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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필요하니까 저런 광고만 눈에 들어오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이 한숨과 더불어 TV를 꺼버렸다. 한달 후로 이사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 내 집에 들어간다는 설렘보다는 당장에 내줘야 할 보증금이며 이사 비용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꼭 가야 할까? 돈도 없는데, 그냥 살 걸 그랬나 봐."

집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사가려고 하니 또 돈이라는 상전이 길을 가로막고 섰다. 하지만 결혼 생활 10년 만에 장만한 내 집이 아닌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객기가 발동해서 여기저기 이삿짐센터를 알아보고 계획을 세워봐도 당장 해결해야 할 돈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이럴 때는 잘 살지 못하는 친정부모님이 길게 내뿜는 한숨 속에 녹아들기도 하고, 일찍 돌아가신 시어른들도 생각나곤 한다.

"어디 돈 빌릴 데 없지?"

대답이 뻔한 질문에 남편은 어이없는 웃음을 던져왔다.

'무이자~ 무이자~' 속는 사람만 바보!

▲ 유명 연예인들의 TV대출광고 출연은 한채영, 최민식, 최수종을 시작으로 김미려, 탁재훈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때가 때인지라 유독 대출광고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라도 베풀겠다는 듯 마음좋아 보이는 저 연예인들의 얼굴에, 멀쩡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는 걸 내 눈으로 봤으면서도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니 나 역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30일 무이자 무담보!" "우린 두 달 무이자!" "피자보다 빠른 30분 대출"….

요즘처럼 공짜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세상에, 두 달이나 무이자로 대출해 준다고 하니 "이건 아니다" 하는 내 의지와는 달리 마음은 "그래도 혹시" 하며 흔들리는 것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남편이 밖으로 나간 뒤 다시 TV를 켰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대출광고가 빠짐없이 나오고 있었다. 그 광고 중에는 진짜로 돈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광고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게다가 알 만한 연예인, 평소 이미지로 봐서는 절대로 서민을 속일 것 같지 않은 연예인들이, 돈이 필요한 지금의 나같은 사람을 살살 유혹하고 있다. 물론 내가 대출의 위험성을 모른다면 나 역시 진즉에 전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출을 받아서 고마움을 갖고 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대출광고를 하는 연예인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믿고 대출을 받는 서민의 그 절박함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물론 대답은 '절대 모른다'일 것이다.

동생이 사채 때문에 집이 넘어가고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당해서 빚독촉 전화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도, 대출광고는 여전히 TV에서 넘쳐나고 있었고 그 연예인도 여전히 그 광고에서 대출을 권유하고 있었다.

노점상 남편만도 못한 대출광고 연예인

연예인들은 그 자체가 상품이고, 그 자체로 광고가 된다. 사실 대출하면서 대출조건도 조건이지만, 비슷비슷한 조건들 중에서도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더 믿을 만한 연예인이 광고하는 업체를 선택하게 된다. 그건 "설마?" 하는 의식 때문이다.

TV에서의 이미지, 그 이미지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광고는 그 어떤 것도 믿고 싶고, 사주고 싶은 애청자의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그 선량한 마음을 단순한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광고주나 연예인들이 있어 안타깝다.

물론 연예인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난 그냥 돈받고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

연예인은 그저 이름 석 자 내걸고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 아니다. 그 이름만으로 믿음이 되고, 신뢰가 되고 상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연예인 처지에서 보면 한창 잘 나갈 때 벌어놔야 한다는 심리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막말로 퇴직금도 보너스도 없다는 점에서는 노점상을 하는 남편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노점에서 파는 물건이지만 남편은 자신이 파는 물건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좋은 물건을 팔려고 노력하고,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임에도 교환이나 환불을 철저히 해주고 있다.

노점상도 이럴진대 하물며 연예인이, 그것도 알 만한 연예인이 그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더욱이 수많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한 채 내 주머니만 채우자는 이기심은 최소한 공인으로서 멀리해야 할 자세가 아닐까 한다.

연예인은 공인... 대출광고 중단 확산되길

▲ 31일 대부업체와 TV광고계약을 해지했다고 밝혀 화제가 된 영화배우 김하늘. 사진은 김하늘이 출연했던 TV 대출광고 장면.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탤런트 김하늘씨가 계약금까지 반환하며 대부광고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접했다. 그나마 나은 연예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대출광고에라도 캐스팅되기 바라는 연예인 처지에서 보면 "배부르니 별짓 다 한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대출광고의 최일선 피해자, 그리고 여전히 돈이라는 상전에 굽신거리는 아랫사람, 대출의 예비 피해자인 나 같은 처지에서 본다면 이런 일부 연예인의 용기있는 결단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용기가 나처럼 "그래도 설마"하며 대출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돈은 풀리지 않고 있다.

"엄마, 저 아줌마한테 돈 좀 빌려달라고 해봐요."

연예인의 무이자 대출광고에 초등학생 아들이 한숨짓는 엄마를 보다못해 한 마디 거든다.

"왜? 저 아줌마는 좋아 보여?"
"응. 바로 전화하라잖아. 저 아줌마한테 쪼금만 빌려달라고 해 봐요."

이렇게 순진한 아이에게 저 좋아 보이는 아줌마가 사실은 사채를 권하는 착하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할까? TV에 나오는 사람이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어떻게 말을 해야 여덟살 아이의 머릿속에 세상은 그렇고 그런 것, 속는 사람만 바보라는 진리가 성립될까?

창문 새로 비껴드는 늦은 오후의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난 길고도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본다.

"속는 사람만 바보!!"

그나저나 이사 날짜는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나 역시 대출광고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알아보고 돈을 구해놔야겠다. 급한 불 끄려고 급전대출 썼다가 재가 되기 전에 말이다.

태그:#대출광고, #김하늘, #대부업체, #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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