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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지 못하는 배들은 나 같았다.
ⓒ 김종휘
때가 된 것 같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 걷자.

일을 중단하고 출발 날짜를 결심했다. 그 때부터 들썩이던 몸은 거짓말처럼 꿈쩍 하지 않았다. 체력 보강도 지도 점검도 배낭 준비도 다 허허로웠다. 일을 멈추기로 작정한 일 중독자의 눈앞에는 갑자기 광활하고 막막한 침묵의 사막이 펼쳐졌다.

미칠 것 같아서 술을 먹었다. 그럴수록 머리 혼자 부지런을 떨었다. 속으로 셈하고 밖으로 명분을 앞세우는 인간의 이중적 속성이거나, 행동에 앞서 의미부터 찾는 먹물 근성이거나, 길 떠난 적 없는 초보자의 옹알이 따위이거나. 잡념의 낱낱은 서로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돌면서 정신을 어질러 놓았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하나둘 내 몸뚱어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간단했다. 광대한 그늘 속의 달랑 한 점, 그것이 나였다. 나무 같은 손과 돌 같은 발을 가진 거인들의 서늘한 기운. 그들은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들의 웃음과 주먹다짐과 발길길이 시원하게 쏟아지면서 정적의 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 마음은 눕고 몸은 일어날 거야.

황안나. 남쪽 땅끝에서 북쪽 철책까지 홀로 묵묵히 걸었다. 그 작은 두 발로 이 땅 삼면의 해안선까지 꼼꼼 감싸듯 걸었다. 60년 넘게 아녀자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삶의 미로를 훌훌 바깥으로 터서 휑하니 튕겨나간 부끄럼 많은 할머니의 탄력은 경이롭고 찬란했다.

홍은택. 자전거를 타고 미국 대륙을 동에서 서로 6400㎞를 횡단했다. 바람 타고 온 소문처럼 어느새 서울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자전거 타고 복마전 같은 도심을 훑고 있다. 탄탄하고 탱탱하고 매끈한 자전거를 닮은 40대 아저씨의 쭉 뻗은 몸매와 알찬 체력은 눈부셨다. 넘볼 수 없었다.

김남희. 어느 날 불쑥 직장과 애인을 놔두고 길을 나섰다. 오로지 걸어서 세계를 만나는 여행길이 어느덧 십년 세월이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30대 여자가 혼자 걷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이 아가씨의 맑고 차가운 기운을 살짝만 스쳐도 제자리에서 몸서리를 칠 것 같았다.

김훈. 두 발로 바퀴를 밀어 몸 안에 길을 들이는 방식으로 이 땅의 산천과 들판과 해안을 주유했다. 그 체험을 빈곤한 언어로 겨우 썼다고 책을 냈다. 고될수록 윤이 나고 패할수록 빛이 나는 50대 후반 남자의 허무하고 부리부리한 눈을 보았다.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닫힌 수문을 열고 쏟아져 나가고 싶었다.
ⓒ 김종휘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 아내와 걸었다

방송국에서 잠깐씩 만났고 책을 통해서 다시 접한 이들 거인 앞에서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어 있었다. 그들의 두 발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먼지나 바퀴 자국 같은 행적을 쫓다가 김혜순의 시 '풍경중독자'를 떠올렸다.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

걷는 동안 몸 안으로 들어올 길과 풍경, 걷고 나서 마음 밖으로 나가있을 말과 언어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체코의 극작가 칼 카펙이 권한 '완전히 무용한 상태'를 동경했다. 무위와 명상에서 활력이 일어나는 것. 이를 두 발의 순례로 실천하며 인류 평화의 기운을 확장한 인물이 있다.

인도 자이나교 승려 출신의 사티쉬 쿠마르. 화석연료를 쓰는 교통수단이 지구에 가장 폭력적이라고, 소가 끄는 탈것 등 최소한의 폭력을 취하라고, 제일 좋기로는 두 발로 걷고 필요한 물건은 손수 등짐을 져 나르라고 권한 그는 인도에서 유럽과 미국까지 8000마일(약 13000㎞)을 걸었다.

명상과 염원의 걷기로는 그의 스승 간디를 빼놓을 수 없다. 직접 목도하기로는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가 있었다. 그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곳에 있었다. 저만치에서 꾸물꾸물 걷다가 스르륵 쓰러지고 흐들흐들 다시 일어나 걷는 그들. 눈물이 났었다.

안에서 수시로 뜨거운 것이 솟구쳐 걷는 사람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애달프게 감싸는 길을 안다. 불의와 고통을 껴안는 그 길에서도 선하고 환하게 웃는 '바람의 딸' 한비야처럼 나는 도저히 그렇게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잃어버린 전설에 이끌려 옛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 바다는 과연 저 멀리 있는 걸까.
ⓒ 김종휘
베르나르 올리비에. 61살에 떠난 실크로드 걷기는 3년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쉬엄쉬엄 이어졌다. 시리즈로 나온 그의 책들은 읽기도 전에 제목부터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걷는다>. 그는 '비행' 청소년들이 걷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이끄는 조직을 만들었다.

브루노 바우만. 유럽인 최초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걸었다. 고비 사막도 걸었다. 11년만에 다시 타클라마칸으로 간 그는 한 선배 탐험가가 실패한 가장 위험한 북쪽 코스와 가장 험난한 날씨를 택해서 또 걸었다. 그는 책에 썼다. 탐험(adventure)의 라틴어 어원은 도착(advenire), 자기에게 돌아옴이라고.

김재홍ㆍ송연. 김정호의 옛 지도를 알게 된 부부는 지워지고 감춰지고 간신히 살아남은 옛길을 걷기로 했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950리, 해남에서 한양으로 970리. 32일이란다. 부부는 애초 인도여행을 계획했다가 이 땅 옛길로 굽어드는 바람에 길 위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처럼 걸을 자신이 없었다. 사라진 거인의 전설은 많지만 좀체 한 곳에 진득하게 빠져 있지를 못하는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하나 황안나의 탄력, 홍은택의 몸매, 김남희의 기운, 김훈의 눈길을 갖고 싶은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고 사흘 뒤에 길 나섰다.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 아내와 걸었다.

'완전히 무용한 상태'를 누리는 시늉

돌아보면 나의 바바 여행은 칼 카펙보다는 버트란트 러셀이 칭송한 '완전히 무용한 상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무위보다는 한가함이고, 명상보다는 호기심이며, 순례보다는 관찰이었고, 나를 찾는 성찰보다는 나를 놀리는 재미였다. 그런 종류의 '완전히 무용한 상태'를 누리는 시늉이었다.

마침 나는 막 결혼을 한 뒤였고 아내와 한 약속이 있었다. 살면서 서로 헛된 기대 하지 말자고, 대신 한두 번은 제법 길게 온전히 같이 있기로. 그 때 아내는 일을 쉬면서 요가를 배우고 있었다. 나만 결심하면 되었다. 우리는 바닷길을 걷기로 했다. 왜 바닷길이냐고 물으면 딱히 답은 없지만 덧붙이면 이랬다.

우리가 서로를 유혹하고 헤어지고 화해했던 카페 이름이 'bar다'였다. 대안학교의 걸바(걸어서 바다까지)를 해본 우리는 내륙을 가로질러 마침내 바다에 당도하는 주말 드라마보다는 줄곧 바닷길을 걷는 일일 드라마가 편했다. 지루해지거나 아플 때까지 바다를 끼고 걷기로 했다. 나는 물이 좋았다.

'바바'라는 이름은 그렇게 소소하고 시시하게 나왔다. 줄곧 바닷길을 따라가면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바', 육지의 바깥에서 바깥으로만 걸으면서 '바바', 발바닥의 한 바닥부터 다른 바닥까지 옮겨야 한 걸음이니 '바바'.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바바 다녀올게, 바바!" 하고 말했다.

▲ 65일간 날씨는 자주 흐렸다.
ⓒ 김종휘
서울을 떠난 첫날이었다. 뉴스는 사상 최악의 슈퍼급 황사로 난리였다. 택시로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건너다 본 63빌딩은 흐릿한 형체로 서 있었다. 걷다가 집으로 왔다가 다시 내려가서 걷기를 다섯 차례 반복한 바바 여행은 첫날 서울의 황사처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돌발 상황의 연속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아내는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왔다. 몸무게 7kg, 1년6개월 추정. 달마시안과 셔틀랜드 쉽독의 믹스견이라고 우리 맘대로 추정해서 동물병원 기록에 코브라 독이라는 신종 혈통의 시조로 올라간 수컷. 신체 특징 호떡 목살. 붙인 이름 고미(gom). 이 개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하루 30㎞를 넘게 걸었던 처음 열흘 간, 고미는 밤만 되면 시체처럼 쓰러졌다. 비가 자주 와서 발에 습진이 생긴 고미는 마을을 가로지를 때마다 컹컹 짖어서 잠자는 동네 개들을 다 깨웠다. 그 때마다 업고 걸어야 했다. 배낭 두 개 중 하나는 사료였다. 중간에는 대도시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 막 깨어난 고미가 우리를 찾는다
ⓒ 김종휘
다른 돌발도 적잖았다. 얕잡아보고 건넌 하구는 우리를 후루룩 집어삼켰다. 몸과 배낭은 물론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까지 물에 빠졌다. 바로 서울에 올라와서 수리를 맡기고 여분의 디지털 카메라를 챙겨 다시 그곳에 왔다. 감기 몸살에 걸리거나 서로 다투곤 해서 김새는 일들이 제법 있었다.

기진맥진한 우리는 사진은 찍되 기록은 포기하기로 했다. 성가셨고 힘들었다. 덕분에 눈길 가는 대로 찍은 사진들에는 그곳 그때의 지명과 날짜가 없다. 아내와 나의 기억은 분분하다. 그냥 길이고, 그냥 바다고, 그냥 사람이고, 그냥 개고, 그냥 여행이고, 그냥 집이고, 그렇게 합의 봤다.

변명이지만 그 덕택에 이 글의 용도는 가벼워졌다. 해안선 걷기 여행의 눈요깃감이고, 보이는 대로 잠깐 생각해볼 세상 흔적이며, 해안선 따라 걷고 서고 먹고 쉬고 자고 일어난 이야기다. 내키는 독자라면 바다, 길, 사람, 개, 여행, 집 그리고 또 다른 무엇들을 직접 겪어볼 일이다.

바바 여행. 돌아보니 힘들었다. 재밌었다. 이 글은 딱 여기까지다.

30분 걷다가 문득 바다를 보고...

출발지는 동해 북쪽 끝 통일전망대가 아니라 그 아래 속초 해수욕장이었다. 굳이 북쪽 끝에서 출발해 뭣하랴 싶었다. 도착지는 서해 북쪽 끝 통일전망대가 아니라 그 한참 아래 안산 언저리였다. 더 올라가서 뭐하랴 싶었다. 해서 분단 철책선 아래로 삼면 바닷길을 끝에서 끝까지 남김없이 걸은 것이 아니었다.

비어 있고 빠져 있고 모자란 것, 이것이 우리의 바바 여행이었다. 미끈하게 쭉 뻗은 동해안은 첫 길이라 오기로 내쳐 걸었지만, 어질어질한 남해안은 걷기와 버스타기와 배타기를 오락가락 했고, 몸과 마음이 곰삭을 무렵에 굽어든 서해안은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반반 했다.

특히 서남해권 일대는 이 땅이 섬들의 나라임을 뼈저리게 일깨웠다. 전남 다도해권에만 1600여개의 섬들이 흩뿌려져 있다. 흑산도만 100여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다. 섬 여행은 지도 보고 내키는 대로 찍어서 걷고 나왔다. '되는 대로 걷는다'로 일관한 바바 여행은 우연과 변칙의 연속이었다.

다만 길 위에 있는 동안은 내내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몸은 발끝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부위마다 개별개별 깨어나 울부짖었다. 마음은 밑으로 모래 먼지 쌓이듯 차곡차곡 텁텁하게 가라앉았다. 중간에 서울에 올라오면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고 몸은 벌벌 떨었다. 걸으면서 바다를 보아야 현실감이 돌아왔다.

설치미술가 최정화는 나쁜 생각이 날 때마다 걷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자주 걷는다는 소문대로라면 얼마나 나쁜 생각이 자주 나는 걸까 궁금했다.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은 증오심이 생기면 용서의 마음이 들 때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온다고 책에 쓰여 있었다. 워낙 추우니까 조금 걷다가 금세 후회하고 돌아와서 빨리 화해를 했겠구나 짐작했다.

나는 바바 여행을 통해서 그런 성찰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려고 해보았지만 그보다는 몸 고되고 속 편한 길에 대해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는데 그게 바로 또 하나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수확이라면 30분 걷다가 문득 바다를 보고 1시간 걷다가 불쑥 바다를 만나는 바바 여행이 의외로 중독성이 크다는 것을 확인한 점이다.

여행 가방이 줄어드는 행복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좀머씨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적어도 사방 60㎞ 근방을 날마다 정신없이 걸어 다니는 좀머씨. 유별난 걷기 때문에 동네에서 그를 몰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또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는 그런 사내.

▲ 바다가 내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 김종휘
두터운 외투와 밀짚모자를 쓰고 텅 빈 배낭을 맨 채 지팡이를 들고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좀머씨는 동네 사람들의 추정대로라면 밀폐 공포증에 걸려 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어원에 따르면 '닫음'과 '고립'의 뜻을 가진 밀폐 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방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고 책에 쓰여 있다.

아마도 세상의 쳇바퀴를 돌리는 모든 소시민들이 좀머 아저씨고 좀머 아줌마일 것이다. 그들은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간 좀머씨처럼 애초에는 그 호수에서 걸어 나온 존재일지 모른다. 내가 보고 온 65일 동안의 바다 역시 내가 원래는 그곳에서 육지로 밀려온 축축한 생명일지 모르겠다는 영감을 줬다.

좀머씨가 유일하게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사람에게 건넸다는 그 말. 험악하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오직 걷기만 하는 그를 향해 자동차의 차창이 내려지고 운전석에 앉은 동네 사람이 빈말로 말한다. "어서 타시라니까요… 그러다 죽겠어요!" 그때 좀머씨가 소리 내서 대답했다는 유일한 그 말.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좀머씨는 외투와 장화를 신고 지팡이를 든 채 호수로 사라졌다. 수면에 뜬 밀짚모자는 어디론가 흘러갔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징병을 거부하고 캐나다로 도망치듯 이주한 기계 발명가 존 뮤어는 실명했다가 간신히 시력을 되찾은 뒤 바닷가를 따라 1600km를 혼자 걸으며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의 여행가방 목록.


브러시
수건
비누
갈아입을 속옷
번스 시집 사본
밀턴의 <실락원>
우드의 <식물학>
작은 신약성서
일기장
지도

다섯 번째 걷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바바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마지막 배낭에서는 많은 것들이 나왔다. 집에 왔다 갈 때마다 줄이고 또 줄였다고 좋아한 그 마지막 짐조차 풀어놓고 보니 방안 한 가득이었다. 몸에 걸친 것들을 빼고도 목록의 길이가 만만치 않았다.

여분의 안경 1
여분의 모자 1
여분의 손수건 1
여분의 팬티 1
여분의 양말 1
여분의 반바지 1
작은 썬크림통 1
작은 스킨병 1
일회용 칫솔 1
일회용 치약 1
우비 1
손전등 1
반창고 1
슬리퍼 1
작은 생수통 1
먹다 남은 빵 1
여분의 담배 1
여분의 디지털 카메라 1
디지털 카메라 충전기 2
휴대폰 충전기 1
다이어리 1
책 1
샤프 겸용 불펜 2
여분의 비닐봉지들
수북한 지도들


온전히 하루 이상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걷기를 조금씩 길게 거듭할수록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배낭 속 목록이 하나둘 줄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맛. 불필요하게 불었던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 보잘 것 없는 한 개라도 짐을 줄이면 몸과 마음은 환히 빛난다.

나의 거인들과 존 뮤어도 여행 가방이 줄어드는 행복을 즐겼을 것이다. 호수로 사라질 때 벗고 남기고 버릴 게 없었던 좀머씨처럼 빛나는 체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볍게 걷기 시작하면 될 것이다. 호숫가든 강가든 바닷가든,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홀가분하게, 거듭할수록 몸과 마음의 짐을 하나둘 줄이면서, 마음은 눕고 몸은 일어나는 걷기.

또 하루가 시작된다

안산 근처에서 바바 여행을 멈추고 집에 왔을 때 아내는 두 마리의 개와 살고 있었다. 4차부터 나는 혼자 걸었다. 아내는 3차를 마치고 서울에 남았고 유기견을 한 마리 더 데려왔다. 몸무게 5㎏. 7개월 추정. 다들 실키 테리어라 말하나 증명할 길 없는 수컷. 신체 특징 아줌마 뒷다리살. 붙인 이름 보기(bog).

▲ 아내는 걷는 내내 바다 같았다.
ⓒ 김종휘
요즘 일과는 이른 아침 발바닥을 핥아 나를 깨우는 보기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으로 시작한다. 가끔은 그 길로 동네 어귀를 벗어나면 곧바로 바다가 나올 것 같다. 언제쯤 보기를 데리고 또 바바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내 생애 첫 바바. 바닷가와 바깥과 바닥 구경 잘 했다. 잘 놀았다. 바바!

65일의 바바 여행.

듬쑥한 동해안, 걷기 21일.
어질어질한 남해안, 걷고 배타고 버스타기 25일.
곰삭은 서해안, 걷기와 자전거 타기 19일.


이 글에 실리는 사진들은 집에 있던 작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다. 대략 2000컷 정도 찍고 그 중에서 골랐다. 아내도 나도 있으니까 사용했지 평소에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인화된 사진은 찍을 당시의 느낌을 백분의 일도 담지 못했다. 덜고 더하고 빼고 붙이며 알아서 각색된 사진은 누구 탓도 아니다.

그래도 부족한 사진은 사진대로 제가 말하도록 그냥 놔두고 싶었다. 인생은 생략과 비약이 없는 과정이지만 만남의 기억은 축약과 강조의 편집이다. 그 간극을 뛰어넘는 길은 없지 싶다. 인생의 매 순간 부지런히 참여하는 것밖에, 일일이 손수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65일의 바바 여행이 남긴 기억들은 번번이 달라져서 지금은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다.

고미야.
발바닥 좀 그만 핥아라.
보기야.
침 좀 그만 발라라.
자갸!
자기가 데리고 나갈래?

또 하루가 시작된다.
쌀쌀한 새벽.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태그:#여행, #속초 해수욕장, #해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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