위해 두지동 전체를 불 지른 것이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당시 74세)는 자신의 집과 마을이 잿더미로 주저앉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인근 동대툰 집단부락으로 소개된 차도선 새로 살 집을 짓다가 병을 얻어 1939년 2월 8일 무송현 추수동 동대툰에서 75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집안 사내들은 모두 항일투쟁으로... 그러나

차도선의 아들과 손자 등 집안의 사내들은 모두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맏아들 리덕(1889년생)은 아버지와 홍범도가 무장봉기를 선포할 때 의병대원으로 부친의 독립투쟁에 합류한다. 리덕은 경술국치(1910년) 이후 중국 남만과 동만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전투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두지동에서 농사를 짓는다.

1942년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 선풍이 일면서 중국 공산당원 등 61명이 일제에 체포돼 14명이 사형당하고 5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리덕은 둘째 동생 운학, 셋째 동생 원복과 함께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으로 풀려난다. 몽강현 2도화원구 소가영촌에서 농사를 짓던 리덕은 일제의 고문으로 쇠약해진 데다 항미원조에 나간 맏아들 두천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몸져누웠다가 1953년 2월 65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리덕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리덕의 맏아들 두천(1924년생)은 아버지와 함께 반일 지하운동에 참가했다가 무송 '공산당사건'에 부친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두 달 만에 가석방되었다. 1945년 6월 일제에 강제 징집된 두천은 흑룡강 해라얼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하자 도주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두천은 1946년 결혼 2개월 만에 동북민주련군(조선항일유격대와 중국인민혁명군이 통합된 부대) 일원으로 해남도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49년 항미원조로 조선전선(6·25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숨졌다. 리덕의 둘째 아들은 일곱 살에 요절해 이름조차 알길 없다. 맏딸과 둘째딸은 출가한 후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셋째 달 궁녀는 중국 휘남현에서 살고 있다.

차도선의 둘째 아들 운학(1895년생)은 어머니와 함께 무송현 두지동으로 이주한 후 항일독립운동과 항일지하사업에 참가했다. 1942년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봉천 감옥에서 복역하던 운학은 해방을 넉 달 앞둔 1945년 4월 15일 탈옥 주모자로 간주돼 총살형에 처하면서 51세의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친다. 운학의 하나뿐인 아들은 1946년 15세에 간질병으로 사망했다.

항일투쟁과 사형, 투옥, 고문... 묻혀진 '비운의 가족사'

차도선의 셋째 아들 차원복의 가계도. 한국에 입국한 세 딸 가운데 두 명이 독립유공자 자녀로 인정돼 국적을 취득했지만 호텔 청소원으로 일하는 등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차도선의 셋째 아들 차원복의 가계도. 한국에 입국한 세 딸 가운데 두 명이 독립유공자 자녀로 인정돼 국적을 취득했지만 호텔 청소원으로 일하는 등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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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선의 셋째 아들 원복(1902년생)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한 뒤 무송·화전·통화·장백·몽강현 등을 넘나들며 항일 지하사업을 전개한다. 1942년 형들과 함께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해방되면서 풀려난다. 무송현으로 돌아온 원복은 농협회 회장으로 토지개혁과 지주청산운동에 참가했으며, 1974년 휘남현에서 거주하다 72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원복은 2남4녀를 두었다. 맏딸 옥성은 1987년 63세에 사망했다. 맏아들 일천(1928년생)은 무송현 백산학교 재학 중 항일노래를 부른 죄로 1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42년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아버지 3형제와 큰아버지 아들(두천)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3대에 걸친 항일투쟁으로 차도선의 가문은 초토화가 됐다. 특히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호주 3명(리덕·운학·원복)이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복역 중이고, 집은 불타는 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살길이 막막해졌다. 원복의 아내 이동순은 아들 일천과 금겸(애명 금천)에게 결혼반지인 은가락지 한 쌍을 각각 나눠주면서 왜놈의 감시없는 곳에서 숨어살라고 당부했다.

두 형제는 1년간 중국인 집에서 농사일을 하며 피신생활을 하다 1944년 외손주들을 찾아 나선 외조부 이창근이 거두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일천은 항미원조에 참군했다가 1951년 가을 중상을 입고 제대한 후 병세가 악화되면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원복의 둘째 아들 금겸(1931년생 애명 금천)은 백부와 아버지, 사촌형들의 항일투쟁에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소년투사가 됐다.

1941년 11월 집에 찾아온 유격대 처녀공작원으로부터 총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엿들은 열한 살 소년 금겸은 총을 훔치기 위해 무송현 추수동경찰서를 찾았다. 일본 경찰들이 점심 먹는 틈을 타 벽에 걸려 있는 38식 기병총 한 자루를 들고 나오다 당직 서던 김진형이란 경위보에 잡혔다. 다행히도 그는 차도선 일가를 잘 알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를 몰래 돕던 사람이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차도선의 후예들은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으나 그 중 가장 많이 공부한 사람은 금겸이었다. 외조부 이창근의 보살핌으로 무송의 백산학교를 다닌 데 이어 1948년 통화시고중(조선족학교)을 졸업하고 통화현 조선학교 등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6·25전쟁 후 중국정부의 번역책임 교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2월 북한으로 들어가 평북 신의주경공업대학(중앙대학) 도서관 외국문사서로 일하다 1992년 62세에 뇌졸중으로 운명했다. 금겸은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광이'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나 행방이 묘연하고, 딸 셋은 북한에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원복의 맏딸 옥성은 1987년 63세에 사망했고, 둘째 딸 옥녀(71세)는 2006년 한국에 입국, 아들(홍대근 49세) 내외와 함께 금천구 가산동(가리봉)에 거주하면서 국적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셋째 딸 월겸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광복55주년에 초청돼 2000년 8월 입국했다. 하지만 정부는 행사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통보했고, 이를 거절한 월겸은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잡일과 노숙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2004년 1월 국적을 취득했다. 원복의 넷째 딸 옥겸(59)은 2004년 6월 입국해 2006년 3월 국적을 취득했으며 현재 호텔 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차도선의 형 차도심의 외아들 원식(1900년생)은 양세봉독립군 부대원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소련군에 몸을 담는다. 소련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해 일제와 싸운 원식은 봉천감옥문을 열면서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무기 복역 중이던 사촌형제인 '리덕', '원복'과 해후하지만, 둘째 사촌형 '운학'이 일제에 총살당한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중국 관리로 일하던 원식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다 1976년 76세에 눈을 감았다.

김일성도 차도선 무장투쟁에 감명...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민족사의 자랑

차도선 의병장의 손녀. 셋째 손녀 월겸, 둘째 손녀 옥녀, 넷째 손녀 옥겸(오른쪽부터)
 차도선 의병장의 손녀. 셋째 손녀 월겸, 둘째 손녀 옥녀, 넷째 손녀 옥겸(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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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의병연구(1998년)를 한 박민영(47)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차도선의 의병투쟁에 관심을 가졌으나 자료가 빈약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의병을 일으킨 1907년 11월부터 1908년 3월까지는 홍범도보다 수위에 있었던 차도선이 의병투쟁 주역이었던 것 같다"면서 "김일성 회고록에 '차천리를 찾아가 밤새도록 토론하면서 감명 받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김일성도 차도선의 무장투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차천리는 차도선의 애명이다.

박 연구원은 또 "함경도 의병은 규모도 가장 컸는데 1차 자료가 너무 없어 연구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다, 독립운동 연구에서도 만주 항일투쟁과 의병연구는 소홀히 취급받고 있다"면서 "친일파를 밝혀내는 것 못지않게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국가의 정통성을 밝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문했다.

차도선에겐 뼈아픈 과오가 있다. 일본의 귀순공작에 말려들면서 부하들이 희생됐고, 의병투쟁에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과오일지언정 배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군에서 탈주한 뒤 홍범도 부대에 합류해 백의종군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것은 물론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이 이를 뒷받침한다.

변종호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인간 누구나 과오가 있을 수 있고 그 과오를 돌이킬 수도 있다"며 "차도선 의병장의 공적과 과오에 대해 정확하게 조명할 필요는 있겠지만 흑백논리로 잘못을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변 사무국장은 또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경우이며 자랑거리"라며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지만 대개 독립운동이 당대에 끝난 경우가 많다, 차도선 의병장처럼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게 학계와 단체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태그:#의병투쟁, #일제무장투쟁, #차도선, #함경도 산포수,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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