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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휴가 첫째 날(7월 27일), 드디어 오랫동안 계획했던 서산 나들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언니가 사는 곳(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가까운 가야산 임도를 따라 그 둘레에 있는 절집과 문화재를 하나하나 둘러보기로 했지요.낯선 땅에서 자전거를 타며 우리가 좋아하는 구경을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설렙니다. 먼저 언니한테 사진기를 빌려서(우리와 같은 사진기라서 내려올 때 짐 무게를 줄이려고 메모리카드만 가지고 왔음) 길을 나섰어요.언니는 우리와 휴가 날짜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함께 갈 수 없었지요.

 

"그나저나 길은 제대로 아는 거야?"

"언니, 걱정하지 마! 구미에서 내려올 때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고 왔거든."

"어련 하려고!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너무 늦지 말고. 저녁에는 같이 바닷바람이라도 쐬자."

 

언니는 우리를 잘 알기에 큰 걱정은 안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낯선 곳에서 길을 못 찾아 고생이라도 할까봐 함께 가지 못하는 걸 미안해 했어요.해미읍성을 지나 가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여름 뙤약볕이 매우 강해요. 길가 넓은 논에는 벼가 어느새 이삭이 패고 한창 싱그럽게 씨알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거기가 상왕산과 가야산이 만나는 곳이었어요. 저 높은 산을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애고!"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그러나 마음만은 즐겁기 그지없어요.널따란 길을 따라 오르막이 나오더니, 이윽고 길이 좁아지고 임도로 들어섭니다. 울창한 나무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오른쪽으로는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콸콸 큰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더위를 피하여 나온 사람이 드문드문 보여요. 이곳은 여름휴가 때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고 해요. 빨간 조끼를 입은 '산불감시원' 아저씨들도 여럿 눈에 띄어요.얼마쯤 오르막을 오르는데 지난밤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잠을 많이 못 자서인지 다른 날보다 자전거 타기가 매우 힘이 들어요.

 

"아이고, 이거 벌써 이렇게 힘이 들어서 어떻게 하지?""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면 어떡해?""…….""힘내! 조금만 가면 일락사야.""아, 그래? 벌써 다 온 거야?"

 

비구니 염불 소리에 발자국 소리도 주눅이 들어

 

서산에서 가장 먼저 가보기로 한 곳이 '일락사'이었기에 다 왔다는 남편 얘기를 들으니 부쩍 힘이 났어요.일락사로 가는 들머리는 우리가 절집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처럼 무척 아름다워요. 조용한 산속에 자리 잡은 절집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매우 아늑했어요. 목탁을 두드리며 누군가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여승의 목소리였어요.

 

"어머나! 여기 비구니가 계시나 봐!"

"그런가 보다."

 

우리는 조용조용 얘기하면서 절 안을 둘러봤어요. 왠지 그래야만 할 듯했어요. 여승이 염불하는 소리를 들으니 그 분위기에 눌려서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을 만큼 사뿐사뿐 다녔지요. 게다가 절 안에는 큰 누렁이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녀요. 눈매가 어쩐지 사나워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짖지도 않고 그저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는 데로 따라다니기만 했어요. 아마 그래서 더욱 조용조용 다녔는지도 모르겠네요.

 

신라 문무왕 때 의현선사가 지었다는 '일락사'는 '일락사대웅전(충남문화재자료 193호)'과 '대적광전', '일락사삼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200호)'이 있어요. '대적광전' 앞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일까? 모서리가 많이 깨져 있어 매우 안타까웠어요.절을 모두 둘러본 뒤에 안에서 염불하던 스님께 얘기라도 듣고 싶었지만, 왠지 방해가 될 듯하여 그냥 돌아 나왔어요.

 

일락사 곁으로 난 길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젠 산꼭대기까지 꾸준히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야 해요. 여기에 오기에 앞서서 길은 꽤 험하지만 경치가 참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참말로 그렇더군요. 여름보다 단풍이 곱게 드는 가을에 오면 더욱 멋있겠구나! 싶었어요.마지막 '샛고개'를 올라갈 때엔 또 어찌나 가파른지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은 걸 꾹 참고 끝까지 갔지요. 고개 이름이 왜 '샛고개'인지 알겠더라고요.

 

아이! 시원해! 골짜기 시원한 물에 발이라도 담가봐야지

 

샛고개를 벗어나 꼭대기에 우뚝 서니 저 멀리 아래로 까마득하게 해미읍 풍경이 눈에 들어와요. '아! 이 맛에 기를 쓰고 산에 올라오는 거야!' 하겠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더욱 즐거운 게 있지요. 산이란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도 있거든요. 올라올 때에 힘겹고 죽을 것만 같다가도 내리막에서 그 보상을 다 받는답니다.

 

"야호!"

"우와! 살겠다!"

"하하하! 그럼 올라올 땐 죽을 것 같았단 말이야!"

"응! 하하하."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골짜기 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올라오면서 온통 땀에 젖었던 몸이 한꺼번에 마르고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에요. 산에서 내려가는 길도 올라올 때처럼 곁에 물이 콸콸 흐르고,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우리 잠깐 쉬었다 가자."

"그래. 예까지 왔는데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가야지."

 

시원한 물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지요. 둘이서 양말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니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아니, 발이 시릴 만큼 차가웠어요. 한여름, 제아무리 더운 날에도 여기 앉아 있으면 더위를 하나도 못 느낄 듯해요. 게다가 발 담그고 쵸코바를 먹는 맛도 끝내준답니다.

 

이 골짜기는 '용현계곡'이라고 하는데, 골짜기 아래에는 '용현자연휴양림'이 있어요. 여름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가봐야 할 곳도 많고 갈 길이 바쁘니 마냥 발 담그고 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쉽지만 다시 자전거를 탔어요. 골짜기를 따라 우리처럼 휴가를 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놀이를 하며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이 퍽 재미있어요.

 

보원사 정경스님께 '보원사지' 이야기를 듣다

 

'용현계곡'을 벗어나니 넓을 들판에 큰 안내판이 여러 개가 세워 있어 멈추었어요.

 

"아! 여기가 보원사지구나!""맞다! 우와∼ 그런데 꽤 넓은데?"

 

통일신라 때 세운 것으로 알려진 옛 '보원사'라는 절이 있던 터였어요. 들판 저 끝에 덩그렇게 있는 큰 돌탑이 여럿 있고, 너른 터에 네 귀퉁이마다 줄을 쳐놓고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듯하는 사람도 보였어요. 또 그 한쪽 곁에는 '보원사'(보원사지 곁에 있는 절로서 지은 지 5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 절 이름을 '보원사'로 등록한 게 4년쯤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나지막한 절집도 있어요.여기에 들어서니, 스님 한 분이 마당에서 삿갓을 쓰고 책을 보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조용한 절집과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한테 먼저 인사를 하세요. 얼굴을 보니 젊은 스님이었어요. 이참에 잘 됐다 싶어 이곳 보원사지에 얽힌 이야기를 여쭈어봤어요.

 

"여기 보원사지는 고려시대 유물들이 많이 나왔어요. 또 이 둘레에서 백제시대 유물인 '서산마애삼존불'과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서산지역에서 불교문화 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답니다. 지금도 발굴조사가 한창입니다. 벌써 2년째 되었지요."

"아, 그렇군요. 저기서 일하는 분들이 바로 발굴조사를 하는군요."

"네. 맞아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용역을 써서 하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보원사지가 무척 뜻 깊은 곳이었네요."

"그렇지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 가야산에는 지난날 백제 때에 108곳이나 되는 절이 있던 곳이에요. 불교문화가 많이 발달했던 곳이죠. 또 동학운동 유적지이기도 하고요."

"네. 오늘 우리가 스님한테 매우 뜻 깊은 얘기를 듣게 되었네요. 여기 올 때, 저기 가야산 임도를 타고 넘어왔는데, 거기 일락사도 다녀왔지요. 그리고 이 가야산이 경치가 매우 아름답더군요."

"그렇지요. 예부터 골짜기가 깊어서 산과 물이 매우 깨끗하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멋지고 뜻 깊은 역사가 있는 이곳이 많이 망가지고 있답니다."

"네? 그건 왜…."

 

문화유적지에 철탑을 세우고 길을 낸다고?

 

정경(39) 스님한테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이곳 보원사지와 가까운 예산 '수덕사'를 중심으로 옛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매우 아름답고 문화와 역사 값어치가 높은 이곳에다가 서산시에서 '송전철탑'을 세우고 가야산을 가로지르는 찻길을 만들려고 한다는 얘기였어요.

 

지금 가야산 둘레에 있는 절마다 스님들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철탑을 세우고 길을 내는 일을 앞장서서 막고 있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절집 둘레와 마을 들머리에서 본 펼침막이 생각났어요. '가야산 관통도로 건설 계획을 백지화 하라'라고 쓴 글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거든요.지난 3월부터는 가까이에 있는 '개심사 선광 스님', '보원사 정범 스님', 또 우리가 들렀던 '일락사의 삼서 스님'이 가야산 중턱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기도 정진'을 하면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고 해요. 가야산 능선에 송전철탑을 세우는 일과 찻길을 내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문화재 훼손'과 '생태계 파괴'를 막아내겠다는 각오로 농성을 한답니다.

 

정경 스님한테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퍽 안타깝고 속상했어요.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문화유산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지는 못할망정, 사람들이 편리하려고만 하는 얕은 생각으로 스스로 파헤치고 망가뜨린다고 하니 화도 났어요.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많은 문화재를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어요. 하물며 이렇게 멋지고 귀한 땅을 함부로 여기고 잘못된 행정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워요.

 

스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보원사지'를 둘러보는데,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곳곳마다 세워놓은 안내 글을 읽으면서 매우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더욱 들더군요.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으면서 보는데 저쪽에서 한창 일을 하던 아저씨 한 분이 우리한테 다가오셔요.

 

"안녕하세요. 멀리서 지켜보니 꽤 꼼꼼하게 보시던데, 이것도 한 번 읽어보세요."

 

아저씨는 작은 책을 한 권 건네주면서, 저 아래 사무실에 가면 일제 강점기 때 찍은 사진도 있으니 꼭 보고 가라고 하면서 가시는 거예요. 돌아서는 등 뒤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물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시죠?""아, 네. 저는 여기 발굴조사 현장에 작업반장입니다."

 

아저씨는 씽긋이 웃고는 머쓱해 했어요.발굴조사를 하는데 용역을 써서 한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매우 놀랐어요. '아니, 용역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문화재 발굴조사를 할까?' 하고요.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우리 걱정일 뿐이었어요. '작업반장'이라는 아저씨조차도 이 일이 매우 소중하고 뜻 깊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아저씨가 건네준 책을 고맙게 받고는 매우 뜻 깊은 역사와 문화가 자리 잡은 옛 보원사 터를 떠나왔어요.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무겁고 안타까웠지만,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고 서산 가야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곳으로 자전거를 굴렸어요.

덧붙이는 글 |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서산 가야산, #자전거, #보원사지, #마애삼존불, #정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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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자전거는 자전車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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