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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여성서양화가, 최초 근대문학 여성작가, 여성해방운동가 정월 나혜석
ⓒ 네이버 <백호블로그>제공
소월 최승구 시인은 1900년대 최남선과 1920년대 주요한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문단의 주역이었다. 2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최승구. 그의 묘에는 사랑했던 여인 나혜석(근대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 세운 사랑의 증표가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를 따라 항일저항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최승구 시인과 나혜석 화백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나를 생각하는 나의 님
這(저)구름 나를 생각
차츰차츰 건일며(거닐며)
這(저)달에 나를 빗최려(비추려)
徽笑(휘소:아름다운 미소)로 울어러봄에(우러러보며)
검음으로 애를 태우고
누름으로 나를 울니라.(울리니라)

빽빽한 運命(운명)의 줄에
에워싸인 나를 우는 나의 님
따듯한(따뜻한) 품속에 나를 갖추려(감추려)
그 깁흔(깊은) 솔밧(솔밭)으로 오르리라
-최소월 시인의 시 <步月>에서

윤동주, 이상, 김소월, 김만옥, 김민부, 오장환, 백석, 송유하, 기형도 등등. 우리 문학사를 돌아보면 천재시인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자신의 혼을 불살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최승구도 그러했다. 1910년대 우리 근대문학이 서서히 꽃필 무렵,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소월 최승구. 최근 그의 생애와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필자는 그의 묘지가 전남 고흥에 있다는 자료를 확인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지난 3년간 그의 흔적을 추적해 왔다. 그의 삶에 다가갈수록, 그가 남긴 문학적인 성과보다 나혜석과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그녀가 오매불망했던 한 남자의 짧은 생애가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아 그의 삶에 더 관심이 쏠렸다.

최승구 시인은 1916년 4월, 전남 고흥군수 관사에서 26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그는 그곳에서 현해탄 너머 사랑하는 연인 나혜석을 그리며 눈을 감았고 고흥읍내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에 나혜석이 와서 묘비를 세웠다.
▲ 옛 고흥군수관사터. 지금은 헐리고 군청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최경필


최승구 시인은 아나키스트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에서 시작되어 주요한의 <불노리(1919)>로 연결된다. 그 중간지점인 1910년대를 이어주는 시인이 최승구를 비롯하여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김여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초대 고려대총장을 지낸 현상윤이다.

소월 최승구는 경기도 시흥 해주 최씨 최대현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보살핌을 받아 서울 보성중, 동경 게이오대학에서 수학했다. 동경 유학시절 동인지《학지광》의 편집인과 인쇄인을 지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학지광 4호(1915.2)》에 <벨지움의 용사>라는 시를 발표했으며, 이후 폐결핵을 앓고 있던 와중에도 1년여 동안 25편의 시와 수필, 평론을 썼다. 그의 작품으로 시 <왕인박사의 무덤>, <불여귀>, <보월> 산문으로 <정감적 생활의 요구>와 <너를 혁명하라> 등이 있다.

<벨지움의 용사>는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빌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한 시로 신체시의 형식과 운율을 띠면서도 긴박감이 넘치는 독특한 비유법을 통해 일제에 강한 저항의지를 표현했다.《근대시조(1916)》에 실린 그의 마지막 작품 <긴 숙시>는 현실인식과 저항정신을 낙원 상실의 이미지를 빌어 유려한 산문시로 표현했다.

최승구 시인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동아일보(1972.5.4)에 <소월에 동명이인 있다>는 제목의 기사와 주간조선 <창조기 한국문단에 제2의 소월이 있었다>는 제목으로 연달아 기사화 하면서 그에 대한 조명이 시작됐다.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신여성 나혜석을 만나다

▲ 나혜석 본인이 직접 그린 자화상
ⓒ 네이버 <백호블로그>제공
소월 최승구는 당시 조혼풍조로 보성중을 졸업하자마자 충주출신의 여인과 결혼했지만,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시절 학우였던 나경석의 소개로 나혜석과 사랑에 빠진다.

나혜석은 근대미술사상 최초의 여류화가이자, 단편소설 《경희(여자계,1918)》를 발표한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작가다. 또한 3.1운동 때 이화학당만세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렀으며, 후에 무정부주의 저항단체인 의열단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로서 ‘신여성’의 대표자로 인정받고 있으나, ‘연애대장’이라는 풍문과 <이혼고백장(1934)>을 연재함으로써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녀가 동경유학시절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여성해방의 논리와 실천에 대한 접근이 최근 이뤄지고 있으며,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생기는 등 역사적 인물로 재조명 받고 있다.

부유한 개명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수원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 서울진명여고보를 거쳐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다녔으며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함께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로 26세에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인전(1921년)을 열어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나경석은 이러한 나혜석에게 천재적인 문학소질을 가진 최승구가 잘 어울리겠다고 짐작해 ‘생활과 예술을 함께 할 수 있는 배필’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스웨덴의 여성사상가 엘렌 케이가 규정했던 ‘연애의 이상’에도 꼭 들어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최승구와 나혜석은 동경 유학생 사회에서 최고의 커플이 되어 화제를 뿌린다.

그러나 최승구는 유부남이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결혼관 때문에 이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혼풍속은 본처는 고향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함께 따로 살림을 꾸리는 이중결혼의 양식을 취했다.

최승구의 숙부는 차라리 첩으로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혼은 안 된다며 크게 반대했고, 나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최승구는 가족의 이혼 반대로 유학비 지원이 끊기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끝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폐결핵이었다.

최승구의 죽음으로 비련의 여인 되어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5년 말 그의 형이 있던 전남 고흥으로 요양 가서 군수관사에 머문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나혜석과 매일 주고받던 편지도 뜸해졌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최승만(최승구의 사촌동생)은 나혜석에게 한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학기 중이던 나혜석은 어렵게 최승구를 찾아가 종일 그를 보살피다 학업 때문에 그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최승구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일본으로 돌아온 나혜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이없게도 최승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최승구가 떠나고 1년 뒤 수필 <회생한 소녀에게>를 발표해 그의 죽음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며,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환을 털어놓았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나혜석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녀를 비련의 여인으로 몰아넣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나경석의 소개로 김우영과 약혼을 한다. 김우영은 교토대 법학부를 나와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신여학교 3․1운동사건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으며, 황옥경부 폭탄사건 때 폭탄가방을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약혼한 상태에서 그녀는 춘원 이광수와도 가깝게 지낸다. 그 당시 이광수와의 연애담이 동경시내에 자자했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광수의 소설 <어린 벗에게>에서 ‘김일련’이란 이름으로 나혜석에 대한 부분이 나오지만, 한편에서는 YWCA에서 활동했던 김필례(전 수피아여고교장)라는 주장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만 아니라 뛰어난 글재주도 있어 문인들과 뭇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혼 여행길에 묘비를 세우다

▲ 최승구 시인이 사망한 후 결혼했던 김우영과 나혜석
ⓒ 네이버 <백호블로그>제공
김우영의 끈질긴 구애에 나혜석은 국내 최초로 일간지에 청첩광고를 내고 1920년 4월 정동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김우영은 본처와 사별하고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당대의 인습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것”, “어떤 경우에도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애인(최승구)의 묘지에 묘비를 세워줄 것”을 내걸어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이들 신혼부부가 찾은 곳은 최승구의 묘지였다. 나혜석은 옛 애인을 영원히 잊기 위해서라며 비석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김우영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또 다른 인물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황옥경부 폭탄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일본의 제의로 이들 부부는 유럽유학길에 오른다. 김우영은 베를린으로 법학공부를 하러 떠나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프랑스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공부를 하다 최린을 만나 사랑을 불태운다.

그러나 파리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귀국 후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나혜석은 시댁인 부산 동래에 머물게 되었으며,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여 딴살림을 차렸다. 시댁살이에 적응하지 못한 나혜석은 최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최린은 친구 권승렬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권승렬은 연회장에서 이를 발설했고 결국 남편 김우영이 알게 되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에 결국 결혼 10여년 만에 3남1녀를 두고, 그녀 나이 서른둘에 이혼도장을 찍어야했다.

▲ 나혜석의 작품 중 <인천풍경>
ⓒ 네이버 <백호블로그>제공

이혼 후 <이혼고백장>파문으로 비난

나혜석은 이혼하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던 최린의 말을 그대로 믿었지만, 이후 최린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홀로 된 나혜석은 아이들 때문에 멀리 떠날 수 없어 수원에 작업실 겸 미술교습소를 차려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하지만 생활은 몹시 궁핍했고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혀 냉대와 질시를 받는다. 그 즈음 김우영은 총독부 상공과장으로, 최린은 중추원 칙임참의로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1932)>을 연재하면서 파문을 일으킨다.

<이혼고백장>은 몇몇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그녀가 경성법원에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최린은 위자료를 주고 합의했으나, 나혜석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적 비난과 멸시뿐이었다.

이후 작품활동에 전념하면서 일본제국미술원 전람회와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는 기쁨도 잠시, 이 두 사건으로 고립되어 그녀의 외로움은 병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 무렵 큰아들을 폐렴으로 잃고, 일엽스님(동경유학친구 김일련)이 머물던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간다. 일엽스님은 그녀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했지만, 구속을 싫어했던 나혜석은 끝내 머리를 깎지 않았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1935년(40세) 나혜석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근처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 그리는 일에 무료함을 달래며, 가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정도 외에 별반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일엽스님과 김태신 화백(일엽의 아들)이 가끔 찾아주었으며 이따금 고암 이응노 화백이 들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로원 등을 떠돌다가, 1948년 12월 10일 길거리에서 객사체로 발견되었다. 파란의 그녀가 52세를 일기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다. 불행히도 행려병자로 화장되어 묘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의 마지막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독, 그 자체였다. 이혼 후 18년 동안 혼자였다. 큰아들이 죽고 3남매가 있었지만, 자식들은 그녀를 어머니가 아닌 탕녀로 여겼고 평생 그녀의 혈육임을 부정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관습에 당당히 도전한 근대 여권운동의 선구자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문화관광부에서는 이점을 높이 평가해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박인경 화백(고 이응노 화백부인)이다. 나혜석이 잠시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당시 보육원은 박인경 화백의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 보육원에 여류화가가 있으니 미대생으로서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는 외사촌 오빠의 말에 그곳을 찾아갔다고 한다.

박인경 화백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있었지만, 뒷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 회고했다. 그 이후, 거리에서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기까지 나혜석의 행보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랑했던 옛 연인 최승구의 묘지가 아니었을까?

▲ 최승구 시인이 묻혔던 고흥읍내 오리정공동묘지터. 70년대말 이전했고 지금은 시가지로 변했다.
ⓒ 최경필

그녀가 세운 비문은 무엇이었을까?

2004년 나혜석을 소재로 한 소설 《춘하추동》이 출간되었다. 작가 함정임 씨는 최승구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고흥을 들러 그가 마지막을 보낸 옛 고흥군수 관사터만 확인했다고 한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도 출간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접근한 것은 2000년에 출간된 이상경의 《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이다. 그 이전에는 미술평론가 이구열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나혜석일대기(1974)》가 출간되어 나혜석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을 처음으로 시도했었다.

이구열 씨가 출간할 당시는 나혜석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존해 있어 나혜석의 모습을 복원하는데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필자가 이구열 씨에게 확인한 결과 70년대 초반 고흥에서 최승구 시인의 묘지에 대한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시 최승구의 묘지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묘가 쓰러지고 묘비도 나뒹굴고 있다는 제보였다.

최승구 시인의 묘지는 현재 고흥중학교가 1979년에 옮겨오면서 운동장 건설과 읍내 입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외곽으로 이전되었다. 당시 연고묘지는 대부분 유족들에 의해 이장되었으며, 무연고 묘지만 고흥읍 등암리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묘지를 이전하기 전의 주월산 일대와 이전한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최승구 시인의 묘지와 묘비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임종을 지켰던 사촌동생 최승만(1984년 사망)이 묘비와 함께 그의 고향인 경기도 부근의 선산으로 이장했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최승만의 유족을 찾으면 최승구 시인의 묘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여러 군데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그의 부인이 6․25때 납북되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혜석은 과연 그 비석에 어떤 비문을 새겨넣었까. 필자의 상상으로 그려본다.

아! 사랑하는 님이여! 영원히 잊지 못할 님이여!
그대를 잠시 잊기 위해 여기 묘비를 쓰노니
훗날 저 하늘에서 만나거든
우리가 못다한 사랑 다시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노라.
편히 잠드시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뉴스라이프(6월호)와 미디어다음에도 송고했습니다.
최승구 시인의 사촌동생 고 최승만 전 이화여대부총장의 유족이나, 최 시인의 묘지이전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은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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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어용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세월호사건 후 큰 충격을 받아 사표를 내고 향토사 발굴 및 책쓰기를 하고 있으며,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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