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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스럽기만 한 승하가 막무가내로 들이댔다. 순간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할지 고민해야 했다. "허…허…허" 헛웃음만 나오는 것을 꾹 참고 초등학교 3학년 조카 녀석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도둑놈아. 네가 남의 글을 자기 것인냥 그대로 베끼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넌 지금 네 양심도 도둑질한 거야.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도둑질하는 조카를 둔 것이 부끄러워 동네를 돌아다니지 못할 지경이야."
승하는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였다. 순간 평소 작은 눈 때문에 콤플렉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를 째려보는 것인지 그냥 올려다보는 것인지 조금, 아주 조금 의심스럽다. 그 작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초등학교 방학을 앞둔 7월 말쯤. 누나와 매형으로부터 방학동안 승하의 논술 교육 제안을 받았다. 더불어 방학 숙제와 공부도 덤으로 맡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직장관계로 누나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어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터였다. '박봉의 기자' 봉급으로 넉넉한 생활비를 내기도 턱없이 부족한 탓에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흔쾌하게 승낙하고 몇 가지 철칙을 세웠다. 방학 한 달 동안 '인성교육과 스스로 학습법' 터득을 목표로 정했다. 형제 없이 혼자 자란 탓에 응석부리는 경우가 많은 승하. 원하면 무엇이든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승하. 그런 승하에게 책임과 권리에 대해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학교에 다녀온 뒤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나 TV부터 켜던 나쁜 버릇도 고쳐야 했다. 누군가 시키지 않으면 스스로 공부할 줄 모르는 악동에게 자율학습은 어떨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독후감이다. 일주일에 2편의 동화를 읽고 검사를 맞는 것. 채찍대신 승하가 좋아하는 게임과 만화시청 등을 대가로 걸었다. 정해진 기간 내에 독후감을 써서 20점(100점 만점)만 넘으면 게임 및 만화 보는 시간을 늘려주는 당근책을 꺼내들었다.
나름대로 운동 및 자연학습도 시킬 겸 30점을 넘으면 인라인을 타러가고, 40점을 넘으면 동물원, 50점 이상이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전에 몇 차례 글쓰기 테스트를 해 본 결과(자체 평가), 그 이상을 기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번이나 빵점을 맞은 승하... 그런데
과제를 내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7월 23일 저녁 8시. 기사송고를 마친 뒤 승하에게 과제 검사를 위해 학습장을 펼쳤다. 하얀 백지 위에 '제목 : 달려라 엄마'만 적혀 있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너 삼촌이 내준 숙제 안했어."
"그게… 그게 말이야…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 오면 밤이라 시간이 없어서... 그래서 못했어.(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주말 내내 만화를 보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한데도 핑계를 댄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2편이라 해도 전체 20쪽이 넘지 않는 단편이다. 거창한 독후감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짤막한 감상문을 적는 것이라 그리 어렵게 보이진 안았다. 그런데도 손도 안댔다.
그래서 '0점'을 줬다. 승하는 덕분에 27일까지 TV는 물론 컴퓨터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승하의 표현을 빌리자면 '따분한 하루'를 보냈다. 또 다시 돌아온 과제 검사의 날. 27일 저녁 8시. 자신 없는 표정으로 학습장을 들고 내 앞으로 왔다.
"삼촌 다했어. 검사 해줘."
이번에는 독후감을 썼다. 내심 기뻤다. 이번에도 하지 않았으면 매를 들어야 하나 고민했기 때문이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내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난해한 글이었다.
책을 재대로 읽지 않은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승하는 학습장에 전혀 생뚱맞은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담아냈다. 이번에는 더 크게 '0점'을 표시하고 밑줄도 2번이나 그었다. 마지막 경고라는 표현이었다.
기간을 앞당겨 31일까지 똑같은 내용으로 숙제를 냈다. 삼세번 기회를 준만큼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검사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실망이 큰 터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웬걸. 표현력이나 문맥의 흐름 등이 너무 자연스럽고 잘 쓴 것이 아닌가. 평상시 승하가 썼던 글과는 확연히 달랐다. 드디어 정신 차렸나 보다 생각했다.
"와~ 승하 독후감 정말 잘 쓰네. 대단하다, 이렇게 잘 쓰면서 그동안 게으름만 피우고,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은 글 쓰겠는데…(환한 미소)"
"삼촌! 그럼 나 이제 게임이랑 만화 봐도 돼?"
"당연하지.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근데 승하야, 글 내용은 좋은데 느낌이 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음…."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진 승하. 조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읽었던 책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내용을 고대로 베낀 것이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듯 승하의 글쓰기도 단시간에 발전할 리가 없었다.
"승하야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야. 남이 쓴 글이나 사진을 훔치는 것도 아주 나쁜 도둑질이야. 네가 그걸 가져다 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너는 아무런 노력 없이 남의 것을 손아귀에 넣지 않았니…."
"게임도 하고 싶고, 만화도 보고 싶어.(훌쩍훌쩍)"
"넌 오늘 가장 중요한 너의 양심을 도둑질했어.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도둑질에 대한 반성부터 해라. 그리고 약속에 대한 책임을 져야 삼촌도 네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겠니?"
"삼촌은 천재니까 그렇지. 난 아니란 말이야."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 독후감을 썼는데도 3번째 빵점을 맞아 상심한 터였다. 약속도 지키지 않은데다 거짓말까지 한 승하에게 또 다시 금지령을 선포했다. 반성문과 독후감을 다시 제대로 쓰는 그 날까지.
"삼촌은 뭐든 잘하는 천재면서 게임은 정말 못한다~"
그런데 이 녀석의 '천재니까'라는 말이 새삼 오늘(8월 1일) 귓가에 맴돈다. 왜 일까.
"삼촌이 내 준 거 다했어. 삼촌 정말 미안해."
승하가 대뜸 과제를 다 했다며 사과의 말과 함께 학습장을 내밀었다. 진심어린 독후감이었다.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짓말에 대한 반성과 신뢰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글로 잘 전개했다. 점수를 주자면 25점 정도. 그래도 이 녀석 자랑스럽다.
이제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줄거리에만 집착했던 예전과 비교해 달라졌다. 기쁜 마음에 그동안의 '앙금'도 모두 사라졌다. 2주 동안 컴퓨터와 TV를 보지 못한 승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하고 있던 게임기를 넘겼다.
사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잘하지도 못한다. 그저 호시탐탐 게임기를 노리고 있던 승하에게 자극제 역할을 했을 뿐. 그런데 이놈 게임기를 손에 넣자 도발적인 발언을 해왔다.
"에이~ 삼촌은 뭐든 잘하는 천재면서 게임은 정말 못한다. (크크크~) 삼촌 내기할래?"
그래서 '천재니까'라는 말이 신경 쓰였을까. 왠지 이 녀석에게 놀림 당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오늘 이 녀석에게 다른 과제를 내 줘야겠다. 두고 보자 이놈(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