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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씨 사건은 작게 보면 결국 미술계 내부 문제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 고질적인 병폐가 없는 분야가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분야든지 내부의 병폐가 불거진 사건은 항상 터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신정아씨 사건은 문화면 단신을 넘어 연일 주요지면을 장식하는 이슈가 됐을까?

바로 학벌간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학벌 과민증에 걸렸다는 걸 방증한다. 전 세계에서 우리만큼 학벌에 민감한 나라는 없다. 한국인의 학벌 과민증은 이젠 망국적인 자해의 수준에 다다랐다.

학벌에 대한 병적인 과민증

▲ 학력위조로 논란에 쉽싸인 신정아씨.
ⓒ 연합뉴스
전 국민이 학벌쟁탈전에 뛰어들어 사력을 다한다. 생활비의 대부분을 사교육비에 쏟아 부어 삶의 질이 붕괴되는 것쯤은 얘깃거리도 안 된다. 아이들이 이 쟁탈전의 전사가 되어 인간성이 부서지는 것도 당연히 감수할 일이다. 한국 학벌에 이어 외국 학벌까지 따오기 위해 가정이 파탄 나는 것도 불사한다.

한국인은 목숨보다 학벌에 더 민감하다. 학벌쟁탈전인 입시경쟁구조에 치어 아이들이 자살해도 사회면 단신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그러나 학벌쟁탈전 운영에 관련된 사안들, 즉 입시 변별력이나 난이도엔 기이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된다. 쟁탈전에 행여 수능컨닝같은 운영사고라도 터지면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사람의 신분이 이 쟁탈전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의 입시 성적에 의해 찍힌 낙인이 평생을 간다. 상위 학벌은 지배자가 되고 하위 학벌은 피지배자가 된다. 한국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질서를 지키라고 세뇌당한다. 박기형 감독의 <폭력서클>이란 영화에 보면,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교사가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니들은 이제 애가 아니고 남자야. 무슨 말인지 알지? 빌빌 대면서 무시당할 건지, 아니면 당당하게 뽀대 나게 살 건지, 그건 앞으로 3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는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들 해."

고등학교 3년을 마친 후 상위 학벌 진입에 실패하면 마땅히 "빌빌 대면서 무시당"하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아이 때부터 부모와 교사로부터 이런 내용을 끊임없이 세뇌당한다. 그리하여 고등학생쯤 되면 이런 논리를 완전히 내면화하여 "4시간 자면 40평 아파트, 5시간 자면 30평 아파트" 따위의 급훈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된다. 나중에 이 구조를 거부하면 승부불복이 된다.

이지영씨가 저지른 죄

▲ 2004년 KBS KOREA '초청특강 문화동행'에서 영어 특강을 하는 KBS 2FM '굿모닝 팝스' 진행자 이지영씨.
ⓒ 연합뉴스
신정아씨는 현대미술분야에서 일했다. 현대미술엔 객관적인 가치기준이 없다. 어떤 장소에 변기뚜껑을 놨을 경우, 그것이 쓰레기 투기인지 예술행위인지 구별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모호한 분야이기 때문에 신정아씨의 능력에 대해선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지영씨는 유명한 영어 스타강사 출신이다. 자기 분야에서의 능력에 대해서 철저히 검증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 강사가 영어를 잘 가르치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이지영씨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의 거짓말을 문제 삼는다.

만약 이지영씨가 나이를 속였어도 그 거짓말이 지금처럼 문제가 됐을까? 결국 문제는 거짓말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속였는가였다. 다른 것을 속인 것에 비해 학벌관계를 속인 것은 중죄가 되고, 또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국의 신분질서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또 학벌쟁탈전에 대한 승부불복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왜 영어강사에 간판이 필요한가, 간판을 속여야만 하는 사회가 문제다"라고 하지 않고 "어쨌든 속인 것은 나쁘다"라고 하게 된다.

하지만 보다 거대한 거짓엔 이상하리만큼 관대하다. 바로 10대 때 성실히 공부한 똑똑한 아이들이 일류대에 들어간다는 신화다. 이것에 대해 한국사회는 놀라운 불감증을 보인다.

'명문대는 아이 능력 50%, 엄마 노력50%가 빚어낸 결과물.'
'최상위권 엄마 그룹의 정보력+시간+돈=서울대 의대.'
'맞벌이 엄마와는 함께 움직이지 말라.'
'엄마가 맞벌이를 하면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도 연고대를 갈 수 있지만, 서울대는 힘들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서울대 입학생 중 80% 이상이 스스로 중상층이라고 생각한다. 5명 중 한 명이 특목고 출신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선 어떤 조물주의 조화로 잘 사는 집에서만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입시경쟁구조 자체가 약자를 배제하는 체제다. 그런데 그 경쟁의 승자가 지배신분이 된다. 이건 결국 강자가 돈으로 신분을 사는 제도란 뜻이다. 어떻게 이런 제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왜 전 국민이 이 제도를 거부하거나 부수지 않고, 어떡해서든 그 안에서 자기 자식만은 승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경쟁에 매달릴까? 한국인의 불감증이 놀랍다.

일류대 나온 사람이 능력이 출중한 엘리트라고 간주되는 한국 사회가 더 기만적인가, 이지영씨가 더 기만적인가? 돈으로 산 간판으로 능력 있는 체하는 거대한 허위와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 간판을 차용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거짓인가?

학벌사기 방지책은 없나

▲ 보다 좋은 간판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사진은 서울대 정문.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일류학벌사기, 외국박사사칭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간판 사회인 한 간판사기사건은 영원히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간판이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 시스템을 완비한다고 해서 문제가 나아질까? 그것은 일류간판의 가치를 더욱 높여 일류간판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 투쟁을 더욱 고취할 뿐이다.

왜 우리가 신분을 돈으로 사는 체제를 고수해야 하는가. 대학서열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입시경쟁이 신분을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닌 정당한 학생들의 능력 경쟁일 수 있을까?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분쟁취를 위한 투쟁은 무한총력전이어서 각 가정이 모든 자원을 투여하는데, 이런 식의 총력전에서는 결국 보다 많은 자원을 투여한 쪽이 승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답은 입시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대학서열체제를 없애는 것뿐이다. 즉 대학평준화뿐이다. 대학이 평준화되면 학벌이라는 간판이 즉시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간판으로 자신의 능력을 치환하는 사기사건도 사라지고, 또 능력 있는 사람이 굳이 간판이란 가면을 써야 하는 비극도 사라진다.

난 연일 터지는 학벌 거짓말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국민이 학벌쟁탈전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가담하는 것이 놀랍다. 왜 한국인은 대학평준화를 거부하며 스스로 이 거대한 허위에 동참할까?

태그:#학벌사회, #이지영, #신정아, #평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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