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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해수욕장에 깜작하고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았다. 때문에 사진이라곤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몇 장이 전부다.(오른쪽 사진은 '배칠수·전영미의 와와쇼' 왕산해수욕장 공개방송 포스터).
ⓒ 이정하
8월 4일 오전.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린다.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바야흐로 정열의 계절 여름. 모처럼 가족들과 여름휴가 겸 어머니 생신축하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만 폭우에 발이 묶인 채 방구들에 나뒹굴고 있을 뿐.

"삼촌 우리 바다 언제가?"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 생각에 들떠 있던 승하 녀석도 풀이 죽어 있다. 때마침 태권도장과 영어전문학원이 휴가기간이라 승하도 인천 외갓집으로 데려온 터였다. 아이들에게 자연학습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자 가족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우리 6남매 중 막내누나(승하 엄마)를 제외한 다섯 남매가 뭉쳤으니 동네가 떠들썩했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는지 참다못한 어머니가 한 말씀 쏘아 붙였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조용조용 이야기 해도 다 들리는데 소리를 벼락같이 질러대고. 누가 보면 싸움난 줄 알겠네."
"하하하~~~."

어머니 호통에 다들 박장대소했다.

영종도 왕산해수욕장에 가다

▲ 외할머니가 옥상에서 가꾼 고추를 만지고 있는 승하.
ⓒ 이정하
진통 끝에 인천공항 근처 영종도 왕산해수욕장으로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집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곳이다. 질퍽거릴 정도로 내리는 비는 이미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부랴부랴 짐을 꾸려서 떠난 여름휴가. 왕산해수욕장에 도착할 때쯤 빗줄기가 멎었다. 덕분에 신난 것은 승하와 정민(둘째 누나 아들)이. 한 살 터울 사촌지간인 녀석들은 미친 듯이 바다로 달려들었다.

서해안 갯벌지역이라 물은 검고 진흙으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신난 두 녀석은 바다에서 조개 및 갯벌 생물잡기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저러다 찬 바닷물에 배탈이나 나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때쯤 해수욕장에서 안내 코멘트가 흘러나왔다.

"오늘 저녁 7시부터 특설무대에서 제5회 인천해양축제 기념 공개 방송이 진행됩니다. SBS 라디오 '배칠수·전영미의 와와쇼'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채연, 렉시, 에반, 김혜연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총출동 하오니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순간 난리가 났다. 김혜연을 좋아하는 큰형은 쾌재를 불렀고, 중·고등생 조카 녀석들은 에반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주위의 이목은 아랑곳 않고 풀어 놓았던 짐을 다시 챙겼다. 공연장에 일찍 가야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며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서 40여분의 고통을 감내한 끝에 공연이 시작됐다.

솔직히 내 맘도 동요되고 있었다. 가수 채연을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채연과 싸이월드 일촌을 맺었다. 따지고 보면 그리 먼 사이도 아니다(?). 2부 첫 무대에 등장할 채연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삼촌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혼자 찾아 갈 수 있어?"
"응."

와와쇼 1부가 끝날 때 쯤 승하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2부가 막 시작할 무렵 코를 찌르는 냄새가 진동했다. 해수욕장 주변에서 흔히 파는 번데기나 닭꼬치 냄새가 바다 비린내와 합쳐진 것쯤으로 여겼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킁킁' 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내겐 역한 냄새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바로 '싸이 1촌' 채연이 소개됐기 때문이다. 즉각 휴대폰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야~ 이상한 냄새 승하한테 나는 것 같아. 물놀이하고 나서 바지도 갈아 입혔는데 젖어 있는 걸 보니."

큰 형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승하가 옆자리로 돌아온 뒤부터 냄새가 솔솔 풍긴 것 같기도 했다.

"승하야 너 혹시 바지에."
"(고개를 떨구며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배가 너무 아팠단 말이야. 화장실 문은 다 잠겨 있고.(울먹울먹)"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채연은 무대에서 화려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지만 내 시선은 온통 승하에게 집중됐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채연의 라이브 무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탈 때문에 바지에 실수한 승하

▲ 승하 외할머니가 옥상에서 직접 가꾸고 있는 고추와 상추. 외할머니는 농약 한 번 치지 않고도 잘자랐다며 연신자랑이다.
ⓒ 이정하
주변 사람들이 손부채질을 해가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자리를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들 짐 챙겨. 아무 말 하지 말고 다들 그냥 따라와."
"왜 무슨 일 있어?"
"채연이랑 렉시는 보고 가야지 삼촌?"
"뜬금없이 왜 가?"

다들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일단 승하를 데리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찬 물에서 오래 물놀이를 했던 것이 배탈을 일으킨 모양이다. 염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마구잡이로 놀 때 뜯어 말렸어야 했다. 아마 그 벌로 내 평생 처음으로 손에 X를 묻혔나 보다. 덕분에 가수 채연을 직접 볼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갑자기 배탈이 나서 그런 거니까. 다음부터 그러면 안돼?"
"으응~~"

가족들은 승하의 자존심과 체면을 생각해 이 일을 비밀로 붙이기로 했다. 심지어 승하의 부모들에게도. 그러나 난 이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승하가 보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녀석 또 다시 그 작은 눈을 치켜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다음날(5일) 오전 10시. 휴가기간 동안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은 것이 못내 아쉬워 옥상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전날 늦은 밤까지 음주가무를 즐긴 탓에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은 상태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일어난 가족들을 하나 꾸밈없이 '생얼'로 담기로 한 것. 심지어 잠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 가족들도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사진이야?"
"그래도 엄마 생신이 7일인데 그 때 모이지 못할 거면 오늘 사진이라도 찍어야지. 잔말 말고 다들 눈곱 떼고 줄을 서시오~~."

이렇게 가족사진을 완성시켰다. 옥상에서 어머니만의 작은 텃밭도 발견했다. 몇 개의 화분에 고추와 상추 등을 심었단다. 승하 녀석이 호기심이 생겼는지 큰 고추 숲에서 작은 놈을 골라냈다. 이를 지켜보시던 어니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고추 승하꺼 만하네.(호호호)"
"(뽀로통하게)아니에요. 할머니는 알지도 못하면서."
"승하께(큰 고추를 가리키며) 이것만 해지면 장가보내야겠네.(하하하)"

승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잽싸게 옥상을 내려갔다. 과연 이 녀석에게 제대로 된 자연학습을 시키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경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채연, #인천해양축제, #왕산해수욕장, #영종도, #과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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