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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Khabarovsk)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눈을 떠 차창 밖을 바라보니 세상이 온통 은빛 자작나무 숲입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남북 방향으로 우수리 강과 평행선을 긋듯 놓였으니, 밤새 기차는 양 옆으로 우수리 강과 자작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온 셈입니다.

▲ 하바롭스크 기차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호 방면을 잇는 중간 정차역이다.
ⓒ 서부원
오전 8시 정각, 역에 도착합니다. 우수리스크(Usurisk)를 밤 10시에 떴으니, 정확히 10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두 도시와의 거리는 불과 650km 남짓인 '가까운' 곳인데다, 잘 놓인 복선철도를 감안하면 너무 여유를 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어중간한 새벽녘에 닿았다면 대략난감(?)할 뻔 했습니다.

고풍스러운 기차역을 지나 시베리아의 탐험가, 하바로프(Khabarov)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광장에 서니, 도시의 분위기가 이전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c)나 우수리스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게 됩니다.

중심지인데도 차분한 도시

하바롭스크주(州)의 주도이자, 항공편으로 미국과 유럽, 일본, 동남아 등지로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지방의 정치, 행정, 교통의 중심지인데도 번잡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외려 차분함이 느껴지는 도시입니다. 그것은 푸른 숲 사이로 군데군데 얼굴을 내민 건물들이 앙증맞게 여겨질 만큼 초록이 완연하기 때문입니다.

▲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의 고풍스런 모습. 이곳의 자연환경과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 서부원
시내 한복판의 디나모 공원, 주청사가 자리한 중앙 광장과 중심가인 무라비예프 거리 등 시내 어딜 가도 푸른 숲을 볼 수 있어서 회색빛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익숙해져버린 눈을 낯설게 합니다. 특히 무라비예프 거리 좌우 양 옆으로는 대낮에도 하늘을 가릴 만큼 짙푸른 가로수길이 조성돼 있어서 도시의 허파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걷는 맛도 일품이지만, 쉴 만한 즈음에 닿게 되는 깜사몰스카야 광장의 위용과 그곳에 서서 내려다보는 아무르강의 풍광은 장관입니다. 도시가 아무르강을 끼고 조성된 까닭에 강변을 따라 옛 시가지의 흔적을 볼 수 있고, 박물관과 공원 등 볼거리가 밀집돼 있어, 이곳이 하바롭스크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 깜사몰스카야 광장.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기념물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서 있다.
ⓒ 서부원
깜사몰스카야 광장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 조각과 '성모승천 사원'으로 이름 붙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 건물이 이웃하듯 나란히 서 있습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회주의 기념물과 종교 건물이 친구처럼 다정합니다. 키도 비슷해 먼발치에서 겹쳐 보면 흡사 어깨동무를 한 듯 보입니다.

각기 세워진 내력이야 어떻든 낯선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성당의 종교적 색채는 딱딱한 기념물을 부드럽게 보이도록 하고, 검은 빛의 차가운 기념물은 화려한 성당 건물을 다소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공생 관계'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무르강은 넓은 강폭만큼이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소련의 정치 선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

광장에서 옛 시가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러시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과 수여 받은 훈장을 건물 벽에 새겨 전시해 놓은 '영예의 광장'이 나오고, '꺼지지 않는 불꽃'과 전몰자의 위령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거대한 기념 공원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 '꺼지지 않는 불꽃'과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위령탑. '영예의 광장'과 이어져 있다.
ⓒ 서부원
옛 소련의 정치적, 선동적 요소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이 유물들은 이념적인 요소를 살짝 가린 채, 도시 형성과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향토박물관, 철도박물관 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로 거듭 났습니다. 하바롭스크가 현대적이면서도 러시아의 고전적 분위기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도시라는 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르 강변을 따라 길게 조성된 광장에는 밤낮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유람선을 타기도 하고, 백사장에 나가 수영복 차림으로 피서를 즐기기도 하며,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보드카를 부딪치고, 연인들끼리 다정하게 산책도 하는, 하바롭스크 시민들에게 첫째가는 휴식처입니다.

유람선에서 보는 아무르강을 보니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강의 하류이기도 하려니와 이곳에서 가장 큰 지류인 우수리강과 합류하기 때문에, 하바롭스크에서의 아무르강은 도시 전체의 그림자가 담길 만큼 거대한 호수입니다.

▲ 동시베리아 초대 총독이자,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무라비예프 아무르스키의 동상.
ⓒ 서부원
본디 극동 지방의 하항(河港)으로 건설된 도시답게 가공되지 않는 목재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강을 덮을 듯 떠 있고,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도 자주 오가 북적입니다. 혹독한 추위 탓에 강이 꽁꽁 얼어붙는 1년 중 절반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돼 요즘 같은 여름 한철이 더욱 분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할린 섬을 마주보고 있는 아무르강 하류 지역은 여전히 원시림으로 덮여있는데, 그곳에서 벌목한 엄청난 양의 목재를 가공 공장이 있는 중국 쪽 상류 지역으로 군인들이 줄지어 행군하듯 강을 거슬러 오르는 광경은 여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장관입니다.

유람선에서 내려 아무르강과 하바롭스크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오릅니다. 입구에 초대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무라비예프 아무르스키(Murav'yev Amurskii)의 동상이 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습니다. 도시의 이름이 된 하바로프와 함께 하바롭스크의 상징적인 존재로, 시내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건물이 즐비합니다.

▲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아무르강과 하바롭스크 시내 모습. 백사장에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인다.
ⓒ 서부원
기실 그는 이 지역에 살던 수많은 원주민들을 내쫓고 학살한 침략자로서 옛 러시아 제국주의의 '표상'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동시베리아의 개척자이자,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관철시킨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잊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찾는 것처럼, 이곳 동상 앞에서 지인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주변의 나무에 '소망의 천'을 달아매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합니다. 장례 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곳 아무르 강변 언덕에서 슬픔을 갈무리하고 영혼을 위무하는 의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혁명군과 반혁명군의 대결 속에 수많은 사람이 처형당한 곳

도시의 젖줄인 아무르강과 추앙받는 '영웅'의 권위에서 나오는 영험함을 믿고 따르는 의식일 테지만, 나뭇가지마다 동여매어진 끈이 버들가지처럼 늘어뜨려진 것은 무척 낯익은 모습입니다. 형형색색의 리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진혼곡과 함께 남겨진 흔적 같기도 합니다.

▲ 전망대 입구의 아름드리 나무의 가지마다 사람들의 갖가지 '바람'과 '사연'을 담은 끈들이 버들가지처럼 매달려 있다.
ⓒ 서부원
듣자니까 아무르강을 향해 튀어나온 이 언덕에서 러시아 혁명 시기 소비에트 혁명군과 외세와 결탁한 반혁명군의 대결 속에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인 '김 알렉산드라'도 포함돼 있습니다.

처형당한 사람들 모두 초겨울 얼어가는 차가운 아무르강에 던져졌다고 하니, 그 처참한 상황을 지켜봤을 이 나무들과 끈이 돼 매달린 수많은 '사연'들로부터 쓰라린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볼 뿐, 아무르 강물에 잠기고 씻겨버린 그 처절한 역사를 지금 하바롭스크에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낮 동안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숲으로 덮인 차분한 하바롭스크를 봤다면, 황금빛 가로등이 현란하고 환한 달빛이 아무르강을 요염하게 비추는 밤 동안 거닐면서는 음악과 보드카에 취해버린 도시의 뒷면을 만났습니다.

▲ 지난 밤의 환락을 말해주는 빈 보드카 병이 광장 곳곳에 즐비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여전히 보드카를 입에 문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서부원
하바롭스크를 찾는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역사가 탈색돼 가는 도시의 낮과 밤이 편안함을 줄지는 몰라도 한없이 가벼운 유흥만 남게 될 게 뻔합니다. 더구나 여행자의 입장에서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을 더듬어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전망대 꼭대기에서 아무르강이 흘러드는 곳과 흘러갈 곳을 두리번거리듯 바라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저 강 너머는 중국이고, 도도한 물결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원시림이 펼쳐지는 시호테알린 산맥의 험한 산줄기를 만나게 될 겁니다. 어쨌든 보면 볼수록 하바롭스크에게 아무르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자 생명과도 같은 존재임을 알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에서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에 참가한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키, #아무르강, #시베리아횡단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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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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