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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하면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떠오른다. 남북정상회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김 전 대통령이 3김 가운데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인물이 된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남북정상회담이다.

 

그런데 이 영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몫이 될 수 있었다. 1994년 7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기록될 기회를 놓쳤다.

 

만약 이 때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여러가지 상상이 가능한데 내 생각에 '화끈한' YS의 성격상 아마 DJ보다 훨씬 더 퍼줬을 것이다. YS가 퍼줬으면 보수언론이나 수구진영은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편이 하는 일이니까…. 그러면 10년째 계속되는 '남남갈등'이니 '퍼주기'니 하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안이한 상상이라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 때 평시작전권이 환수됐을 때 보수진영은 전시작전권도 빨리 환수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7월 16일 국회에서 당시 이양호 국방장관은 "서해북방한계선(NLL)은 공해상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선으로 북괴 함정이 넘어와도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그 다음 날 <조선일보>는 '합의된 선 없어 논란 무의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NLL은 연합사가 1953년 8월 30일 임의로 설정한 것으로 이 국방장관이 NLL 침범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는 것"이라고 썼다.

 

전시작전권 환수나 NLL문제에 있어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이 때와 정 반대 입장이다. 과거에는 자기 편이 하니까 옹호했고, 지금은 '정적'이 하니까 무조건 반대한다.

 

핵 폐기가 전제로 깔렸다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지난 10일 '중앙 글로벌 포럼' 기조연설에서 "북한이 연내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이행하고 내년에 본격적인 핵 폐기 단계에 진입한다면 차기 정부는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협의체'를 설치해 400억 달러 상당의 국제협력자금 조성 등 북한 개발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북한과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이날 내놓은 대북 정책은 '신 한반도 구상'으로 불린다. 지난 2월 발표했던 '비핵·개방 3000구상'(북한이 핵 폐기 결단을 내리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이르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고 한다.

 

주요 내용은 ▲핵 불능화 이행 단계에서 곧바로 '비핵·개방 3000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고 ▲사전협의를 위해 '남북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협의체'의 구성 ▲북한 수해문제 해결 적극 지원, 북한의 식량난 해소, 의료지원 등을 위한 '인도적 협력 사무소' 개설 ▲'남북경제공동체 협력협정'(KECCA)을 체결해 남북경협의 활성화, 투자·무역의 편리화, 남북교역의 자유화 등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 ▲새로운 남북관계를 바탕으로 '신동북아 경제협력 구상' 추진 등이다.

 

이를 보고 통일부의 한 기자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과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핵 을 완전 폐기한 뒤가 아니라 '핵 불능화 이행 단계'에서 곧바로 '비핵·개방 3000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는 대목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 후보의 대북정책에는 비핵화가 전제로 들어있고 노무현 정부는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는 착각이다.

 

지난 2003년 1월 당시 정동영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특사 자격으로 다보스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우리는 '한반도 경제공동체'로 향하는 과감한 북한 재건계획(가칭 '북한판 마샬플랜')을 검토하고 있다"며 "만약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다른 안보상의 우려 요인을 제거한다면 북한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포기하면'(2003년 당시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다)이라는 전제 조건과 '북한이 핵 폐기 단계에 진입하면'이라는 전제 조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되레 이 후보의 전제 조건이 약해 보일 정도다.

 

조갑제씨의 이해할 수 없는 침묵

 

정동영 의원의 다보스 포럼 연설은 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연계시켰다. 그리고 참여정부는 대북 송금 특검을 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일부 진보진영 학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정경분리에 입각한 햇볕정책과 별 상관없으며, 상호주의에 가깝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연계시켰던 전략은 실제 진행과정에서 우왕좌왕했다.

 

이명박 캠프의 남성욱 교수는 1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핵 문제와 상관없이 무조건 지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하는 것도 아니었다"며 "무늬만 경협을 추진하다가 북한은 남한이 생색만 내고 실질적 도움은 안된다고 실망했다"고 진단했다. 타당성 있는 말이다

 

(혹시 다보스 포럼에서의 기조연설은 정동영 후보가 한 것으로 노 대통령의 평화번영 정책과는 다르다는 반박이 있을 지 모르겠다. 다보스 연설은 개인 생각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특사 자격으로 '대통령의 생각'을 대신 발표한 것 뿐이다.)

 

이 후보가 '김정일 정권에 400억달러를 퍼주겠다'고 발표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보수 진영 그 어느 곳에서도 비난 목소리가 없다. 주요 보수 언론들이 혹시 사설이나 칼럼으로라도 일말의 우려를 표시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전혀 없다. 모두 신 한반도 구상을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극우 논객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홈페이지(www.chogabje.com)를 며칠 간 살펴봤는데 최소한 대문 글에서는 이 후보의 신 한반도 구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이 후보가 신 한반도 구상을 발표할 때 가지와라 마코토 <니혼게이자이신문> 논설위원이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물었다. 이 후보는 "납북자 문제 때문에 6자회담의 핵 문제 논의에 소홀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답했다. 이른바 '친북좌파' 진영의 입장과 별 차이가 없다.

 

납북자 문제만 나오면 펄펄 뛰는 조갑제씨가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 이명박 후보를 자기 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갑제씨는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후보를 비난하면서 이 후보를 지지했다.

 

만약 이 후보보다 앞서 범여권 후보가 결정됐고 그가 이 후보와 비슷한 내용의 대북 정책을 발표했다면?

 

보수 언론에는 '핵무기 가진 북한에 또 못퍼줘서 안달', '수십조원의 대북지원 자금 또 혈세로?', '북핵 완전 폐기에 10년…다음 대통령 임기 중 하지도 못할 공약(空約)', '퍼 준 400억달러 핵무기 개발에 전용 불 보듯' 라는 기사가 실렸을 것이다.

 

결국 대북 정책을 둘러싼 그 수많은 갈등은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 문제인 것 같지만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식의 사고 방식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방법이 별로 안보인다. 그래서 차라리 이명박을 찍고 말어 하는 '상상'을 할 때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수구 진영 쪽 사람들이 남남갈등이니 퍼주기 하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않을 것 같아서다.

 

(추신 : 이 반어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중동 기자나 다름없다고 비난하는 댓글은 달지 말기를 바란다.)


태그:#이명박, #대북정책, #조중동,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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