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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사육신>에 대한 이남의 초점은 조명애에 꽂혔다. <사육신>에 조명애가 출연한 것은 순전히 남한 측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물론 북측은 난색을 표했다. 조명애는 무용인이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연기는 인민 배우이어야만 할 수 있다. 그러니 극중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반면 남한에서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연기하는데 문제가 될 턱이 없다. 그러니 빈번하게 작품의 질이 문제가 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까. <사육신>이 이남 시청자들에게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물론 선진·후진의 관점도 아니거니와 기술적인 부분 때문만도 아니다. 문제는 결국 '낯설음' 때문이지, 심각한 모순과는 거리가 멀다.

KBS 편성팀이 고정 시청률이 확보되는 주말 사극 시간대가 아니라 수목 시간대에 정통 사극 <사육신>을 투입했다. 드라마 시장의 주도자인 여성들이 채널 선택권을 잡고 있는 시간대에 편성한 이유 중에 하나는 '새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움은 자칫 낯설게만 느껴지게 하는 핵심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낯설음은 거리두기로 이어진다. 더구나 대중매체로써 텔레비전은 매우 보수적이다. 시청자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만 눈길을 주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사육신> 자체는 새롭기 보다는 낯설기 때문에 더욱 조명애라는 카드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어린왕자>의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가 떠오른다.

"장미를 그렇게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네가 장미를 위해 정성 들여 쏟은 시간이야."

곧,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기', 또는 '사랑하기'다. 그러나 당위론적으로 사랑해야한다는 관점은 적어도 대중매체에서는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이남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대변해야 한다. 물론 이북 사람들의 고민과 같은 공통분모가 있다면 더욱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왜 사육신을 사극의 소재로 삼았는가와 연결될 수 있다. 사육신은 남한과 북한에서 그 정치 체제적으로 유사점이 있다. 사육신의 코드는 충, 체제 변혁보다는 체제 수호의 성격이다. 남한에서도 변혁 세력이 제도권에 진입해 체제수호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랑하기, 관계 맺기는 공통점의 발견이전에 다름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이북과 이남의 사극은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티브극 vs. 공연극

<사육신>을 포함한 북한 드라마들이 남한 정서에 맞지 않는 이유는 장르 혹은 매체적 특징의 차이 때문이다. 북한은 티브극에 대한 별도의 접근이 없다. 따라서 인민배우들은 공연극을 보여주듯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

티브극은 공연극과는 다르기 때문에 남한의 시청자들은 어색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연극배우가 텔레비전 배우로 데뷔할 때 보이는 어색함과 같다. 예컨대 텔레비전은 주로 얼굴 표정을 중심으로 연기가 이루어지지만 공연극은 몸이 중심이다. 따라서 인민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함에도 시청자의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장면 vs. 줄거리

티브극이 공연극과 다른 점은 티브극이 장면 장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티브극은 적은 몰입도를 요구하는 매체이므로 항상 몰입하는 공연극과는 다르다. 매체적 환경의 측면에서 볼 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이들은 집중해서 볼 여건이 안 된다. 딴 짓을 하면서도 보는 것이 티브이므로 쉽게 몰입하게 하려면 장면 장면에 포인트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하거나 장면 장면을 감각적으로 연출하는데 치중한다. 그러나 북한의 사극은 장면이 아니라 전체 내러티브, 줄거리를 강조한다. 이럴 경우에 몰입을 계속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칫 지루함으로 연결되고는 한다.

부풀림 vs. 질박함

북한 사극은 질박하다.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특수효과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사극은 퓨전 무협 액션물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원일 때 대개 모든 것이 부풀려진다. 특수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표정이나 말은 한층 업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무술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몸 사위도 과장 된다. 여기에 화려한 장신구나 의상은 남북한의 차이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스타 vs. 캐릭터

이남에서는 스타를 중심으로 극이 꾸려진다. 따라서 극중 캐릭터나 배우들의 긴밀성은 부차적이 된다. 이 때문에 인기만 있으면 누구라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극에서는 스타 보다는 극중 인물에 맞게 연기력이 높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캐스팅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른 영역의 사람이 연기를 할 수 없으므로 의외의 결과는 적다. 역시나 조명애라는 남한 발 스타를 요청한 것은 남측이었다.

영웅 vs. 민중

<사육신>에서 특징적인 장면은 포졸이나 하인 등 엑스트라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즉 이남의 극에서는 대개 거의 대사 없는 이들이 긴 대사를 하거나 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예를 들면 수양 대군의 가마를 메고 가는 가마꾼의 얼굴을 클로즈업 시킨다. 이는 민중성을 기본으로 하는 북한극의 특징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한의 사극은 철저하게 영웅중심이다. 영웅중심에 포커스가 길들여진 이남사람들에게 복잡하고 넓은 스펙트럼의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는 낯설 것이다.

몇 가지 눈여겨볼 점도 있다. 금강산에 간 이남의 할아버지들이 간혹 안내원 여성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고 한다. 소년, 청년 시절 자신이 좋아했거나 이북에 두고 온 연인과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남에는 이미 멸종한 여인상이다. <사육신>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 같이 감자이거나 달덩이 같다. 그러나 이남 사람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사실 조선시대 여인의 전형은 <사육신>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남한 사극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서구적이어서 새삼 낯설기도 하다. 여기에 이남의 말(馬)은 모두 서양 계통의 말인데 비해 이북의 말은 몽골 내지는 조선의 조랑말의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남한이 앞섰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점들은 장점이 단점이 되고, 장점이 단점이 되는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다. 서로에게 낯설 때 비난을 쏟기 쉽지만, 이질적인 것은 체질을 강화시키는데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대개 마니아 드라마는 시청률이 낮다. 낯선 내용일 때 마니아 드라마가 된다. 만약 <사육신>이 마니아 드라마가 된다면 마니아 드라마는 젊은 층에서만 나온다는 기존의 공식이 깨어질 것이다. 마니아 드라마는 진보를 위한 관계 맺기의 전위에 있다. 마니아 드라마가 반복되어 대중성 있는 드라마가 빚어진다.

북한 드라마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공연예술, 정극을 텔레비전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라는 주제에서는 말이다. 워낙 이남의 드라마는 기본기도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북한의 드라마는 전적으로 타당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평면적인 캐릭터에 티브 매체의 관객을 배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백남준은 예술에는 1등과 2등이 없다고 했다. 예술에는 다름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선진, 후진이 있을 수 없다. 남북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남한의 사람들이 적응하거나 부적응하거나라는 말은 부차적이다.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의 가요와 드라마는 거꾸로 낯설기만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길들이기 관계 맺기 관점에서 <사육신> 이후다. 시청률에 일희일비하지 말았으면 하는 이유다. 관계 맺기, 사랑하기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위선일 수 있다. 경제적 목적이나 신분상승이라는 다른 목적을 염두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보낸 글입니다.


#사육신#드라마#조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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