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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이 시드니에 나타났다."

 

6일 오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15차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시드니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9·11테러를 진두지휘한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나타난 것.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10명의 일행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묵고 있는 인터콘티넨탈호텔 수 미터 전방까지 접근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사실이다. 그날은 9·11테러 6주년을 불과 5일 앞둔 시점이었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빈 라덴이지만 한순간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건이었다. 그는 사살명령을 받은 상태로 아프가니스탄 깊은 산속을 떠돈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리무진 차량 행렬은 무사통과?

 

이쯤에서 사실을 밝히자. 그는 가짜 빈 라덴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전면 차단되는 상황에서 검은색 리무진 3대와 차량 행렬을 에스코트하는 오토바이크 2대가 인터콘티넨탈호텔로 접근했다.

 

그 중 리무진 한 대에는 캐나다 국기가 달렸고 APEC 주최 측이 발급한 각종 스티커가 부착된 상태였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캐나다 일행이었다. 당연히 논스톱 통과였다.

 

첫 번째 검문소와 두 번째 검문소에 근무하던 경찰들은 수신호로 방향까지 안내했다. 그러나 마지막 허들이었던 세 번째 검문소에서 차량 행렬은 진입을 제지당했다. 호텔 입구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정작 놀라자빠진 쪽은 경찰이었다.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수염을 기르고 무슬림 전통복장인 자루처럼 생긴 옷을 입은 빈 라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초특급 비상사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호주국영방송 ABC-TV의 코미디 프로그램 '모든 일에 도전하는 추적자의 전쟁(The Chaser's War on Everything)'의 제작팀이었다.

 

 

철통 같다더니... 코미디 한 방에 무너진 1700억원 경비망

 

APEC이 열리고 있는 시드니 시내엔 요새를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비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APEC 장벽'이러고 불리는 2.8m 높이의 철조망 장벽을 설치한 것도 부족해서 하루 종일 헬기가 선회하고 오페라하우스 앞바다엔 해양경비정이 떠 있다.

 

말 그대로 철조망의 숲이고 시드니 스톱(Sydney Stop)이다. 더구나 APEC 회의장과 정상들이 묵는 숙소 주변에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저격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시드니 APEC 경비예산이 시드니올림픽 경비예산보다 많은 2억5천만 호주달러(약 1700억원)라고 하니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금요일인 7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해서 시드니를 '유령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부시 대통령 주변은 유별나다. 숫자를 알 수 없는 '선글라스 맨'이 대거 미국에서 날아와서 대통령을 경호한다. 보도에 의하면 그들에겐 부시 대통령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러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람을 사살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 있다고 한다.

 

그런 보도를 사실로 확인해주는 앤드류 스키피온 NSW주 경찰청장의 기자회견이 7일 오후에 열렸다. 그는 몹시 화가 난 얼굴로 회견장에 나타나서 ABC-TV 제작팀을 맹비난했다.

 

분개한 경찰 "사살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

 

스키피온 경찰청장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들이 호텔 지붕에 배치된 저격수들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시드니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저격수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조역을 맡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어서 그는 "그들이 웃기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다, 화가 나고 또 화가 날 뿐이다, 더구나 국영방송 관계자들이 그런 바보짓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데이비드 캠벨 NSW주 경찰장관도 기자회견을 통해서 "APEC 경비작전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실제상황이다, 지금 시드니에 머물고 있는 리더들이 누구인가? 하워드 총리의 말대로 우리 세대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행사를 치르고 있으니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프로그램 진행자와 PD 등 방송국에 소속된 8명과 운전을 위해 고용된 3명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바로 경찰서로 압송된 그들은 장시간 조사를 받은 후 조건부 보석으로 풀려났다.

 

사전에 방송국 소속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다고 밝힌 제작팀은 10월 4일 법정에 출두할 예정이다. 그들은 APEC특별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6개월 실형을 살아야 한다.

 

시민 86% "재밌네"... 담당 PD "경찰이 안내까지 해놓고선..."

 

사정이 이런데도 ABC-TV 제작팀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시민들마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어 경찰당국의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시드니모닝헤럴드>가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6%가 "웃긴다"고 답했고 14%만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것.

 

이런 반응 때문인지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인 줄리안 모로우 PD는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는 누구를 해롭게 할 목적으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일행이 검문소 두 곳을 통과할 때 경찰들이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지 않았는가?"라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서 그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가짜로 분장하는 것과 가짜 신분증을 이용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더욱이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호주 경찰당국은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꼭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면에 알렉산더 다우너 외무장관은 "아무튼 최악의 상태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지나치게 몰두한 것 같다"는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외신들은 9·11사태 6주년을 맞아 빈 라덴이 비디오 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그 메시지에서 가짜 빈 라덴에게 비난을 퍼부을지, 아니면 시드니 시민들처럼 "재밌다"고 말할지 궁금해진다.

 


태그:#빈 라덴, #APEC, #부시, #9.11,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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