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조승희씨가 보내온 동영상을 보도한 미국 NBC방송 홈페이지.
ⓒ MS NBC 홈페이지

"미국인들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험의 하나가 놀랍도록 구하기 쉬운 무기로 무장한 살인자들로부터 비롯된다….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막대한 인명손실과 참을 수 없는 손실을 야기하는 치명적인 무기에 대해 더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다."(<뉴욕타임즈> 2007년 4월 17일 사설)

"우리는 총기규제 옹호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총기 로비스트들의 영향력과 돈의 힘이 조만간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워싱턴포스트> 2007년 4월 18일 사설)


범인을 포함해 불과 2시간 여 동안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버지니아텍(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으로 미국 사회 전체는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다. 미국 사회가 이번 사건으로 받고 있는 충격의 크기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사건이라는 상징성과 마치 전자오락을 하듯 살인을 저지른 범죄의 잔혹성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이와 같은 끔찍하고 어이없는 총기사건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잇따르는 총기사고 원인을 개인적인 동기를 넘어서 볼 것을 요구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참사의 이면에는 미국의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총기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진보잡지인 <더네이션(The Nation)>의 존 니콜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고 자문하면서 그 이유는 "미국이 폭력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미국의 저명한 총기규제 시민단체인 브레디 캠페인(Brady Campaign)의 폴 헬름케 회장은 긴급성명을 통해 버지니아텍 총기사건의 자세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우리나라가 얼마나 무기를 구하기 쉬운 나라인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며, 총기규제의 시급성을 호소했다.

버지니아텍 사건을 보면서 미국의 시민단체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8년 전에 콜럼바인 고교의 충격과 이후 잇따르는 총기사고에도 미국 정부와 의회가 총기를 규제하기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총기규제관련법은 1994년 제정된 자동화기금지법이다. 2004년 이 법의 만료를 앞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 법을 갱신하겠다고 말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의회는 94년 이후 총기규제 관련법을 하나도 제정하지 않았다.

▲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에서 범인이 사용한 총과 동일한 글록19 권총.
ⓒ AFP·연합뉴스

자기방어를 넘어선 '총기확산'

작년 5월 버지니아 페어팩스 카운티에서는 미국의 총기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18세의 소년이 경찰서에서 2명의 경찰관을 총으로 사살한 일이다. 그런데 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이 소년의 집에서 최소 20정의 각종 총기류와 무려 2500발의 실탄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 무기면 2개 소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한 개인이나 가정의 자기방어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3개월 전에 이 소년은 9mm 권총으로 집에서 기르던 개를 죽였고, 친구와 함께 총을 들고 사진까지 찍었다. 그럼에도 이 소년의 아버지는 2주 후에 AK-47 소총을 새로 구매했다. 그리고 그 소총을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한 소년은 그 총을 들고 경찰서로 찾아가 2명의 경찰관을 죽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 수정헌법 제2조는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 총기 소유와 휴대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적 권리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현재 미국에는 약 3억정의 총이 전국에 퍼져있다. 1인당 1개꼴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총기문화는 이민과 서부개척으로 상징되는 건국과정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다. 공권력이 약했고 또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아,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일이다. 오늘날 미국 경찰의 무장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반 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미국의 공권력은 시민들의 삶 여기저기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럼에도 '총기문화'는 변하지 않고 있고, 또 바꾸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 그럴까?

▲ 총기규제를 가로막는 강력한 로비단체인 미국 총기협회(NRA). 사진은 <볼링 포 콜럼바인> 한 장면.
ⓒ 마이클 무어

"지금은 애도할 시간?"

버지니아텍 참사 직후, 부시 대통령은 ABC 방송 인터뷰에서 총기 정책에 대한 토론은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뉴욕시장 재직 당시에 총기규제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루디 줄리아니 공화당 대선 후보는 "주(州)에 맡기자"며 몸 사리는 모습이다.

민주당의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의 상원 지도자인 해리 레이드는 "지금은 가족과 희생자를 생각할 때이지 총기규제와 관련된 미래의 입법을 고민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중진의원인 에드워드 케네디 역시 "앞으로 생각해보자"며,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에서조차 총기규제를 주도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찰스 랭켈 하원의원은 총기옹호자들의 힘이 너무 막강해 총기규제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총기소유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법으로 이를 규제하기가 대단히 힘들다"고 강조했다. 총기규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주장하는 소수의 목소리와 힘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참고로 2007년 1월에 실시된 총기규제 관련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가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다. CNN은 버지니아텍 사건이 다시 총기규제 여론에 불을 지피겠지만, 이러한 여론은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총기규제' 주도는 정치적 자살 행위?

▲ 자동화기 금지법 등을 주도했던 민주당조차 최근 총기 규제에 소극적이다. 사진은 지난 2001년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당선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과 앨 고어 전 부통령.
ⓒ 힐러리 클린턴 홈페이지
이번 버지니아텍 참사가 강력한 총기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 대다수 미국 언론의 전망은 부정적이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례로 99년 콜럼바인 사건 직후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총기규제 법안을 강력하게 추진한 바 있는데, 이것이 2000년 대선 패배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이 선거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에 앞서 1990년을 전후해 총기사고가 빈발하자, 미 의회는 93년 브레디법과 94년 자동화기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안을 주도한 민주당은 9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12년동안 장악했던 의회 권력을 공화당에 넘겨주어야 했다. 선거 직후 클린턴 대통령은 총기업체들의 로비 때문에 패배했다고 한탄했고, 그 이후부터 민주당은 총기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기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성장한 미국의 총기문화는 미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매년 1억달러 정도를 로비자금으로 뿌리는 전미총기협회(NRA)가 가장 강력한 로비단체인 것에서 잘 드러나듯, 총기업체들과 이들이 고용한 로비스트의 힘은 미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성장한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전쟁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미국의 폭력적인 총기문화는 정치인들의 비호와 침묵 속에 역설적으로 총기소유를 정당화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되어온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총기문화는 마치 북한의 '총대사상'을 연상시키듯이, 미국에선 하나의 종교적·문화적 신념이 되고 말았다.

도마 위에 오른 미국 정치의 '책임성'

요즘 워싱턴 정가는 "지금은 애도의 시간"이라며, 총기규제를 요구하는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이다. 2008년 대선과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를 건드렸다간, NRA를 비롯한 총기보유 옹호 그룹들에게 '낙선' 대상으로 찍힐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대다수 언론 역시 이번 사건으로 총기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총기규제에는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위에서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등 일부 언론은 "해도 안 된다"는 체념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언론과 정치인들의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또 다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 수는 연평균 3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9.11 테러 사망자의 10배, 지난 4년간 이라크에서 죽은 미군수의 9배에 달한다. 미국인의 생명을 가장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미 상식이 된 위의 수치에 대해, 이제 워싱턴의 정치가들이 답을 내놓을 차례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가 '테러와의 전쟁' 및 이라크 전쟁에 쏟고 있는 노력의 수십 분의 1만이라도 총기규제에 투입한다면, 분명 미국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태그:#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총기규제, #볼링 포 콜럼바인, #NRA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