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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젊다고 생각되던 시절. 노천에는 꽃잎이 낙화의 성숙을 이야기 하며 떨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주름 한 점 없는 햇볕을 받으며 화창한 벗들의 웃음을 안주 삼고 꽃잎을 술잔에 띄워 한껏 즐겼다고도 한다. 과연?

그러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결혼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적당히 포기도 할 줄 알고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아는 이른바 사회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혹은 어쩔 수 없이 말이다. 옛 시절, 이라고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에 꾸었던 꿈들. 아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에 떠밀리며 퇴근을 하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늘 다짐하는 것들.

편지는 그럴 때 온다. 우연히 펼친 신문에 난 젊은 시인의 부고 기사처럼, 가슴 한켠을 내밀히 지배 하고 있던 감정의 뒤틀림, 각 자 그 뒤틀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젊은 아티스트 신해원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잘 지내느냐고 묻는 첫 인사는 생략하고 그는 대뜸 추억부터 끄집어낸다. 빛나던 날들을 이야기 한다. 혹, 아직 노천에 앉아서 햇볕을 쬐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든, 그의 앨범을 구입해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슬슬 불안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말이다.

신해원을 만나다

▲ 양재시민의 숲에서 신해원
ⓒ 류호정
그를 만나기로 한 양재 시민의 공원에 햇볕이 가득하다.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손 마다 확대경을 들고 어느새 무성히 자라난 풀잎들을 바라보고 있다. 유치원 선생님은 자꾸 다른 것은 보지 말고 나뭇잎을 보라고 하는데, 애들이 말을 안 듣는 것 같다. 유치원 선생님도 계속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을 뿐이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음악 삼아 듣고 있으려니 저 쪽에서 기타를 든 사람이 보인다. 한 눈에 보기도 그는 기타리스트 신해원이 분명했다.

"뭐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하죠, 날씨가 덥네요."

야무지고 씩씩한 목소리가 오후의 평화를 기분 좋게 깬다. 기타를 매고 선글라스를 쓴 모습은 완연한 아티스트이다.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 '아니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이 어쩌자고 그런 옛 기억들은 끄집어냈단 말인가.' 그러나 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음료수만 마신다. 커피와 녹차, 담배 한 개비와 날씨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본격적인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간단한 질문에 간단한 대답이 오고가는 깔끔하고 경쾌한 인터뷰가 될 것이다.

류정호(이하 류) : "이렇게 바쁜 와중에 인터뷰에 선뜻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해원(이하 신) : "아닙니다. 저를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더 감사하지요. 그리고 사실 그렇게 바쁘지도 않습니다.(웃음)"

: "바쁘지 않다고 하시지만 공연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 "6월 10과 26일에 KT공연 홀에서 처음으로 신해원 재즈 유닛의 첫 단독 공연이 있습니다. 1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연장인데요. 요즘은 공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 연습하고 맞춰 보고 하는 일이지요. <두번째 달> 밴드의 'BARD'라고 하는 프로젝트 그룹활동 하는 것 같이 하다가 요즘은 공연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 "BARD요?"

: "네, 아일랜드 트레디셔널, 그러니까 음, 아일랜드 전통 음악 하는 프로젝트 그룹인데요. 피리도 불고, 기타도 치는…. 그렇게 <두번째 달>과 같이 했었죠."

: "신해원을 모르는 사람에게 기타리스트 신해원이라는 사람을 소개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 "한마디로 신해원이라고 하는 브랜드를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신해원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느냐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으레 재즈와 음악, 인생 등등의 단어를 기대하고 있던 기자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원은 이런 기자의 표정을 보고 놀리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그의 생각을 펼쳐 보인다.

: "브랜드 경영이요?"

: "네, 그렇습니다. 신해원이라고 하는 이름 그 자체가 바로 브랜드입니다. 음, 이런 저런 설명이 붙지 않아도 신해원이라고 하는 이름만으로도 믿을 수 있는 명품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해원이라고 하는 브랜드를 경영하는 사람이지요."

조금 놀라웠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뭐니 열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굳이 곡해하여, 자본주의와 상업성에(같은 말이겠지만)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여도 그는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가 정말로 자본과 상업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음악 운운하는 중언부언.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신해원이라고 하는 브랜드 네임을 이야기 한다. 이 사람, 경쾌한 내공이 느껴진다.

: "그래도 신해원이 하는 음악의 방향 같은 게 있을 텐데요."

: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음악은 49%의 재즈와 51%의 휴머니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49%의 재즈와 51%의 휴머니티요?"

: "네, 저는 인간적인 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칭얼대고, 울보가 되고, 고집쟁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 갇혀 있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 칭얼댐이나 고집은 인간이 가진 서정이나 감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그러한 감정을 다른 이와 공감하는 매개이고요. 인간이 가진 그러한 인간적 상처가 곧 사회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착하기만 하다면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 "그렇군요. 그럼 49%의 재즈는요?"

: "49%의 재즈이지만, 장르나 평론에 구애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즘의 트렌드도 월드뮤직 트렌드고요. 남미나, 아까 말했던 바드(BARD)처럼 아일랜드 전통 음악도 있고,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퍼스널리티(personality)와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의 조화이겠지요. 그 둘을 적절히 조화 시킬 수 있다면 장르와 장르의 경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과 서정이죠. 뭐 그래도 좋아하는 음악은 유색인종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유색인종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원시성은 분명한 매력이 있습니다."

: "음악을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 "악기를 잡을 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자기'를 만나게 되고, 그 순수한 자기가 만들어 내는 자유로움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 "창작자로서 창작의 고통, 새로운 것에 대한 압박 같은 것, 물론 신해원씨에게도 있겠죠?"

: "그렇죠. 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이 새로울 것 없는 어떤 것들이 계속 순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흐름 속에서 작품이 나오는 것이지요. 물론 끊임없이 회의 속에서 싸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개척해 보는 것입니다."

▲ 악보와 기타
ⓒ 류호정
: "원래 국문학을 전공 하셨죠?"

: "네, 원래 글 쓰는 걸 좋아 했고 글을 쓰고 싶어서 국문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국문과에 있으면서 문학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 "문학에 대한 회의요?"

신 : "그러니까, 글에 대한 회의라는 것은, 글이라고 하는 시각적 매체에 대한 회의이기도 합니다. 감정이나 주제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전달되는 것에 대한 것. 음악은 그러나 직접적이지 않고…. 그리고 문학을 둘러 싼 어떤 환경, 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도 싫었고요."

: "권위주위 같은 것일까요?"

: "네. 그런 것들요. 뭐 세상 모든 것이 다 비슷하겠지만 그냥 그런 것들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덧붙여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에서 서정이라는 것도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만 하는 것 같네요. (웃음) 평소에 쉬는 날에는 뭐하고 지내세요?"

: "등산을 좋아해서 산에 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그냥 길을 걷죠. 길을 좋아합니다. 뭐 그냥 나머지는 백수들 사는 거랑 똑같아요.(웃음) 요즘은 공연 하는 거 준비 하고 있고요."

: "앞으로는 어떤 음악을 하고 싶으세요?"

: "뭐, 앞으로도 편안하고 보통사람이 입으로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들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팀을 만들 거고요. 그 팀은 아마 크로스 오버를 하는 재즈 팀이 될 것입니다.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싶어요. 프로듀서로 작곡가로, 재즈기타리스트로, 영화 음악도 하고 싶고. 이래 뵈도 꿈이 야무집니다.(웃음)"

: "신해원씨의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 "제 음악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너무 썰렁한 거 아니에요?"

: "신비주의 컨셉트로(웃음). 그게 아니라, 뮤지션이 팬들에게 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당연히 음악 들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씀밖에는 없지요."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의 시야에서 놀다가 사라졌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햇볕은 나뭇잎에 걸러져 맥이 풀린 채 숲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햇볕을 닮아 한적하게 걷고 있다. 신해원씨에게 몇 장의 사진들을 부탁했고, 그는 웃으며 성실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 진지하고 매서운 눈빛 사이사이 밝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의 앨범은, 그러니까 1집 앨범은 10여년이 넘게 걸린 작품이다. 어느 뮤지션의 앨범인들 공들이지 않은 앨범이 있을까마는 그의 앨범은 특히 그렇다. 스폰서도, 기획사도 없이 마땅한 장비들도 갖추지 못한 채 그는 혼자 이루어 냈다.

몇 번이나 음악을 포기 하고 싶을 만큼 위기를 겪기도 하고, 제때 돈을 줄 수 없어 멤버들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음반시장의 총체적인 위기라고 말하는 요즘, 그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냈다.

단순히 열정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열정은 소리 내서 "열정"이라고 말하고 나면 금세 꺼져버릴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그의 20대와 30대 초반을 고스란히 보내고 나서야 그는 그의 앨범을 내고 싶은 꿈을 이루었다. 산통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그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그의 말투는 간간히 부는 바람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에게 '앨범 만드는데 힘들지 않았어요'라는 질문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지금은 찬사가 필요할 때다. 너무 낮 간지러운 찬사 말고 그냥 그의 음악을 들어 주는 것 말이다. 우리는 가끔 잊고 있을 때가 많다. 가수에게 최고의 찬사는 그의 음악을 들어 주는 것이며, 작가에게 최고의 찬사는 그의 글을 읽어 주는 것이며, 인생에서 제일의 찬사는 삶을 그저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젊음의 때가 가버린 것은 더 이상 우울해 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나쳐버린 풍경에 집착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풍경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회한과 방황, 단순한 열정만 가득했던 시절 말고 이제 진짜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프로통의 류호정 기자입니다


태그:#신해원, #기타, #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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