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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여름의 일이다. 전남 고흥에 갈 일이 생겼는데, 문득 떠오르는 지명이 ‘벌교’였다. 고흥군으로 가려면 보성군 벌교읍을 거쳐야 하는데, 목적지인 고흥보다 벌교가 더 또렷하게 머리 속에 각인된다.

▲ 벌교 초입에서 서쪽으로 나지막하게 보이는 부용산.
ⓒ 김동욱
나는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음반가게에 들러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샀다.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가수 안치환의 앨범 중 6~7년 전 발표된 ‘노스탤지어’ 앨범을 샀다.

벌교 사람들의 그저 뒷동산 ‘부용산’

안치환의 이 ‘노스탤지어’ 앨범에는 ‘부용산’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내가 그 많은 카세트테이프 중에서도 하필 6~7년 전에 발표된 카세트테이프를 산 이유는 순전히 ‘부용산’이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수 안치환이 부른 ‘부용산’이 벌교 읍내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안치환이 불렀던 ‘부용산’은 작사ㆍ작곡 미상의 ‘구전가요’였다. 물론 지금은 이 ‘부용산’의 작사가와 작곡가가 누군지 밝혀져 있다. 그리고 그 애절한 가사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 부용산 오르는 길에 잠시 숨을 고르고 내려다보면 벌교 읍내가 손에 잡힌다.
ⓒ 김동욱

부용산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원래 ‘부용산’은 1947년 목포 항도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안성현 선생이 자신의 제자 여학생이 요절하자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든 노래다. 그러나 부용산의 가사는 그 몇 해 전에 먼저 나온 시(詩)였다.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박기동 선생이 고향 벌교에서 어린 나이에 숨진 자신의 여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詩)가 바로 ‘부용산’이다.

▲ 부용산 정상을 향해 반쯤 올라가다 만나는 ‘부용산 오리길’ 표석.
ⓒ 김동욱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 당시 작곡자인 안성현씨가 월북하고, 한때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던 노래라 해서 그때부터 ‘부용산’은 금지곡 아닌 금지곡 취급을 당했다. 그 후 ‘부용산’은 당연히 ‘구전가요’로만 남아 호남지방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부용산’은 근대판 ‘제망매가(祭亡妹歌=신라시대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추모하며 지은 10구체 향가)’에 다름 아니었으나 당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숨겨진 노래’가 돼 버린 셈이다.

부용산은 월북 시인이 숨어 부른 ‘제망매가’

호남고속도로 송광사나들목을 나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주암호를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서 27번 국도를 따라 1시간 가량 달리자 벌교 초입이다. 벌교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홍교 시계탑과 그 왼쪽의 ‘홍교(虹橋=무지개 다리)’가 눈에 띈다. 홍교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벌교 사투리로 ‘횡곗다리’라는 이름으로 잘 묘사돼 있다.

▲ 시멘트 산길 좌우에 보이는 게 차밭인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없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 김동욱

이 홍교 위에서 시계탑 방향으로 마을 뒤편에 보이는 산이 바로 부용산이다. 따라서 기실 부용산은, ‘웅장함’이라던가 ‘빼어난 아름다움’과 같은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그저 마을의 작은 뒷동산일 뿐이다. 실제로 지금은 산 정상 부근에 체육공원이 있어 벌교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이 산이 부용산이라는 걸 알고 있지는 않았다. 벌교에 도착하자마자 홍교 시계탑 아래에서 과일 좌판을 벌여놓은, 40~50대 아주머니 한 분에게 물었다.

▲ 벌교 무지개다리(홍교). 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진,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지주집에서 빼앗은 쌀을 쌓았던 곳이다.
ⓒ 김동욱

“여기 부용산 용연사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요?”

그냥 막연히 부용산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그 아주머니가 혹시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부용산에 있는 절 이름을 슬쩍 끼워 넣었다.

“아~, 절에 가실라고. 이짝 길로 가시다 보면 핵교(학교)가 나오는디, 거서 오른짝으로 절 올라가는 길이 있어라.”

과일 파는 아주머니의 손가락을 따라 홍교 시계탑을 왼쪽에 두고 집들 사이로 난, 흡사 골목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낮은 기와집들 사이를 빠져 나오자 제법 넓은 길과 만나고 오른쪽에 ‘벌교 여자중학교’, 맞은편에 ‘벌교 초등학교’가 보인다. 벌교 여자중학교를 끼고 우회전, 꼬불꼬불 언덕을 오르자 산길이 갈리면서 ‘부용산 오리길’이라고 적힌 표석이 보인다.

▲ 벌교 초입에 세워져 있는 홍교 시계탑.
ⓒ 김동욱

여기서 표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왼쪽으로 오른다. 시멘트 포장된 산길을 따라 300~400m 정도 올라가면 방 두세 간과 대웅전만 덩그러니 있는 ‘용연사’에 닿는다.
용연사까지 올라가는 시멘트길 좌우에는 작은 차밭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관리를 하는 사람이 없는 지, 아니면 관리가 게으른지 차나무는 거의 잡풀에 묻혀있다.

내가 부용산을 찾았던 날은 오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어서 시(詩)가 노래한 ‘부용산 오리길 하늘’은 푸르지 않았다.

이제는 불러서 흘러 보낼 노래, 부용산

▲ 벌교 역전에는 매일 새벽 ‘생물시장’이라고 불리는 장이 선다. 막 들어온 배에서 내린 생선을 팔고 있는 노점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한데 엉겨 벌교의 새벽이 시끌벅적하게 열린다.
ⓒ 김동욱

구전가요 ‘부용산’의 가사는 원래 1절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1999년 5월 목포 뉴프린스 레스토랑(지금도 이 레스토랑이 있는 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씨 초청 음악회에서 ‘부용산’이 2절까지 불려졌다.

송광선씨가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부용산’의 2절을 아쉬워했고, 당시 한국일보의 주선으로 지난 1993년 호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작시자 박기동 선생이 2절을 지어 보냈다고 한다(1999년 6월 3일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참조했음).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해방 후 우리나라 근현대를 관통해온 큰 물결은 이데올로기의 대하(大河)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어느 누구도 이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3~4년 동안 구전가요 ‘부용산’은 ‘작시 박기동ㆍ작곡 안성현’으로 다시 태어나 원래의 제망매가(祭亡妹歌), 혹은 제망제가(祭亡弟歌)로 불리고 있다.

▲ 부용교. 일제시대 건설된 다리로, 원래 이름인 부용교 대신 친일이름인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낡아서 사람만 걸어 다닐 수 있다.
ⓒ 김동욱

대중가요란 원래 한때 널리 불리다가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잊혀지기도 하고, 어떤 계기로 인해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부용산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대중가요다. 전혀 붉을 이유가 없는 노래 ‘부용산’은 그럴수록 그 생명력은 끈질겨 아직도 남아서 불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부용산’에 씌워진 붉은 색 덧칠을 벗겨내고 대중가요로 불려지다 흘러가게 두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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