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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과 번영을 위한 미래구상'은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보개혁 진영을 총결집해 연말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며 신당 창당 추진을 선언했다. 이 모임의 대변인은 정대화 상지대 교수. 그가 오마이뉴스에 기고문을 보내와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주>
▲ KTX 여승무원들은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지난 2006년 9월 2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진출을 시도했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 진출을 시도하던 KTX 여승무원들이 경찰에 가로 막히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다시, 새로운 정치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한다. 이 대장정이 분단 60년의 한국정치를 낡은 질곡에서 끌어올려 새로운 민주정치, 행복한 사회를 개막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새로운 정치는 낡은 관념을 타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정치를 독점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과 공장과 대학과 문화 등 대한민국의 모든 자원이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차단해야 한다. 대기업만 살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고사하는 죽음의 행진을 멈추어야 한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구조조정과 실업과 비정규직화를 막아야 한다. 사교육의 번창과 공교육의 붕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역과 농촌이 황폐화되는 상황을 거부해야 한다.

왜 우리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직장에서 쫓겨나야 하는가? 왜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주택이 없는가? 왜 우리를 조상 누대에 걸쳐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강제로 내쫓는가? 왜 우리는 사교육비에 시달려야 하고 대학입시에 목을 매야 하는가? 농촌과 지역에 사는 것이 왜 천형이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에게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 맑은 물, 깨끗한 공기가 부족한가?

태어나고 교육받고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과정이 형극이 되는 모순의 시대. 그러나 국민은 역사의 죄인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이다. 국민은 나라의 종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다. 국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나라의 주인이 되는 정치, 링컨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특별히, 고단한 국민의 짐을 덜어주고 소외된 국민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정치가 국민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할 때, 국민들의 가슴에 맺혀있는 분노를 어루만져 주지 못할 때 그것은 이미 가진 자들의 탐욕을 위한 유희일 뿐이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디딤돌이 되고 버팀목이 되는 정치야 말로 정치의 진수이며, 사회적으로 낙오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내일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새로운 정치의 조건

새로운 정치란 무엇인가? 구정치, 낡은 정치와 대척점에 서있는 정반대의 개념을 새로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는 독재정치와 대별되는 민주정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정치라는 개념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내용이 존재한다.

첫째, 새로운 정치는 낡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력이 주체가 되는 정치이다. 이 때 낡은 사람이란 정치적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나이가 든 사람을 의미하는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다. 낡은 사람이란 나이나 정치적 경험의 유무를 떠나 낡은 사고방식과 낡은 정치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정책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정치란 오직 새로운 정책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새로운 정책이란 단순히 과거와 구별되는 정책이 아니라 낡은 정책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말한다. 특별히, 사회적 양극화 등 불균등 문제와 사회적 소외를 해결함으로써 국민 다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데 낡은 정책으로 고착된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정책의 핵심이다.

셋째,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방식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 좋은 정책을 구상하더라도 그것을 추진하는 방식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방식이라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분단구조와 지역주의를 배격하는 정치, 패거리 정치의 청산, 부패와 비리를 거부하는 투명한 정치가 새로운 방식이지만, 특별히 정치가나 기득권자의 관점이 아니라 국민의 관점에서 수행되는 정치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어야만 정치권의 무한정쟁을 비롯한 소모적인 정치구조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 9일 오후 사립학교법 개정안 표결처리를 놓고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가운데, 이방호 한나라당 의원등이 김원기 의장에게 서류를 던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정치

새로운 정치가 새로운 사람과 세력, 새로운 정책, 새로운 정치방식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정치에 대한 관점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수 없으며, 기존의 지배적 기득권 구조를 포함한 낡은 가치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

새로운 정치는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 되는 정치이다. 새로운 정치는 재벌 위주의 정치가 아니라 중소기업 중심의 정치이며, 서울과 대도시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모든 지역을 고르게 발전시키는 정치이며, 자본가만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를 포용하는 정치이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별하지 않는 정치여야 한다.

새로운 정치란 현재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는 정치가 아니라 고단한 삶에 허덕이고 있는 다수 국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득권 구조를 옹호하는 낡은 사고방식과 과감하게 결별하여야 한다.

특별히, 이 문제는 최근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의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로 표현되는 3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정치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회적 양극화의 3대 과제는 단순히 정책 변화로 실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 그 실패의 경험들

우리가 새로운 정치를 처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치는 6월민주항쟁 이후 여야간 대립구도 아래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주제이다. 여당도 새로운 정치를 말하고 야당도 새로운 정치를 말하며, 기득권 세력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정치가 아니었다.

대통령이 바뀌고, 여당이 바뀌고, 기득권 구조 하에서 단순히 지배자가 바뀌는 정치를 새로운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난 15년 사이에 대통령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책의 변경이나 정치방식의 변화가 수반된 것도 사실이다. 집권 정당도 교체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는 시작되지 못했다. 서로가 세력교체의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를 말했을 뿐 진정 국민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를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 후 한국정치사에서 새로운 정치의 기회가 몇 차례 주어진 바 있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붕괴되고 자유당에서 민주당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정치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자유당을 대체한 민주당, 이승만을 대체한 장면 정부는 과거와 구별되지 않는 정치, 집권세력만 바뀐 정치에 불과했다. 권력 수준의 변화가 정치적 변화 혹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동반하지 못한 것이다. 4월혁명 후 민주당에서 신민당이 분화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구태와 혼란은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역발상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정치가 새로운 정치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지극히 소박한 감상주의자의 소망이거나 군인도 모르고 정치도 모르는 문외한의 근거 없는 기대였을 뿐이다. 그 결과는 유신독재와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학살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마련된 대통령직선제의 부활과 대통령선거 및 그 이후의 일련의 과정은 새로운 정치를 위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회였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는 양김을 포함한 정치세력의 몰역사적인 선택으로 인해 소진되고 말았다.

양김 분열로 인해 군사정권이 합법적으로 재집권하게 되면서 구세력에 대한 청산이 지연된 이유 때문에, 그 후 양김이 각각 구세력과 연합한 집권전략을 추구함으로써 민주화와 개혁이 왜곡된 이유 때문에, 재야세력이 낡은 정치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정치를 실험할 기회를 포기한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파행적인 민주화 과정으로 인해 새로운 이념과 정책으로 무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 지연된 이유 때문에 결국 새로운 정치의 실현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 87년 6월항쟁 기간 중 경찰의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어머니들이 나서 전경의 가슴에 장미꽃을 달아주며 최루탄을 쏘지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 우상호 홈페이지

누가 새로운 정치의 주체인가?

새로운 정치가 주체, 이념, 방식의 새로움에 의해 실현되는 것인 한에서 결국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정치이념과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주체에 의해 추진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주체란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는 개개인의 집합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영역에서 집단화될 수 있는 사회적 주체는 재벌, 관료, 군부, 노동자, 농민, 시민운동 등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민주화 과정의 특성으로 인해 70-80년대 재야 민주화 세력 역시 하나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재벌, 관료, 군부가 새로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결국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부문과 시민운동이 새로운 정치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좀 더 폭을 넓히자면 민주화 이후 성장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전문가 집단 역시 새로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두 가지의 대안이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의 정당은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성화된 노동자 정당의 존재는 매우 상식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노동자 정당이 노동조합에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이것만으로 지역주의적 분단구조의 한국사회를 개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특히,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원내진출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진전되었지만 더 이상의 확대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진출은 새로운 정치의 영역을 확대하는 방안인 동시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노동자 정당과 시민사회 정당의 연대와 협력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향후 통합되고 확장된 새로운 21세기형 진보정당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함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를 시민운동단체의 정치세력화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정치권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시 및 복지활동을 수행하는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시민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어봄직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민운동단체의 고유한 영역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시민운동단체들 역시 국가적 차원에서 시민운동 이상의 정치적 역할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 2004년 6월 30일 저녁 광화문 교보빌딩앞에서 고 김선일 추모 및 이라크 파병철회를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변화는 행복의 출발점

새로운 정치는 중앙정치에서, 지방정치에서 동시에 시작되어야 하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는 무책임한 수구보수세력의 집권을 차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분단의 강고한 기득권 구조를 바탕으로 수구보수세력이 중앙정치와 지방정치를 모두 장악한 상태에서 권력까지 장악한다면 우리 사회는 완벽한 일당독재국가로 전락할 것이며,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한 미래의 꿈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대통령을 바꾸고, 국회의원을 바꾸고,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바꾸는 정치혁명의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 천년을 지속해온 낡은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가 고단한 잘못된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 없이는 행복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정치의 변화만으로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교육을 바꾸고 언론을 바꾸어야 하며, 지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득권적 토호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꾸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룰라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 그렇다. 눈앞에 다가온 행복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 행복을 가져다줄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북한이 남침할 이유도 없고 외세가 침략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직장에서 쫓겨날 이유도 없고 살고 있는 주택에서 내몰릴 이유도 없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과거에는 거리에서 격렬하게 변화를 추구했지만 이제는 차분하게 판단과 투표만으로도 거대한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 조용한 변화, 거대한 변화, 행복한 변화를 기대하자. 변화에 몸을 맡기자. 이것만이 진정 새로워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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