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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의 SK경영관과 LG경영관, 이화여대 이화SK텔레콤관, 연세대 삼성관(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 김귀현

[장면 1] 고려대 LG-포스코 경영관 로비.
"오늘 수업 어디서 들어?"
"'이학수'에서 수업 듣고, '이명박'에서 스터디 하기로 했어."

[장면 2] 이화여대 정문 앞.
"오늘 진짜 바쁘다. 오전엔 SK 갔다가 오후에는 신세계랑 포스코 가야 해."


삼성 부회장 '이학수'에서 수업을 듣고, 전 서울시장 '이명박'에서 스터디를 한다? 하루에도 SK·신세계·포스코 등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을 몇 번씩 오간다?

현재 서울 시내 몇몇 대학은 건물과 강의실 이름에 기업이나 기부한 동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학수 강의실'과 '이명박 라운지'는 고려대학교에, 'SK관'·'신세계관'·'포스코관'은 이화여대에 실제로 존재한다.

1990년대부터 대학은 기업의 기부를 받는 대가로 해당 기업이나 기부자 이름을 건물명에 넣기 시작했다. 인재가 필요한 기업과 건물이 필요한 자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와 관련, 대학에서는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자본 유치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의견이 대세다.

그러나 "지성의 상징인 대학마저 기업과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기업의 기부가 서울 소재 일부 대학에 집중되고 '대규모 건물 증축'이라는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어 양극화를 심화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캠퍼스 곳곳에 박힌 대기업의 '고귀한 뜻'

▲ 고려대 LG-POSCO 경영관의 이명박 라운지, 이학수 강의실과 쿠쿠세미나실.
ⓒ 김귀현
▲ 고려대 LG-POSCO 경영관 전경.
ⓒ 김귀현
고려대 LG-포스코 경영관 로비에 들어서면 바로 아래층의 라운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라운지에는 푸른 카펫이 깔려있고 그 위에 테이블들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그 곳에서 그룹 스터디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채광이 좋고 인테리어도 잘돼 있어, 마치 미국 유명대학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 곳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라운지는 이명박 교우님(경영61·서울시장)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고귀한 뜻'으로 이뤄진 라운지다. 고개를 돌리면 '이학수 강의실'이 눈에 띈다. 이 곳 또한 이학수 삼성 부회장의 '고귀한 뜻'으로 이뤄진 곳이다.

이 건물의 모든 강의실과 세미나실엔 기부자와 기부 기업의 명칭이 붙어있다. 강신호(동아그룹 회장) 강의실은 물론, 압력 밥솥으로 유명한 쿠쿠홈시스의 이름을 딴 '쿠쿠세미나' 실도 있다.

이외에도 고려대에는 100주년 기념 삼성관, CJ인터내셔널하우스(기숙사), 동원 리더십 센터, MK 청산 문화관(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일본 회사 MK택시에서 기부) 등이 기업 지원으로 세워졌거나 건설되고 있다.

이외에 대학이 기업의 기부를 받아 건설한 대표적인 건물로는 서울대 LG 경영관과 SK 경영관, 연세대의 삼성관·대우관, 이화여대의 이화SK텔레콤관·이화포스코관·이화신세계관 등이 있다.

'큰손' 삼성 "중앙도서관? 지하캠퍼스? 우리에게 맡겨!"

▲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 학술정보관 공사 현장. 삼성 마크가 뚜렷하다.
ⓒ 김귀현
재계 1위 대기업답게 대학 기부에서도 단연 삼성이 앞선다. 삼성은 연세대의 '120주년 기념 학술정보관'과 이화여대 지하 캠퍼스인 '이화캠퍼스센터' 건설 공사비의 상당액을 기부했다.

삼성은 2008년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연세대의 새 중앙도서관인 '120주년 기념 학술정보관'에 300억원을 지원했다.

2005년 착공한 이 건물은 연건평 1만평에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로, 대학 측은 총공사비 450억 원 중 약 70%를 삼성에서 지원받았다. '총공사비의 50% 이상을 기부하면 해당 기부자의 이름을 따 건물명을 짓는다'는 내규에 따라 '삼성도서관'으로 명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은 이화여대에서 2007년 말 개소를 목표로 착공한 미래형 다목적 지하 캠퍼스 건설에 필요한 공사비 수백억원 중 상당 부분을 지원하기로 건립 초기에 약속했다. 이화여대 관계자는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삼성에서 상당 금액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이 캠퍼스는 2005년 기공 당시 '이화삼성캠퍼스센터(ESCC)'로 명명됐다가 현재는 공사장 안내판의 건물 명칭 위에 'ECC(이화캠퍼스센터)'라는 문구가 덧대어져 있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관계자는 "내부적인 사정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며 "'이화캠퍼스센터'도 아직 가칭이고 완공 후, 정식 명칭이 어떻게 결정될 지 아직 모른다"고 밝혔다.

▲ '이화캠퍼스센터'라고 덧붙인 공사 안내판.
ⓒ 김귀현
삼성은 이외에도 이화여대 기숙사 건물인 이화삼성글로벌타워를 건립했고, 이화삼성교육문화관 설립도 지원했다. 연세대에선 생활과학대 건물이 '삼성관'으로 명명됐다.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에는 약 4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원해 '100주년 기념 삼성관'이란 명칭을 얻었다.

또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씨가 미술관 건립 과정을 직접 자문한 서울대 정문 옆 미술관 공사에도 150억원을 기부했다. 이 미술관은 지난해 개관했다.

이처럼 삼성이 대학에 기부한 돈은 확인된 것만 850억원(연세대의 새 중앙도서관 300억원,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약 400억원, 서울대 150억원)대에 이른다. 액수가 밝혀지지 않은 연세대 삼성관과 이화캠퍼스센터에 지원된 금액까지 포함할 경우 10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다른 대기업도 100억원이 넘는 돈을 대학 신축 건물에 쾌척했다. SK는 이화SK텔레콤관 건립에 약 100억원을 기부했고, 신세계는 150억원을 들여 이화여대에 이화신세계관을 지었다. 포스코는 이화포스코관에 100억원을 지원했고, LG와 포스코는 각각 100억원씩 기부해 고려대 LG-포스코 경영관을 건립했다.

"새 건물이라 행복해요" vs "대학이 기업 홍보의 장인가"

▲ 고려대 백주년 기념 삼성관의 전경과 내부 모습.
ⓒ 김귀현
▲ 이화캠퍼스센터 공사 현장. 캠퍼스 대부분은 공사장이 됐다.
ⓒ 김귀현
건물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노재완(20)씨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 나쁠 건 없다고 본다"며 "동문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건물을 지어주었다는 생각에 긍지도 느낀다"고 전했다.

올해 이화여대를 졸업한 최미화(23)씨는 "새로 지은 건물은 강의실이 크고 깨끗하다"며 "4년 내내 '포스코관'과 '신세계관'을 입에 달고 사니 해당 기업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홍보효과가 확실하다고 느껴진다"고 전했다.

하지만 잦은 공사로 수업에 불편을 느낀다는 주장도 있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3학년 차예원(22)씨는 "기업에서 우리 학교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나쁘진 않다"며 "하지만 입학하고 지금까지 계속 공사만 한다, 공사 소음이 심해 강의실이 아닌 강당에서 수업을 하기도 한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현재 이화여대는 ECC 신축 공사 때문에 대부분의 길이 폐쇄됐다. 학생들은 공사장을 피해가는 전용 길로만 다녀야 해 불만을 사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대학까지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연세대를 졸업한 이원주(28)씨는 "기업명이 건물이름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그 기업에 대한 인상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대학이 기업 홍보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밝혔다.

고려대 사회학과 3학년 홍성희(23)씨는 "교육환경이 개선되는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기업으로서는 대학에 대한 일종의 투자이기 때문에 대부분 공대·경영대 등 돈이 되는 단과대학에 투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교육적 목적이라면 낙후한 학문과 분야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현재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며 "이 때문에 기초 학문을 하는 학생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는 의견을 밝혔다.

잘 나가는 대학, 돈이 되는 단과에만 기부

▲ 서울대 LG경영관의 내부 모습.
ⓒ 김귀현
기업의 건물 공사비 지원은 대학 재정 부담을 줄이는 한편 학생의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 등 긍정적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이런 건물들이 대체로 서울의 이른바 '명문대'에만 집중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 시내 대학 중 위에 언급한 대학을 제외하고 한양대, 성균관대, 중앙대 등에서는 기업명이 들어간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지방대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작 투자가 필요한 지방대학 등을 대기업이 철저히 소외시키고 있는 셈이다.

실제 기업이 지방대학에 지원한 경우는 LG가 구본무 회장 고향인 진주의 경상대 개척관에 지원한 것과 포항 포스텍(포항공대) LG상남관, 대전 충남대 KT&G농업생명공학관, 전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정도에 불과하다.

대기업들이 불꽃 튈 정도로 '화끈하게' 대학에 '기부금 경쟁'을 하지만, 정작 그 혜택을 받고 있는 대학은 이른바 '명문대'라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대외협력처 관계자는 "우리도 대기업들과 (기부와 관련해) 접촉은 하고 있지만, 좋은 답변을 듣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학교마다 나름의 서열이 있기 때문에, 기업에서 명문대 이외의 기부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의 한 사립대학 관계자는 "대기업이 명문대에 투자하는 액수의 10분의 1만 지방대에 투자해도 재정상황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현재 지방대학은 대부분 동문들의 기부금으로만 발전기금을 마련하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향토기업의 기부'에 대해 묻자 "대부분의 향토기업이 사정이 어렵다"며 "지방마다 여러 대학이 있기 때문에, 향토기업이 한 대학에만 기부하기는 지역 정서상 어렵다"고 답했다.

이어 "홍보 효과가 적은지 기업에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서 "기업들이 몇몇 명문대학에 대한 기부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교육 전반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여러 대학에 고루 발전 기회를 줬으면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 연세대 삼성관 전경. 생활과학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김귀현

태그:#교육, #대학, #재벌,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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