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지난 1991년 8월,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탱크 위에 올라가 성명을 읽고 있는 모습. 그는 러시아 국민에게 강경파의 중앙정부 장악에 저항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23일 향년 76세로 타계했다.

갑작스런 그의 타계 소식은 러시아 국민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간 옐친의 명복을 빌기에 앞서, 그의 죽음은 그들에게는 지난 암울했던 격동의 역사를 떠나보내는 순간이었다.

작년 2월 75번째 생일을 맞아 푸틴 대통령이 크렘린궁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축하파티를 열어줄 당시, 언론에서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루었다.

당시 '레바다-센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의 9%만이 옐친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고, 33%는 중립을, 그리고 55%가 부정적 혹은 아주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응답자의 70%는 옐친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옐친 전 대통령은 러시아 대격변기를 조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 그리고 러시아 민중들의 자유를 위해 전념을 다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부정부패, 국정혼란,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러시아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결국 옐친 전 대통령은 러시아인들에게 또다른 절망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자유의 투사, 그러나 러시아인에게 절망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가 후계자로 뽑은 푸틴 대통령이다. 옐친 전 대통령이 건네준 '소국 러시아'를 지난 7년만에 세계 정치-경제 대국으로 탈바꿈시켜놓은 푸틴 대통령이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성공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TV에 비쳐지는 옐친 전 대통령의 모습은 러시아인들에게 가슴 아팠던 90년대 격동기를 상징했다.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맞서 탱크 위로 올라가 민중들에게 연설했던 민주화의 투사 옐친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폭음과 각종 구설수로 해외에 우스갯거리가 된 옐친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떠났고 러시아인들은 과거를 잊고 싶어한다. 그들은 이제 옐친 전 대통령이 선물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맛보며 초강대국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옐친 전 대통령을 통해 러시아인들은 과거와 현재의 쇠사슬을 끊게 된 것이다.

▲ 옐친의 타계소식을 전하고 있는 러시아 국영채널 '베스티' 홈페이지.
옐친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에 대해 러시아 정계인사들은 그의 '민주화' '자유화' 투쟁에 높은 평가를 내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그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정부를 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는 용감한 민중의 지도자였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편, 옐친 대통령과 같은 사상을 가졌지만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려 했던 그와는 달리 진화적 관점으로 또 다른 격변기를 보냈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가장 먼저 옐친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우리 둘이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면서 국가는 위기에 빠졌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동의할 수 없었고, 우리의 운명은 서로 엇갈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그는 작년 2월 성대하게 치러진 옐친 대통령의 생일축하 파티에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했던 정치인이였다. 그만큼 옐친 대통령과의 불신과 갈등의 골은 깊었다. 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옐친의 미망인과 가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앙숙'의 죽음 애도한 고르바초프

▲ 고르바초프
한편, 옐친 집권시 그의 측근이었던 전현직 정치인사들은 모두 그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러시아의 자유'를 꼽았다.

"비자유국에서 자유국으로 변화시킨 옐친. (아나톨리 츄바이스 전 러시아 총리)"
"산소와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가져단 준 옐친. (이리나 하카마다 '우리의 선택당' 총수)"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 (블라디미르 지리노브스키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


한편, 겐나디 쥬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는 옐친의 타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옐친의 정치에 대해 좋게 평가할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쁜 점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짧게 공산당의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옐친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25일 치러질 것이라고 러시아 정부는 밝혔고, 푸틴 대통령은 이 날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하였다. 장례식은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에서 진행될 예정이고 러시아의 모든 방송사는 생중계로 방영할 예정이다.

'민주주의 영웅'-'부패한 권력자'... 평가 엇갈려

(모스크바=연합뉴스) 김병호 특파원 = '러시아 민주주의의 영웅', '부패하고 무능력한 권력자'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 만큼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국가 정상도 드물다.

그는 옛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집권 기간 내내 자신의 가족과 측근들의 부패로 비난에 시달려왔다. 거기다가 엄청난 주량으로 인해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집권 말년에는 무능한 국정을 운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옐친이 전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보수세력이 주도해 일으킨 쿠데타를 막는 과정에서였다.

옐친은 모스크바 시내에 도열해 있는 탱크 위에 올라가 러시아에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또다시 소련 시절로 회귀할 수 없다는 강력한 신념을 밝힘으로써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와 시장개혁의 기수로 불리기 시작했고, 마지막까지 소비에트연방 유지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실각시키며 소련 해체를 가져왔다.

옐친은 미국 등 서방 진영의 도움을 받아 사유화 등 개혁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의 초기 혼란 속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국유 자산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소수 기업인들만이 특혜를 누렸고, 초인플레이션에다 지하 음성자금이 활성화되면서 옐친의 개혁은 당초 목표로부터 멀어져갔다.

국가 자산을 불하받은 재벌들은 '올리가르흐'로 불리면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정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러시아는 심각한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패국가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옐친의 가족과 최측근 인사들을 포함하는 범위의 '옐친 패밀리'는 부패의 상징이기도 했다. 1996년 대선에서 옐친을 당선시킨 것도 올리가르흐들이 살포한 막대한 자금과 그들이 보유한 매스컴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옐친은 러시아를 구한 영웅에서 부패한 정치인으로 점차 퇴물 정치인으로 치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1994년부터 체첸 무장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서구로부터 인권 탄압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1998년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을 선언하는 등 러시아 경제가 또다시 수렁에 빠지면서 옐친의 시장경제 개혁도 온전하게 돌아가지 못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1995년, 1999년 대선에서 공산당에 의석수 1위 자리를 빼앗기면서 야당의 공격이 계속됐다. 이 와중에 1998~1999년 총리는 4명이나 교체하면서 정치적 혼란도 가중됐다.

결국 옐친은 199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1999년 8월 푸틴을 총리로 임명하며 그를 사실상 후계자로 삼기까지 옐친의 인기를 최저점을 달렸다. 많은 국민들은 옐친이 러시아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져왔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부패로 물든 옐친 패밀리의 전횡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이미 옐친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10%도 안됐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푸틴에게 권력을 조기에 승계하며 퇴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 2006년 3월 러시아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옐친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가장 실패한 국가 지도자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 그에 대한 지지율은 2%에 불과했다.

jaehon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태그:#옐친, #소련, #러시아, #푸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