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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 <약수동 고개길> 캔버스에 유채, 83 x 64 cm, 1962년
ⓒ 김원

서울은 많은 화가들에게 삶의 둥지였고 사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란 감수성이 예민하여 그들이 바라보고 그린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대와 삶의 모습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이 그린 서울 모습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서울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김원(1912-1994) 화백은 설악산을 비롯해 전국의 명산을 많이 그린 화가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화구를 들고 산에 가서 직접 스케치를 할 정도로 현장에서의 작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생생한 현장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작품 오른쪽 산 위의 집과 공터를 세밀하게 표현했고, 길 가의 가로수 잎사귀도 나무에 따라 다른 색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화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은 멀리 보이는 산동네입니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동네지만, 당시에는 많은 실향민들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입니다.

김원 화백 역시 평양에서 내려온 실향민 화가였기에, 저 산동네에 살며 그리 멀지 않은 청계천과 을지로에서 장사를 하는 동향 친구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산동네를 바라볼 때 마다 가슴이 아련했는지, 그냥 아스라하게 표현했습니다.

▲ 김진명 <응암동 달동네> 캔버스에 유채, 65 x 51 cm, 1979년
ⓒ 김진명

70년대 대표적 달동네였던 은평구 응암동의 모습입니다. 길이 좁고 경사가 가파르지만,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사글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던 동네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은 여러 소설과 TV 연속극에 등장했고, 이들은 서울의 대표적 서민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동네 사람들은 누구보다 악착같이 세상을 살았고, 그래서 언덕길을 올라가는 아주머니는 팔을 힘차게 휘젓습니다.

김진명 화백 역시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 화가로 1967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화단정치'에 염증을 느낀 그는 국전을 떠났고, "외로운 곳에 눈을 돌려, 허세와 가식이 없는 참된 모습을 그리"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달동네를 그리면서 어두운 색보다는 밝은색이 많이 사용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이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 이림 <압구정동> 캔버스에 유채, 46 x 53 cm, 1978년
ⓒ 이림

시골에서 농민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오던 70년대, 서울에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제3한강교' 건너편에 있는 '영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압구정동, 논현동, 삼성동, 청담동 등을 '영동'이라 불렀고, 그래서 삼성동에 새로 지은 고등학교의 이름도 '영동고등학교'였습니다.

70년대 초중반까지만해도 압구정동에는 배밭 등 과수원이 널려져있었고, 위의 그림에서 처럼 기와집이나 슬레트 지붕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과수원을 갖고 농사짓던 있던 사람들이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졸부'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과수원 주인들은 농부의 옷을 입었지만 당시 최고급 담배이던 청자를 피며 복덕방을 드나들었습니다.

압구정동은 1973년 현대건설에서 대형호화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촌으로 변했는데, 이 과정에서 현대건설은 공무원들과 언론사 기자들에게 특혜분양을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 오용길 <충정교차로> 화선지에 수묵담채, 63.5 x 94 cm, 1982년
ⓒ 오용길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자들이 계속 강남으로 진출하자 회사들도 강남으로 근거지를 옮기기 시작했고, 강북지역은 발전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충정교차로 근처에는 번듯한 빌딩이나 사무실 대신 콘크리트 담 위 언덕 골목길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충정교차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울역 근처 고가도로 밑은 자동차나 손수레의 주차, 집없는 사람들의 잠자리 내지는 취객들의 소변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결국 80년대 중반부터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양분화 되는 현상이 점점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어둠침침한 교차로 아래부분을 강조함으로써, 강북지역의 어두운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손장섭 <달동네> 종이에 수채, 162 x 111 cm, 1987년
ⓒ 손장섭

80년대 후반이 되면서 강북지역의 달동네 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강북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상계동, 목동, 행당동, 도화동, 봉천동 등 많은 달동네에서 철거반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세입자들에게는 재개발로 인한 어떠한 혜택도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솟는 전세값을 마련할 길이 없는 세입자들은 "이제 또 어디로 가란 말이냐?"라며 거칠게 항의하고 투쟁했지만, 결국 그들은 또 다른 달동네로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이사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던 극빈층은 난지도의 쓰레기 더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 강행원 <난지도> 광목에 수묵 채색, 162 x 97 cm, 1991년
ⓒ 강행원

당시 난지도는 서울에서 수거되는 온갖 쓰레기가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달동네에서 쫓겨온 사람들은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람들은 판자집을 짓고, 재활용품을 수거해 삶을 살아갔습니다.

울퉁불퉁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칠백여 가구의 집단촌에 탁아소가 보이고 미장원과 개척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골목 이곳 저곳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골라낸 폐품덩이가 무질서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온갖 잡쓰레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주위에는 큼직하고 살찐 파리들이 양봉장의 벌떼보다 많아 얼굴에 부딪혀 걸어다니기가 불편한 정도다… (중략) 하루 열두시간 이상 먼지 속에서 일한 댓가가 고작 3천원 정도라는 주민의 말이 믿기 어려웠으나 이곳 사람들 만큼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이들의 처절한 여름살이는 분명 서울의 하늘 아래였다.
-강행원 <계간미술> 1985년 봄호(108-109쪽)


지금은 공원과 골프장이 들어선 난지도이지만, 불과 15년전만해도 난지도 이렇게 처절한 서민의 삶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 오치균 <신촌길>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194 x 112 cm, 1991년
ⓒ 오치균

강북지역이 그리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신촌에서 아현동쪽으로 가는 고개길인데, 이 근처의 건물과 교통난은 15년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대기오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졌고, 화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그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김호석 <역사의 행렬 1 - 죽음을 넘어 민주의 바다로> 부분, 1993년
ⓒ 김호석

1980~90년대의 서울 풍경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시위행렬입니다. 6.10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지만, 노태우 정권하에서도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많은 학생과 양심세력들은 저항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학교 1학년이던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 그리고 관계 기관들은 `우발적 사고`로 단정 지었고, 이에 화가 난 학생들과 민주화 세력들은 정권퇴진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생들이 정부에 항의하며 분신을 하는 가슴 아프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강경대 학생의 장례 행렬 장면을 김호석 화백이 대형화폭에 그린 작품의 일부인데, 당시 민주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장용근 <무제 2> 부분
ⓒ 장용근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을 통해 민주화가 이루어지지자, 우리나라 경제의 중심지인 서울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컴퓨터 산업의 발달로 인터넷과 휴대폰이 일상화되었고, 소비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려 IMF 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맞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울에는 단군 이래 최대로 많은 간판이 걸렸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 장용근 <무제 2> 디지탈 프린트, 2004년
ⓒ 장용근

이 작품은 신세대 화가가 컴퓨터로 만든 디지탈 프린트 작품인데, '정신없는 서울'의 모습을 잘 표현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정신이 없어질 서울'의 모습까지도 예견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울은 그림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렇게 매일 매일 현란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태그:#서울 그림, #약수동 고개길, #응암동 달동네, #신촌 고개길, #압구정동 배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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