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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당시 교도관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을 담은 편지를 전달한 한재동씨.
ⓒ 이정환



이부영, 영등포교도소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범인 조작 사실을 적은 비밀편지 작성. 김정남, 비밀편지를 토대로 성명서 작성. 김승훈 신부, 광주민주항쟁 7주기 미사에서 성명 발표.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은폐 조작 사실이 세상에 폭로된 과정이다.

이 과정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의인' 네 명이 숨어 있다. 영등포교도소에 투옥 중이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한 한재동(60) 당시 교도관과 전직 교도관 전병용.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의 성명서를 수차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전달한 고영구 전 국정원장의 가족.

'박종철'의 진실은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움? 그랬다. 한재동. 최근에야 김정남씨의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란 책을 통해 처음 세상에 공개된 이름이다. 필자는 한씨를 은연 중에 '조력자'라 규정했다. 이부영씨와 맺은 '인연'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13일, 이러한 편견은 완전히 깨졌다.

그는 치밀하고 담대한 전사였다

- 편지를 받았을 때 두렵지 않았나요?
"겁? 안 났어요. 이미 목을 걸어부렀으니까."

이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씨는 이미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자신만의 의지로 혁명을 선택했고, 1979년부터 삭발과 함께 행동에 옮긴 사람이었다. 그것도 독재 정권의 '아가리'라 볼 수 있는 교도소에서. 한씨는 치밀하고 담대한 전사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실천은 2004년 말, 한씨가 서울구치소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어졌다.

과천경마공원 내 테니스장 관리실, 한씨가 몸담고 있는 일터에서 1987년 1월의 이야기부터 듣기로 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수감된 경찰들이 가족과 면회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진범이 아니다, 3명이 더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던 바로 그때였다.

- 선생님이 경찰들의 호소를 이부영씨에게 전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아냐, 아냐. 그게 아니고. 마침 괜찮은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이부영씨가 물어봤어요. 그런데 뭐 자세한 얘기를 아나?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는 정도 얘기만 해줬는데. 그때 당시 보안과 간부가 이부영씨랑 옛날부터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고문 경찰) 조사 과정에 입회도 하니까 자세하게 안단 말이여. 자기 당직날 밤에 이부영씨를 불러다가…, 자기가 밤에는 대장 아뇨? 불러다가 커피도 한 잔 주고 이 얘기 저 얘기하는 과정에서 그 얘기를 해준 거요. 자기도 (얘기가) 바깥으로 나갈 줄이야 몰랐겄지. 그러니까 이부영씨는 '야! 이거다, 이거' 속으로 그랬을 거 아뇨.

나야 이부영씨 온 날부터 들락거렸으니까. 그리고 간부들이 안 다니는 시간을 내가 잘 알잖아요. 그런 시간을 이용해서 내가 이부영씨한테 가는 거야, 항시. 어느 날 딱 갔는데 '야, 재동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종이하고 펜 좀 주라'하는 거요. 그래 몰래 갔다 줬죠.

그래, 이튿날 갔더니 이부영씨가 편지를 주더라고. '김정남씨에게 전해주라'면서. 그런데 그 때가 5·3인천 그것(1986년 5월 3일 야당이던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곳에서 노동자, 학생이 경찰과 충돌한 사건) 때문에 전부 다 잠수할 때 아녀. 잠수한 사람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전병용씨에게 줬죠. 우리끼리야 계속 연락하고, 한 번 만나면 '다음에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을 미리미리 다 해놓으니까. 전화는 불안한 요소잖아요. 다 도청될 테니까."

- 편지를 어떻게 운반했습니까?
"친한 직원이 아니면 복잡해져버리잖아요, 일이. 그러니까 우리는 평소에 직원들하고 무척이나 친해놔요. 욕을 안 먹도록 인간 관계를 맺어놔야 해요. 그래 '어이, 야! 나 얘기 좀 하고 갈게', 그 전에도 매일 그랬으니까. 그 친구는 '그런갑다' 하는 거지. 그리고 그 때가 추울 때니까 점퍼 소매 안에 볼펜과 종이를 딱 '찡겨서' 가는 거야. 창틀을 잡고 자연스럽게 얘기하면, 부영이 형이 빼가는 거지. 그리고 편지 써서 (소매를 가리키며) 또 여기로 넣어주고. 항상 근무복을 그대로 입고 출·퇴근했으니까 중간에서 샐 염려가 없잖아요."

"야, 재동아,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 "알았다"

ⓒ 이정환
- 엄청난 편지였습니다.
"이부영씨가 그러더라고요. '야, 재동아,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거야 뭐 별거 아니잖아요. '알았다'고. 그때 실제로 많이 죽어갔잖아요? 군사독재 시절인데 잘못 되면 뻔한 거 아뇨. 쟁쟁한 사람들도 죽어나가는 판에, 우리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이야 뭐, 쥐도 새도 모르게 갈 수 있는 거지."

-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겁 같은 건 안 나고. 오히려 스릴 있고 재미있지(웃음). 단지 불심검문 같은 거 걸려가지고 일이 잘못될까 걱정이었지. 큰 낭패잖아요. 뭐 겁이 나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 그 뒤로 곤란한 일을 겪지는 않았나요?
"치안본부에서 한 번 왔어요. 전병용씨 있는 데를 나보고 알려달라고. '한재동 당신한테 가면 알 수 있다더라' 그래요. 난 '뭔 소리냐? 한 번 만난 건 사실이지만, 그 뒤로는 만난 일 없다'고 오리발 내밀었지. 그럼 '전병용씨 만나게 되면 알려달라' '알았다' 하고 계속 만나는 거지(웃음). 그런데 혹시 미행할까 걱정되잖아요. 인자(이제) 내가 나갈 때는 항시 숨바꼭질, 버스로 갔다가 중간에서 내려 택시 타고 이런 식으로. 못 따라 오게끔, 그런 식으로 만났죠. 위험은 따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 사실 '두려웠다'는 말씀을 들을 줄 알고 왔습니다.
"뭐, 내가 그런 것 같고 거짓말할 것이 없잖아요. 내가 강심장이요, 강심장. (웃음) 떨리는 것 없었어요."

반골의 귀를 틔운 '씨알의 소리'

▲ 한재동씨는 과천경마공원 내 테니스장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 이정환
세상을 바꿀 편지를 전하면서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971년, 그러니까 한씨의 스물네살 시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씨는 자신을 '타고난 반골'이라 표현했다. 군대 고참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는가 하면, 교도관 일을 시작하자마자 윗사람들과 '한바탕'해서 3개월 만에 대전으로 쫓겨났던 청년 한재동. '반골'의 영혼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한 권의 책이었다.

"대전에서 같은 방 하숙생이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사왔더라고. 딱 보니까 입맛이 당기는 거야(웃음). 정기독자가 됐죠. 거기에서 광고하는 책들을 사서 보면서 인자 뭐랄까, 스스로 깨어난 거지. 거기에 또 이신범씨, 조영래 변호사가 형 받고 대전으로 왔어요. 대전교도소에 또 좌익수가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하고 시간날 때마다 가서 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동지'가 되기 시작했다. 이부영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같은 연유에서였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 "고생한다 얘기해주고, 바깥 얘기를 전해주며 이것저것 도와주는" 교도관에서 한씨는 멈추지 않는다.

"1979년 1월 1일에 목을 걸어부렸어요. 머리도 박박 깎아버리고. 그날부터 단단하게 각오한 거요. 그리고 박정희 정권 타도 모임에서 활동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터지고 나서 보니까, 그게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더라고."

유신 치하 최대 지하조직으로 알려진 남민전. 작년에는 사건 가담자 32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옥고를 치르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남민전에서 교도소 노조 구상까지

▲ 한재동씨는 "현재 일에 만족하고 있다"며 "체력 관리 차원에서도 테니스는 훌륭한 운동"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태권도, 유도, 검도 등에 능했다는 한씨는 테니스에서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보였다.
ⓒ 이정환
사건의 여파가 당시 한씨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미치지는 않았지만, 한씨의 행동은 '독재 타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교도관 노조 결성을 위해 동료 전병용씨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복지 향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그들이 높은 사람들에게 눈엣가시가 된 것은 당연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만다.

"교도소 간부가 근무복 문제로, 출근하던 교도관을 대걸레 봉으로 때려 부린 거요. 성질 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들고일어난 거지. 죽일 놈, 살릴 놈 난리가 났지. 소장 딱 와서 '공개 사과하라'하는데, 말을 안 들으니까 진정서를 작성했어요. 그러니까 전병용씨와 나를 보안과장이 부르더라고. '진정서 서명 취소시켜라' '우리는 못 하겄다'. 계속 설득하고…. 양주는 그 때 처음 마셔봤네(웃음).

나중에 하다하다 안 되니까, 때리고 맞은 사람만 처리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갖고 인자, 없는 걸로 한다 그래, 그렇게 끝난 줄 알았어요. 민주인사들 또 도와주고 해야 되니까, 우리도 그 정도로 끝냈어요. 그런데 6월 13일, 갑자기 한 20명을 20군데로 전출 보내는 거예요.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 충청도 사람은 강원도, 이런 식으로. 완전 객지로 보내는 것이니 그만두란 얘기요.

그런데 달랑 전출명령서 한 장만 주고 가라는 거예요. 전출 신고도 필요 없다고. 또 모이면 어떻게 할까봐. 그 때부터 싸움이 붙은 거요. 난 명령서 쫙쫙 찢어버리고. 소장실 앞에 모여 있는데, 간부들이 몰려온 거예요. '발령 났으면 그냥 갈 것이지'하면서 끌어내려고 하고, 우리도 다 운동한 사람들인데 강제로 끌려갈 사람이 누가 있냔 말이지. 와중에 전병용씨가 소장실에 들어간 거죠. 안에서 '와장창'하는 거예요. 들어갔더니 테이블이며 유리창이며 다 박살나고, 완전히 난리난 거야."

난리통에 남아 있던 6명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결국 절친한 동지였던 전병용씨 등 5명이 사표를 쓰고 나갔고,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버틴 한씨는 구속을 감수해야 했다. 한씨는 석방 후 행정소송을 걸었지만, 재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과 맞물려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1981년 10월,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한씨는 복직에 성공한다. 2년 반만의 복직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 한씨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이부영씨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보람? 찌끄러버리는 느낌이었어요"

- 결국 선생님 역할이 컸습니다. 6·29선언을 보면서 보람 같은…?
"(손사래를 치며) 그런 것 없었어요. 내 표현으로는 찬물을 '찌끄러버리는' 느낌이더라고. 1979년 때도 혁명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됐거든요? 그런데 김재규가 박정희 보내버린 거 아녀. 혁명 분위기가 쫙 가라앉아 버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김재규씨를 '의사'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오히려 혁명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린 사람이에요. 6·29도 마찬가지였잖아요? 탁 터지니까 조용해 불잖아요.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데…."

-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씀인가요?
"보람 같은 건…, 이걸 계기로 뭔가 이뤄지길 바랬지. 노는 날에는 현장에 데모하러 나가고 그랬는데, 그때 서울역 앞에도 있었어요. 당시 누군가 나서서 '(청)와대 앞으로'했으면…, 그랬으면 많이 죽었을 거야. 그래도 성공했을 거라고 봐요. 인파가 엄청났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람이 적게 죽고 그런 점도 있긴 한데. 결국 또 많이 죽었잖아요. 광주에서."

- 혹시 그 이후에 편지를 전한 사람이 선생님이란 말이 퍼지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알려질 턱이 없는데요. 뭐, 눈치챈 사람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세상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투쟁의 결의를 다졌던 <태백산맥>의 '하대치'처럼, 한씨의 싸움은 계속됐다.

"섭섭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지만..."

ⓒ 이정환
2004년 12월, 서울구치소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많은 민주인사들이 한씨의 '손길'을 거쳤다. 시국사범들의 단체 행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교도관들에게 "마구 밟히던" 김근태씨를 구하기도 했고, 출감한 공무원노조 사람들한테는 '고맙다'는 뜻의 저녁식사를 대접받기도 했다고 한다.

- 그동안 선생님의 행동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혹시 섭섭하지 않았나요?
"섭섭할 거야 뭐 있겄어요? 알아달라고 한 일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고. 내가 그런 일 했다고 해서 자랑할 건 없잖아요."

- 6월항쟁 20주년입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은 자기 권력과 이권을 따라다니는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서 진짜 국민들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어요. 자기들 이권만 챙기고 그럴 것이 아니라 진짜 국민 대다수를 위한, 약자를 위한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요."


태그:#87년 항쟁, #인터뷰, #교도관, #고문,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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