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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접한 크라스키노(Kraskino)에서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이르는 길은 하늘과 맞닿은 푸르고 드넓은 지평선과 야트막한 구릉이 교차하듯 연이어지는 지루하지 않은 길이지만,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길이 태반인데다 5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만만치 않은 먼 거리입니다.

워낙 땅덩이가 큰 나라다 보니 러시아에는 '-40℃가 아니면 추위가 아니고, 알콜 도수가 40°에 미치지 못하면 술도 아니며, 400km가 못 되면 거리도 아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대륙적 기질을 뽐내는 것일 테지만, 어쨌든 거친 자연환경과 그에 적응하기 위해 힘겨웠을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재치 있게 담아낸 표현입니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인 혁명광장의 모습. 뒤로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주청사가 보인다.
ⓒ 서부원
먼발치로 코발트빛 바다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낯익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도로변에 도열해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다 온 모양입니다. 지금껏 몇 시간을 내달렸지만 변변한 마을 하나 볼 수 없고 지나다니는 자동차조차 거의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 계속돼 회색빛 도시가 외려 반가웠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Moscow)만큼이나 우리 귀에 익숙한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의 정복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부단한 동방 원정 정책의 결과로 1860년 청과 베이징 조약을 통해 새로 얻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최근 뉴스에도 종종 언급되면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곳은 기실 연해주 땅의 맨 끝, 바다를 향해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비좁은 도시입니다. 처음 이곳이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였던 까닭에 그다지 넓은 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전히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가 자리해 있고, 주변에 초대형 군함과 잠수함 등이 정박되어 있는 등 군사도시로서의 분위기가 남아있지만, 90년대 초 비로소 외부에 개방돼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상업화된 관광도시로 급속하게 탈바꿈되고 있습니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 모습.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의 행렬에다 도로변에 어지럽게 내걸린 현수막에 이르기까지 도시 자체가 매우 어수선하다.
ⓒ 서부원
그러다 보니 가파른 벼랑에 매달려 있는 고층건물들과 그 사이로 비좁고 구불거리는 도로가 마구 엉켜 있습니다. 무계획적으로 도시가 확장되는 모양새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다국적기업의 현수막과 광고판이 건물과 도로변 곳곳에 어지럽게 도배되어 있습니다. 헤아리기에도 숨이 차고, 그냥 쳐다보기에도 눈이 아플 정도입니다.

도시 복판에 가면 아예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를 가릴 지경인데, 유명 백화점과 호텔, 관공서 건물은 물론, 심지어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 전통문화의 중심이라는 거대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조차도 형형색색의 현수막에 포위돼버린 형국입니다.

러시아 동방 정복의 상징인 이 도시는 지금, 거칠게 말한다면, 개방 후 밀려드는 외국자본에 의해 정복될 처지에 놓인 듯합니다. 도로에는 온통 일본과 한국에서 건너온 자동차만 굴러다니고, 사람들의 손에는 코카콜라가 들려 있으며, 옷 등 생필품은 모두 중국산입니다. 오로지 100% 러시아제를 찾는 관광객을 철저히 주눅 들게 만드는, 영어가 병기되지 않은 도로 표지판뿐입니다.

소비에트 정부, 일본, 영국, 미국에 점령당한 영욕의 땅

▲ 레닌 동상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이다.
ⓒ 서부원
▲ 모스크바를 출발한 횡단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닿았다. 플랫폼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지임을 알리는, '9288km'가 적힌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서부원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은 장장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시작점인 기차역과 그에 인접한 혁명광장입니다. 역사 속 '퇴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은 위세가 느껴지는 레닌 동상과 함께 도시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곳입니다. 도로변 예스러운 건물을 활용해 만든 아르세니예프 박물관과 '승리의 아치' 등 주변에는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과 상징 조형물이 즐비합니다.

혁명광장에서 바닷가를 향해 5분쯤 걸어가면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 건물이 나오고 바로 옆에 군사 대국임을 뽐내는 잠수함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잠수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투입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당시 막강했던 러시아 군사력의 상징이지만, 이후 엄혹했던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또, 잠수함 박물관과 나란한 자리에 1년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성화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위아래로 러시아혁명을 상징하는 깃발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에워싸여 있어 이 불꽃이 일본군의 주력을 궤멸시켰다는 승전의 그것인지, 러시아혁명을 상징하는 그것인지, 아니면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함을 보여주는 신앙의 불꽃인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그곳에서 공원처럼 꾸며진 산책길을 따라 오르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승리의 아치'가 우람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맨 꼭대기에 옛 러시아 왕실의 문장이 또렷한 이 기념물은 니콜라이 2세의 동방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것입니다. 뒤로 돌아나가면 시내 중심가이고, 정면의 발아래로는 쪽빛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이곳이 진정한 러시아 동방 원정의 종착점임을 알겠습니다.

▲ '꺼지지 않는 불꽃' 뒤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어색하게(?) 서 있다.
ⓒ 서부원
시내와 교외를 막론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동상과 비석 같은 기념물이 유난히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선동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런 조형물이 많은 것을 두고 어떤 이는 낙후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증거라지만, 과연 이념적인 요소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탓인지, 아니면 다양한 문화가 마구 뒤섞여있는 정치적, 역사 지리적 여건 탓인지 알 수 없습니다.

1872년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로부터 극동 해군 기지가 옮겨진 뒤 급속도로 발전한 블라디보스토크는 1903년 만주 지방을 관통하는 동만(東滿) 철도가 건설되어 모스크바와 직접 철도로 연결되어 부동항(不凍港)과 군사기지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권력 아래 들어갔다가 1918년 일본과 영국군, 미국군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고, 1920년 이후 반혁명 세력을 몰아내는 등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곳의 문화적 환경은 매우 독특합니다.

발해 왕국의 중요 거점 '솔빈부'가 설치된 곳

▲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뒤로 서슬퍼런 군함이 보란 듯 정박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 서부원
한나절을 돌고 돌아 혁명광장 한복판에 다시 섰습니다. 퇴근 시간이 아직 못 됐는데도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도로를 보며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재를 읽습니다. 이태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찾아와 2012년 APEC 유치 계획을 밝히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환골탈태'가 본격화되었다고 합니다.

북적이는 시내와 동해로 열린 금각만(金角灣)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오릅니다.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해외 민족독립운동의 산실로, 또 스탈린 철권통치 시절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라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또렷하게 각인된 곳이지만, 현재 그때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분위기가 공존하고, 자본의 위세와 이념의 잔영이 뒤섞여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남긴 자취도 점점 옅어져만 갑니다. 이제 블라디보스토크를 뒤로하고 1930년대 강제 이주의 첫 출발지로 알려진 라즈돌노예 역(驛)을 찾아 당시 우리 민족의 지난했던 삶을 느껴보려 합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비좁은 반도에 건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 서부원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연해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까레이스키)이 여전히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세계화'된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사뭇 다른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옛 발해 왕국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솔빈부'를 설치한 곳이니 천 년을 거스른 장엄한 역사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짧은 하루를 아쉬워하며 비좁고 가파른 반도를 벗어나 광활한 대자연이 숨 쉬는 연해주의 한복판으로 향합니다.

덧붙이는 글 | 우리나라에서의 유명세 만큼이나 블라디보스토크는 일찍부터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특히 이곳에 있는 극동대학은 러시아에서는 최초로 한국학 대학이 개설된 곳으로,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제법 많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동방의 정복자,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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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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