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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북미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프로세스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보수진영의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0일에 끝난 6자회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비관론자들은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와 핵 시설 불능화 시한을 정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반해 회담 참가국들을 비롯한 낙관론자들은 서로가 문제 해결의 의지를 확인하고 신뢰구축에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낙관론은 8월에 예정된 실무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해야 탄력을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회담 직후 우리는 또 다시 만만치 않은 문제가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경수로가 바로 그것이다.

김계관 북측 대표는 평양으로 돌아가면서 "영변 핵시설을 가동 중단하고 무력화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며 그러자면 경수로가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평양에 도착한 직후 중국의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경수로 문제는 9.19 공동성명에 따라 핵시설 해체국면에 진전이 이뤄지는 시점에 논의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적어도 핵 폐기와 경수로 공사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반응은 '일단' 싸늘하다. 미국측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23일 국무부 브리핑에서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해야만 대북 경수로 논의가 가능하다"는 '선(先) 비핵화, 후(後) 경수로'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9.19 공동성명 채택을 전후해서 이미 나타난 바 있고, 이 때문에 9.19 공동성명 채택이 지연된 것은 물론이고 이행에도 먹구름을 드리운 바 있다. 결국 공동성명에서는 "적절한 시점"에 논의하기로 하고 경수로를 미래의 의제로 넘겼다. 이는 역설적으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이행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경수로 문제가 불거지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북한의 전략적 결단에는 경수로가 필요하다

'북한은 핵무기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릴 것인가?' 대북강경파들은 물론이고 많은 온건파들이 품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핵시설의 폐쇄 및 봉인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면, 불능화 및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는 이보다는 어려울 것이고, 핵무기의 포기는 거의 기대하기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선군정치를 표방해온 북한이 선군정치의 표상이자 대미 억제력의 핵심으로 삼아온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이는 결국 협상에 달려 있다. 북한에게 핵무기가 아닌 '다른 수단에 의한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군정치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던 90년대 중후반에 나온 것이고, '고난의 행군'으로 상징되는 체제 위기에 대한 돌파구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북한 지도부가 핵포기의 반대급부를 통해 체제 위기를 극복하고 또 다른 정당화의 기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하면, 핵포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북한이 완전 핵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게 하는데 핵심적인 반대급부는 무엇일까? 최근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대체,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등은 이미 많이 거론되어온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수로이다. 북한의 경수로에 대한 '일관된 집착'과 방코텔타아시아(BDA) 문제가 주는 교훈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또 다시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프로세스가 총체적인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위성에 바라본 북한 영변 핵 시설단지.
ⓒ 2003 몬테레리 연구소
이는 반대로 경수로 사업의 조속한 재개가 비핵화 및 평화 프로세스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 북한 체제에 상당한 비중을 갖는다면,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또 다른 유훈사업인 경수로 사업이 보장될 때에만 비로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한반도 비핵화와 선군정치 사이의 딜레마를 풀 수 있는 열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핵포기의 대가로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조미적대관계 종식 및 조선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더불어 경수로까지 확보한다면, 김정일은 이를 선군정치의 공으로 돌리면서 새로운 체제 정당화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향후 북한에서 선군정치가 보다 정상적인 정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선군정치의 '승리'를 통한 선군정치의 '퇴장'이 필요하고, 경수로는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경수로를 통한 HEU 논란 해결

실제로 발상을 전환해보면, 경수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면 상당한 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결단을 유도할 수 있는 확실한 지렛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미 양측이 체면과 실리를 챙기면서 고농축 우라늄(HEU)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향후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는 2차 핵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HEU이다. "있다"는 부시 행정부와 "없다"는 김정일 정권 사이의 지루한 공방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 대상에 우라늄 농축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상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첫째는 북미 양측이 2.13 합의 이후 우라늄 농축 문제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상호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의 해법을 모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우라늄 농축 장비의 구매하거나 핵 연료를 제공하는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현금을 주고 우라늄 농축 장비를 구매하려고 할 경우, 그 역풍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속임수 게임에 넘어갔다는 비난은 물론이고, "악행을 현금으로 보상했다"는 미국 내부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른 대안으로 북한이 우라늄 농축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경수로 공사를 조기에 재개하고 핵 연료를 6자회담 참가국들로 구성되는 국제컨소시엄에서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 방안은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인 HEU 논란과 경수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미국이 고려하고 있다는 현금 제공은 북한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으나, 미국 국내적으로는 수용되기 힘든 방안이다. 반면에 핵 연료는 경수로가 완공된 이후에나 쓸모가 있어 경수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북한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딜레마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경수로 조기 완공에 있는 것이다.

▲ 북핵 6자회담이 지난 2월 13일 6개국의 합의로 타결된 가운데, 이날 오후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폐막 회의에 앞서 참가국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북한의 NPT 복귀와 북미 원자력협정 맞교환을

또 하나의 문제는 경수로 제공 시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법 역시 '동시 행동'의 원칙 및 신뢰구축 조치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향후 경수로 사업 일정을 논의 개시→공사 재개 합의→공사 재개→북미 원자력 협정→1호기 완공→2호기 완공으로 정리한다면, 이러한 사업 일정과 북한의 핵포기 단계를 연계시켜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차기 6자회담에서 경수로 논의를 재개하고 불능화 단계에 완료될 때 공사를 재개하며, 북한이 NPT 및 IAEA에 복귀할 때, 북미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는 순서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세스에서 핵심은 북한의 핵폐기가 완료되기 전에 북한이 NPT에 복귀하는 것이고, NPT 복귀와 북미원자력협정 체결을 맞교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북핵의 조속한 해결은 물론이고 존폐의 위기에 처한 NPT 체제를 되살릴 수 있는 유력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고, 북한은 미국의 경수로 제공 의사를 법적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보다 큰 틀에서 경수로 문제를 포함해 북한의 에너지난을 해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기구의 창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의 틀이 6자회담으로 짜여진 만큼 새로운 기구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제네바 합의의 산물이었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확대·개편해 '동북아 에너지 협력기구' 창설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제안은 중유를 비롯한 대북 에너지 제공 주체로 비(非) KEDO 회원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포함되었고, 향후 KEDO를 대체할 새로운 기구가 필요해질 것이며, 2.13 합의에서 경제 및 에너지 문제를 논의하는 실무그룹이 구성되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아울러 에너지를 둘러싼 동북아 국가들의 각축전이 치열해지고 있고, 에너지 사용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환경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에너지 협력 문제가 동북아에서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의 역할과 그 의미는 중요하다. 중유 제공의 실행 주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수로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 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의 우라늄 광산을 이용해 경수로의 발전용 원료를 제공하고 운영권을 갖는다면, 경수로는 IAEA 감시와 함께 동북아에너지협력기구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 핵무기 제조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소지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겨레21(7월 27일자)에 기고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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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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