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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규 선생님!

그제 선생님의 손자로부터 선생님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새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옛 어른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 세상 떠나시기 전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 더 듣지 못함을 미련한 제자는 못내 애석해하였습니다.

이제 누가 이 세상에서 둔재인 저에게 "박군 족적(足跡)을 남겨라", "노작(勞作)을 바라네", "명작을 기원하네" 이런 격려와 채찍의 말을 들려주겠습니까?

▲ 고 박철규 전 중동고등학교장
ⓒ 박도
선생님을 처음 뵌 지가 4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1961년 3월 어느 날, 중동고등학교 입학시험 날 첫 시간에 저는 정신없이 국어시험 답안지를 다 메우고 다시 검토해도 시간이 남아 그제야 감독교사를 바라보았습니다.

감색 양복에 포마드로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넘기신 감독교사가 어찌나 멋이 있었던지,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저 선생님을 따르고 싶다"고.

전기 고등학교에서 낙방한 저는 다행히 후기인 중동고등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입학금을 제 날짜까지 내지 못해 입학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며칠 후 간신히 납부하고 첫 등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첫 시간이 국어시간이었는데 바로 선생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 무렵 고1 국어교과서 제1단원은 이하윤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이었는데 그것을 낭독케 한 뒤 선생님은 출석부를 보시며 학생의 이름을 호명, 독후감을 발표시켰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발표하자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제 뒤를 이어 대여섯 명이 더 발표하였는데, 선생님은 제가 가장 빼어났다고 다시 발표케 하시면서 제 이름을 가장 먼저 기억해 주셨습니다.

저는 국어시간마다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집안사정이 매우 좋지 않아서 석 달 만에 휴학하였습니다. 이듬해 복교한 뒤에도 선생님은 여전히 가난한 고학생인 저를 수업시간마다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1학년 가을, 백일장에서 제가 쓴 시가 입선하자 선생님은 곧 저를 학생기자로 발탁하여 학교신문과 교지 편집 일을 맡기셨습니다. 2학년 때 제가 쓴 소설이 교내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선생님은 더욱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학교 안팎에서 만날 때마다 '국문과'로 진학하라고 권유하셔서 저도 선생님처럼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옆도 돌아보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작가로, 교육자로 이끌어주신 선생님

군에서 제대를 앞두고 모교의 교단에 설 수 있을까 선생님을 찾아뵙자 빈자리가 없다고 우선 경력을 쌓으라 하시면서 사학회관을 가르쳐 줘 제대 후 곧장 교단에 서게 되었고, 3년 뒤 서울 오산중학교에 근무할 때 선생님을 찾아뵙자 그새 교장 선생님이 되셔서 저를 모교로 불러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임하던 날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시게 되어 무척 제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저는 모교로 간지 1년 만에 다시 학교를 옮기고, 교단생활 중 해마다 작품을 썼지만 낙선의 연속이라 선생님을 뵐 낯이 없어서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역시 스승님이셨습니다. 배은망덕한 제자를 애써 찾아 학창시절처럼 격려와 용기를 잃지 말라는 채찍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주셨습니다. 전화로, 때로는 두루마리 한지에 붓으로 쓴 긴 사연의 편지로, 둔재인 제자를 담금질하셨습니다.

한번은 허리가 아파서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데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얻어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제가 정년을 남긴 채 명예퇴직을 하고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자 사람들은 대부분 조기 퇴직을 나무랐는데도 선생님은 "귀군의 단안과 자연 속에서 창작에만 몰두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생의 극치일세"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격려와 채찍으로 저는 이제까지 22권의 작품집을 냈고, 이제 열흘 후면 23번째 작품집이 나올 예정입니다. 이번에 나올 책은 <로테르담에서 온 엽서>라는 산문집으로, 고교시절에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대교베텔스만이라는 큰 출판사에서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선생님에게 칭찬과 평도 듣고 싶었는데 이제 누구에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지난해 가을에는 백수(白壽)의 스승과 60을 넘긴 이순(耳順)의 제자가 아직도 가르치고 배우는 걸 아름답게 눈여겨본 <월간중앙>의 한 기자 주선으로 선생님이 사시는 여수로 찾아뵈었지요. 그때 선생님은 저를 바닷가로 안내하시고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 지난해 가을 여수시 율촌 바닷가에서 선생님과 함께
ⓒ 권태균 월간중앙 사진부장
소년의 설날은
어느 동화 속의 왕자 그대로이다.
연분홍 두루마기에 검정 돌띠를 둘렀다.

강풍에 연이 줄을 끊고
멀리멀리 바다 위로 날아갈 때
소년은 눈물 콧물 훌쩍이며 돌아왔다.

하늘이 처음 열리는 그날부터
바닷물에 씻긴 절벽 노송(老松) 마른가지에는
하루 종일 황새 한 마리가 졸고 있다.

노고지리가 공중에서 지저귀는 늦봄
길길이 자란 보리밭 이랑에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바닷물이 핥고 지나간 백사장
맨발 그대로 게를 쫓기에 하루해가 모자랐다.
…………
- <슬픈 추억>


선생님은 자작시를 읊조리며 춤을 추시고, 제자는 추임새로 흥을 돋우는 장면은 마치 영화 서편제의 한 대목처럼 얼마나 정겨운 장면이었습니까? 60이 넘도록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저처럼 행복한 제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날 헤어질 때 선생님은 아흔일곱 해를 살다 보니 주위의 벗들이 모두 하늘로 가서 말벗이 없기에 무척 외롭다고 하셨습니다.

유월의 훈풍을 타고
오늘도 뒤숲에서 산비둘기가 울어댄다.
쿠쿠루 쿠쿠 쿠쿠루 쿠쿠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오지 않는
이 극한 속에
산비둘기의 소리에는 피가 맺혔다.

하고 많은 낮과 밤을 새우면서
그렇게 그리웁고 아쉬운 한을 삭이지 못해
오늘도 하루 종일 쿠쿠루 쿠쿠인가.
…………
- <산비둘기 울던 날>


그토록 고독에 젖은 선생님에게 자주 문안 인사도 드리지 못했음을 선생님이 가신 뒤에야 깊이 뉘우치며 사죄드립니다.

백수를 사시면서도 그렇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지내신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오래 사시는 것을 미안해하시며, 당신 며느님이 하늘이 내린 효부라고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고별

▲ 선생님 댁 마루에서 이승에서 마지막 드린 절
ⓒ 권태균 월간중앙
박철규 선생님!

이제 하늘나라에 가셨으니 이미 먼저 가신 가신 친구 분들과도 모두 만나실 테지요. 그분들과 근심걱정이 없는 하늘에서 편히 사십시오.

불초한 제자 남은 날 더욱 열심히 작품을 쓴 뒤 저도 선생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이제는 선생님과 이 세상에서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을 대비하여 선생님이 꼭 10년 전에 쓰신 <고별>이라는 시를 읊어드리면서 선생님과 이 세상에서 영결합니다.

"까마귀 죽을 때 그 소리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 했던가.

나 이제
참회하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고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멀지 않아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릴 것입니다.
마음이 자꾸만 바빠집니다.
필연코 떠나게 될 것입니다.

친구여
내 사랑하는 제자들이여

내가 길을 잃고 어두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끌어주던 친구여
내가 슬픔에 목메어 울 때 같이 울어준 친구여
내가 먼 여로에 지쳐 길가에 쓰러졌을 때 물을 먹여준 친구여
고독에 잠겨 죽음을 생각할 때 위로해 준 친구여

내게 첫사랑을 준 그이여
나를 멸시하던 친구여
나를 모략하고 음해하던 친구여
나를 잘 따라주던 사랑하던 제자들이여

이제는 모두가 내 친구들입니다.
애증(愛憎)의 잔재는 추호도 없습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심경으로
고별인사를 드립니다.

내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빠집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선생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생하옵소서.

2007년 8월 4일 선생님 육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
제자 박도 올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07년 8월 4일 오전 9시 전남 순천시 성가롤로병원에서 있을 고 박철규 선생 추도식에서 낭독할 조사입니다.


태그:#은사, #추도식, #편지, #중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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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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