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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김종휘는 그냥 어느 날, 아내와 길을 나서 걷기 시작했다. 65일 동안 동해→남해→서해의 바닷가를 걷고 타고 또 걸었다. 해안선 걷기 여행의 눈요깃감이고, 보이는 대로 잠깐 생각해볼 세상 흔적이며, 해안선 따라 걷고 서고 먹고 쉬고 자고 일어난 이야기를 여덟 편으로 나눠 연재한다. 마지막 회. <편집자주>
▲ 나와 나 사이에서 진짜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김종휘
불안해?

초고를 마치고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다음날 그렇게 물었다. 뭐가? 내가 출가할까봐. 니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출가할 것 같아? 아내는 웃음을 참으며 수수께끼를 내듯 자꾸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아내는 말했다. 출가 안 해. 이번 생은 너랑 잘 사는 게 내 업이야. 다음 생에 또 인간으로 오면 그때 출가할게. 걱정 마.

나는 나를 걱정해야 했다. 바바 여행을 마치고 원고도 마쳤으니 그간 느끼고 생각하고 글로 쓴 그대로 나의 어떤 생활 태도를 마쳐야 할 때였다. 인생의 전반과 후반 사이에서, 땅과 바다 사이에서,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너와 나 사이에서, 머리와 발 사이에서,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에서 진짜 여행을 시작할 때였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친 좀머 씨의 말대로 이제는 내가 날 그냥 놔둬야 할 차례였다. 나는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 다시 일을 했다. 기획하고 가르치고 글 쓰고 방송하는 나날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그 일들이 조금은 다른 의미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에 파묻혀도 일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좀 더 보태고, 좀 더 완벽을 기하고, 좀 더 진도를 나가고, 좀 더 성과를 내고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일을 하다말고 중간에 밖으로 나가 그냥 걷다가 돌아오는 때가 늘어났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다시 바바 여행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불안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내가 내가 아닌 채 살아가는 것 같은 심증의 소란들.

배꼽!

바바 여행 후 해를 넘겨 이사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아내와 나는 그럭저럭 평온하다. 아내는 얼마 전 삭발을 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쥐 파먹은 것 같은 까까머리를 한 아내가 씨익 웃고 있었다. 정말 웃겼다. 내가 머리를 깎을 때 쓰는 전기 '바리깡'으로 아내 혼자 삭발을 한 것이다. 뒷머리 곳곳에 머리칼이 삐죽삐죽했다.

▲ 삭발한 아내의 머리는 거짓말처럼 빨리 자랐다.
ⓒ 김종휘
그날 저녁 나는 아내의 못다 깎은 머리를 마저 깎아주었다. 예뻐? 예뻐? 삭발을 마친 아내는 내복 차림으로 골룸 흉내도 내고 영구 시늉도 하면서 나를 웃겼다. 응, 예뻐. 나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니가 내 머리 만질 때 이런 기분이구나. 이어 아내의 머리통 곳곳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내 머리통 냄새도 이랬어?

아내는 이상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엽기적인 여편네라고 불렀다. 아내는 수시로 내 머리 냄새를 맡았다. 집과 몸의 청결에 민감한 아내가 이상하게도 내 구리구리한 머리 냄새 맡는 것을 즐겼다. 같이 TV를 보다가도 갑자기 "어어, 산소호흡기!" 하고 외치면서 내 머리통을 끌어다가 냄새를 맡았다. 이 정도는 약과였다.

아내는 불시에 내 배꼽을 후벼 팠다. 그리고 손가락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아, 좋다-. 처음엔 어이없어 하다가 차차 익숙해지고 말았다. 하나 당하는 순간에는 번번이 당혹감이 엄습했다. 그때마다 항의했다. 말하고 파! 아내는 이젠 말하고 판다. 배꼽, 하면 나는 알아서 웃옷을 들어올린다. 아내와 나 사이에 질서가 잡혔다.

평화도 생겼다. 나는 늘 두 다리를 떤다. 아주 심하게 떠는 편이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 때문에 아내와 모처럼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가끔 밥상이 떨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는 불편하다며 떨지 말라고 주의를 줬지만 차츰 적응했다. 야, 신기해라, 두 다리가 딴 박자로 떠네! 아내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나만큼은 아니나 제법 떤다.

▲ 내가 바닥에 엎어지면 녀석들도 바닥에 엎어진다.
ⓒ 김종휘
하루 밥값 하자

65일 동안 5차례에 걸쳐 이어진 바바 여행의 총 경비는, 가계부를 쓰지 않은 탓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450여만원 가량 되었다. 여관이나 모텔에서 자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왔다갔다 차타고 배타고, 고장 난 휴대폰과 카메라 고치고, 사진 인화하고, 삼면 바다에서 한번 씩 장모에게 올려 보낸 울진 대게와 보길도 김과 영광 굴비 등. 많은 돈, 잘 썼다.

사실 돈에 관한 한 나는 은근한 강박을 갖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자란 아버지는 반신불수의 병자로 한 푼도 돈을 벌지 못했던 반면 어머니는 죽는 그날까지 일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살았다면 나는 주머니에 돈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신앙으로 극복했다면 나는 아내 덕 봤다.

바바 여행 후 내 수입은 꽤나 줄어들었다.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전 같지 않았다. 언제까지 같은 상태일지 모르나 걱정 안 한다. 아내 말대로 돈 벌겠다고 하루를 축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나 자신의 모습으로 있어도 되는 벌이를 찾아가는 중이니까. 나는 요즘 밥 먹고 살 만큼 벌고 하루 밥값 하는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끝에서 처음으로

이 글의 앞머리 글을 쓴 것은 바바 여행을 마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얼른 원고를 해치우려고 안달이 났었다. 내친 김에 본문을 썼고 한 달 뒤에 탈고했다. 그때 믿을만한 지인이 충고를 했다. 당신의 글을 읽다가 튕겨나갈 것 같았다고. 앞머리 글 빼면 그 바다, 길, 사람, 개, 여행, 집 어디에 당신이 있는지 안 보였다고.

▲ 바바는 그냥 어느 날들이었다. 그 어느날 카페 바다에서처럼.
ⓒ 김종휘
그 뒤로 김빠진 상태가 되어 원고를 묵혀두었다. 그렇게 뜸 드리는 동안 내 앞에 바바 여행 도중의 어떤 상태로 돌아가는 순간들이 나타났다. 그때 그곳의 나를 깨작깨작 더듬기 시작했다. 바바 여행이 내게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나는 바바 여행 중에 누구였는지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이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었다.

바바 여행은 그냥 어느 날들이었다. 그냥 어느 날들이 어떻게 나를 보게 하고 과거로 가게 했으며 계속 현재에 집중하게 했는지, 떠나고 돌아온다는 것이 내 생애에 어떤 일인지가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바바 여행을 마친 6월에서 해를 넘겨 4월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뒷머리 글은 그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글쓰기의 마지막 쉼표다.

너에게 가는

결국에는 그 길이, 그 여행이, 따로 또 같이 머무는 그 집이, 거기서 만나는 그 바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대단하다는 것을 바바 여행 다녀오고서 야금야금 알게 되었다. 사랑해서 같이 살고 싶거나, 부모 자식 서로 모르겠거나, 그럴 때, 그런 사이끼리, 길 걷는 여행 좀 넉넉히 해보면 안다.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알려준다.

곁에 있는데도, 눈길 돌리고 입 맞추고 어깨 걸고 포옹해도, 가슴에서 가슴으로 통하지 못하면 가장 먼 사이. 멀다 탓하지 말고 좁히려 애쓰지 말고 날마다 걸으면 되었다. 상대 발걸음 의식 말고, 내 심장의 울림으로 제 속도대로 리듬을 타고 한걸음씩 옮기면 되었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바깥에서 바깥으로, 바닥부터 바닥까지, 그 바바 여행처럼.

▲ 아내와 걸었던 그 길을 돌아보며 친구처럼 동행하는 법을 배운다.
ⓒ 김종휘
내 앞으로 걸어가지 마라.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내 뒤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이끌지 않을 테니.
내 옆에서 걸으면서 친구가 되어다오.
- 알베르 까뮈


차승민. 승민아. 쟈스민. 아즈미. 야몽. 몽이. 자갸. 너. 저기. 야. 내 친구를 부를 때 쓰는 말들이다. 내 친구가 나에게 왔던 이야기, 그 바바 여행도 같이 쓰기로 했었으나, 아내는 요가와 법회와 요리와 고미 보기 돌보기와 청소에 빠져 사느라 쓰지 않았다. 이번엔 그냥 니가 써라. 해서 이번엔 나만 썼다. 이 글을 내 친구가 되어준 아내에게 보낸다.

참, 여보야. 나 급한 성격 좀 고친 것 같아. 내리면서 들어가고 나오는 동안 올리는 거, 이제 안 해. 화장실 들어가고 나올 때의 바지 지퍼 이야기다. 칠칠치 못해 보인다고 그것은 꼭 고치라고 했던 충고를 어느 순간 실천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다행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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