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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 발굴 현장이 공개되었다.
ⓒ 김영선

하늘도 슬펐던 것일까. 29일, 지하에 있던 그들이 세상을 만나던 날, 마침 호우 경보가 내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가 내렸다.

빗물이 제대로 빠지지 못해 발표장으로 가는 길 내내 발이 웅덩이 속에 빠진다. 유가족들 대부분이 고령이라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작은 천막 안에 간신히 착석 하자 첫 번째 발표가 시작된다. 모두들 숨죽여 중간발표를 듣는다.

발표장 전면에는 사진 자료가 배치되어 있었고 왼쪽에는 5학살지에서 나온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유족들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5학살지에서 발견된 유해는 모두 5구, 유품으로 미뤄 모두 민간인으로 보였다. 수첩 겉 코팅지와 연필, 단추, 고무줄 등이 발견 된 것으로 보아 민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 유해들은 머리에 총상들이 발견 되었고 엎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또한, 유해의 크기나 머리 부분에서 고무줄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여성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묻히게 되었을까. 재소자도 아닌, 남성도 아닌, 여성의 유해가 말이다.

5구의 유해는 성인 한 사람이 묻힐 정도의 작은 구덩이 안에 층층이 겹쳐서 매장되었다. 한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엎어진 채로‥ 가장 아랫면에 매장된 유해는 엎어진 상태에서 두 팔이 나란히 머리 위로 뻗어 있었다. 역시 머리에 총상 흔적이 있다.

▲ 5학살지 맨 아래쪽에서 발견된 유해, 크기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 김영선

엎어지던 순간, 얼마나 억울했을까. 총상의 흔적을 보니 마음이 아찔하다. 크기로 보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추정되는 이 유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그 누가 알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망자는 대답이 없다.

이어 3학살지에 대한 발표가 이어지자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료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곳에서는 집단 희생의 결정적인 증거, 약 30여구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저 어딘가에 내 가족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 속 유해들은 처참했다. 모든 유해가 거의 같은 자세를 취해 무릎이 꿇린 상태에서 상체가 앞으로 숙여진 자세로 매장되어 있었다. 사진에 대한 발표가 시작되자 앞서 유가족 인터뷰에 참가했던 전숙자씨가 울고 있다.

▲ 산내서 아버지를 잃은 전숙자씨. 발표를 듣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 김영선

산내에서 아버지를 잃은 그는 지난번 인터뷰에서도 계속 눈물을 훔쳤었다. 그 아픔을 알기에 어떠한 말도 건넬 수 없었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참지만 아버지를 찾아 헤맨 지난 세월이 얼마였던가. 아버지를 잃고 고생하며 한으로 살았던 세월이 얼마던가.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멈출 줄 모른다.

유족들을 위로라도 하듯 빗줄기가 잠시 멈추는 듯 했다.

간략한 발표가 끝난 후 3학살지에 가서 직접 유해를 보기로 했다. 수많은 취재진들과 유가족들이 서둘러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유해들을 직접 보면 유가족들의 슬픔이 더할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로2, 세로4.5미터 정도 되는 작은 구덩이 안, 5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유해들이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지, 이 무서운 산기슭에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아니, 안타깝다는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애처로울 뿐이다.

이어 보충 발표가 이어진다. 뒤편에 일렬로 유가족들이 서있다. 아니나 다를까,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제대로 다리조차 뻗지 못하고 숨을 거둔 그들, 뒤쪽 유해의 상반신에 가려져 겹쳐 있다. 곳곳에 있는 탄피들이 그날의 총성을 들려주는 듯하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 발표를 듣는 내내 유가족들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 김영선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유품중에 '中'자가 표기된 단추와 교구와 신발, 허리띠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미성년자가 포함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유해의 크기도 비교적 작은 형태로 출토되어 위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총살을 가했는지, 이런 식으로 매장을 했는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을까. 유해들의 두개골에는 총상이 있었으며 일부는 깨져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진중한 존재이건만, 이 유해들은 어찌하여 최소한의 권리도 찾지 못한 채 이곳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유족들의 표정은 굳어질 대로 굳어 있다. 마음속으로 잃어버린 내 아버지, 내 형님을 부른다. 한 유족은 발굴 현장 가까이 쭈그려 앉아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살핀다.

전숙자씨는 "현장을 보니 더 착잡하다" 며 "아버지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답답할 뿐" 이라며 또 한 번 눈물을 훔쳤다.

오빠를 잃은 신순란 시인도 마찬가지. 고령의 나이로 산중에 올라오는 것도 힘들었을 법 하지만, 더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이었다. "이루 말할 수도 없다"는 짧은 대답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잃어버린 그들의 가족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영원히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늘도 같은 마음 이었나 보다. 모든 발표가 끝날 때 즈음, 천둥이 치고 벼락이 친다. 가늘었던 빗줄기는 이내 곧 폭우가 되어 쏟아진다. 분명, 이곳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눈물일 것이다.

▲ 발견된 유해 대부분 두개골에 총상 흔적이 뚜렷했다.
ⓒ 김영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유해들을 뒤로 하고 내려간다. 유가족들은 흘릴 눈물도 다 마른 듯 보였다. 어떤 말로 그들을 위로할 지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하늘을 봤다. 새삼스럽게 까만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무서웠다. 하늘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듯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밝혀지리라. 골령골에 묻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마음이, 유가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언젠가는 분명히 진실이 드러날 그 날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보상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규명이니‥

꼭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니, 분명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다.

태그:#대전 산내 학살, #유해 발굴 현장, #민간인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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