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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를 지나다 보면 안경점이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시원한 전면 유리에 반짝거리며 진열된 안경들을 바라보면 마음마저도 또렷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 최형국

인류가 만들어낸 물건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돕는 물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안경일 것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안경이고, 그 안경이 깨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면 그날 하루의 일과는 완전히 흐릿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안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13세기경 이탈리아 베니스 유리공에 의해서 우연히 발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여러 가지 광학이론이 정립되어 원시와 근시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으로 현재의 다초점 렌즈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안경을 쓰게 된 것일까요?

돈짝만한 두 개, 눈에 걸면 글자가 배로

안경이 우리나라에 건너오게 된 기록을 살펴보면, 유럽에서 만들어진 안경이 무역상을 통해서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 전파되었는데 당시에는 성행하지 않다가 16세기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이때 아마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에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세속에서는 '안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또 다른 고상한 이름으로 '애채(靉靆)'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눈에 구름 같은 것이 끼어 희미한 것을 밝게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그 당시 안경은 진귀한 물건으로 정평이 나 쉽게 구할 수 없었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묘가 하사한 물건을 보았더니, 크기가 돈짝만 한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흡사 운모)와 같고 금으로 테를 둘렀으며 자루가 달렸다. 오므리면 하나가 되고 펴면 둘이 되었는데, 노인이 두 눈에 걸면 글자가 배나 크게 보인다."<청장관전서 제19권, 아정유고 11>

▲ 조선후기에 사용된 안경과 안경집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하얀 점박이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상어나 가오리의 가죽으로 만든 어피 안경집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 최형국
아마도 당시의 안경은 동전 크기만 한 안경알에 안경테는 금으로 장식했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좌우의 안경알이 접어지는 형태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이미 어느 정도 광학기술을 접목하여 돋보기 형태로 글씨가 크게 보이기까지 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물건이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안경이었기에 조선후기에는 마치 안경이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허리춤에 안경집을 곱게 메달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안경집 중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거북이 등껍질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상어 가죽인 어피에 옻칠을 해서 매화꽃 문양이 나는 형태로 마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는 조선시대에 칼집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당시 최고의 세공기술이 있어야만 그 귀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정조, 아침에 일어나 안경을 찾다

이렇게 안경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자, 임금님도 안경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록상 조선시대 임금 중 안경을 사용한 임금은 정조가 처음입니다. 정조는 억울하게 뒤주 속에 갇혀 승하한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한을 풀고 부강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 어느 역대 임금들보다도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정조는 '초계문신제'라고 하여 이미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에 등용된 사람들에게 직접 공부를 가르치고 시험을 보아 승진을 시키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미 과거급제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으니 얼마나 피나는 공부를 했는지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스물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후 눈알이 빠져라 책을 보았으니 시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나이 마흔이 넘자 안경 없이 글을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법으로는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살피는 자리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이러한 예법은 당시 안경이 너무도 귀했기에 신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쓰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요즘처럼 아무 때나 안경을 쓰는 것은 말 그대로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 1800년대 초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혈의 누>의 장면들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안경을 쓰고, 천리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수석식 권총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조선시대는 문명화가 덜 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은 버리셔도 좋습니다.
ⓒ 좋은 영화
시력이 나빠진 정조는 급기야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안경을 써야 할까, 말아야 할까하며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몇 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다. 정사의 의망에 대해 낙점을 하는 것도 눈을 매우 피로하게 하는 일인데,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 있을 몸소 하는 정사도 시행하기가 어렵겠다." <정조실록 51권, 23년 5월 5일 임술>

그리고 그해 7월에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였는데 그 때 "안경이 조선에 들어온 지 어언 200년이 되었다"고 하며 안경의 역사에 작은 실마리를 찾아 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기병들은 고글을 착용했다?

이렇게 안경의 사용이 조금씩 넓어지면서 드디어 군대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그 안경은 다름 아닌 '풍안경'이었습니다. 요즘 쉽게 생각하자면 일종의 고글의 형태일 것입니다. 먼지가 많이 날리는 곳이나 말을 타고 적진을 돌격해야 하는 기병에게 풍안경의 발명은 획기적이었을 것입니다.

풍안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덕무가 청나라 연경에 다녀온 후 집필한 <입연기>에 등장하는데, 당시 먼 길을 떠나는 사위에게 이덕무의 장인이 베로 만든 적삼과 바지 두 벌 그리고 풍안경 하나를 주었습니다.

특히 조선후기 중앙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에서는 용호영과 더불어 기병의 숫자가 많았는데, 이 곳에 배급된 군수물자 중 풍안경의 숫자는 자그마치 530면으로 당시 기병들에게 한 개씩 보급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먼 거리를 살피는 '천리경'은 군영 전체에 1면만 보급해서 당시 천리경이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지를 반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안경은 우리에게 밝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탄생했고 이제는 멋으로 치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혹시 안경을 착용하신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그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 영화 <음란서생>에서도 안경이 등장합니다. 두가지 모두 조선후기에 사용됐던 안경. 한석규가 사용한 철제무테안경은 중인이 썼던 것이고, 동물의 뿔로 만들어 조각까지한 이범수의 안경은 사대부가 썼던 것이다. 윤서(한석규)가 쓴 철제무테안경은 안경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으로, 실제 조선 후기에 중인이 썼던 것이라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 http://muye24ki.com 입니다.


태그:#안경, #정조, #풍안경, #천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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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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