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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7월.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 로이터/연합뉴스
2006년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레바논의 작은 마을 빈트 주베일. 일군의 레바논 젊은이들이 낡은 소총을 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청년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병원과 학교 건물을 순순히 내주고, 뒤편 허허벌판으로 퇴각한 것이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신이 났다. 은폐물 하나 없이 시야가 확 트인 곳에서 '인간사냥'이 시작됐다. 그날 레바논 청년 십 수명이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구 쏘아댄 미제 총탄에 쓰러져갔다.

빈트 주베일 주민들이 그들이 벌판으로 퇴각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결사항전으로 마을을 되찾은 이후였다. 그 청년들은 자신들이 병원이나 학교에 몸을 숨길 경우 이스라엘군의 탱크가 무고한 아이들과 환자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며 돌진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제 조국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청년들. 그들은 한 사람 빠짐없이 레바논의 무장정치조직 '헤즈볼라'였다. 그들의 주검이 묻혀있는 마을 어귀의 묘지. 거기서 만난 12살 레바논 소년이 당당하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제가 조금만 더 크면 헤즈볼라 전사가 되어 총을 들고 싸울 겁니다. 내 동생과 친구들의 생명을 구해야죠. 죄 없이 죽은 자와 정의를 위해 죽은 자는 신의 곁에서 빛나지요. 이스라엘이 우리 땅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그들은 또 우리를 폭격하고, 죽일 거잖아요. 그러면 얼마 남지 않은 내 친구들도 죽고, 나도 죽을 게 뻔합니다. 부당한 폭력 앞에서 노예로 살진 않을 거예요."

1980년대 '얼굴 없는 노동자시인'으로 불렸던 박노해가 전쟁의 포연이 채 걷히지 않은 레바논엘 단신으로 다녀왔다. 그곳에서 보고, 겪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기록한 책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가 최근 출간됐다.

위에 소개한 이야기는 책에 담긴 내용 중 일부다. 이스라엘과 초지일관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해온 미국에 의해 '과격 테러조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헤즈볼라. 하지만, 박노해가 레바논에서 마주친 현실은 우리의 선입견과는 많이 달랐다.

헤즈볼라 지도부 "한국군 파병은 원치 않는 비극 부를 수 있다"

▲ 박노해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표지
ⓒ 느린걸음
헤즈볼라는 레바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실질적 정부이며, 그 지도부는 주민들에게 '나약한 정부를 대신해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로 인식되고 있었다. 기실 지난해 이스라엘의 침공을 막아내고, 전쟁을 레바논의 승리로 이끈 주역 역시 헤즈볼라.

박노해는 레바논 헤즈볼라 최고위급 인사 중 한 명인 나와프 무사위 국제국장을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우리가 이제껏 오해해온 헤즈볼라에 관한 진실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무엇이 그들에게 총을 들게 했으며, 어떤 것이 그들을 움직이는 철학이고, 그들이 가진 비전은 무엇인지를.

명료하고, 신념에 찬 음성으로 헤즈볼라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하던 나와프 무사위 국장은 한국군의 레바논 파병에 관한 단호한 입장도 들려준다.

"레바논에는 외국군대가 필요치 않습니다. 파병된 한국군이 전투병이거나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시도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리자 역할을 맡게 된다면, 누구도 원치 않는 비극적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레바논 땅에서 레바논 민중과 헤즈볼라의 평화의지를 거스르며 무장해제를 시도한다면 그 어떤 군대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회적이지만 완곡한 경고다. 자신들의 조국에 적대적인 행위를 한다면 한국군에 맞서서도 빈트 주베일의 헤즈볼라 청년들처럼 싸우겠다는 것. 하지만, '헤즈볼라 국제국장'이 아닌 '인간' 나자프 무사위는 가슴 따뜻하고, 정 넘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박노해가 서울 광화문에서 레바논의 평화와 국제적 관심을 호소하는 서명운동을 하며 찍은 사진을 건네자 그걸 한참 동안 바라보던 무사위는 굵은 눈물을 떨군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진심 어린 애정에 목이 멘 것이다.

그 눈물 뒤에 이어지는 박노해의 우려와 다짐. "이라크 파병에 이어 레바논에 전투병이 파병될 경우 우리는 아랍, 이슬람의 13억 민심과 적대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군 전투병의 레바논 파병은 반드시 철회되어야 한다."

박노해의 레바논 리포트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는 악의적 선전으로 인한 오해의 베일에 둘러싸인 헤즈볼라의 진실을 보여주고, 한국군 레바논 파병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들려주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 책이다.

그러나 책이 가진 더 큰 미덕은 우리들의 관심이 고통받고, 탄압받는 사람들을 향해있지 못하다는 걸 가슴 아프게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우리의 관심이 향해야 할 곳이 비단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횡으로 신음하는 땅 레바논만은 아니리라.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 고뇌의 레바논과 희망의 헤즈볼라, Pamphlet 002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2007)


태그:#박노해, #헤즈볼라, #레바논,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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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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