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해할 수 없어요" 호주의 경제 석학 로스 가노 교수. 그는 "한국이 왜 이런 식으로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윤여문
"한국은 국제관행에 따른 일반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해야 합니다. 절대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미국·캐나다·멕시코)과 같은 FTA를 하면 안됩니다. 그 이전에, 나는 왜 한국이 이런 식으로 미국과 FTA를 추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호주 최고의 경제석학으로 꼽히는 호주국립대학 로스 가노 교수의 말이다. 그는 무슨 근거로, 한국정부가 펼쳐보이는 한미 FTA의 장밋빛 전망을 통째로 부정하는 걸까?

"자유무역은 찬성하지만 FTA는 반대"

로스 가노 교수는 그동안 자유무역(Free Trade) 옹호론을 강하게 펼쳐온 학자다. 경제 강대국들이 기본적인 룰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자유무역체제는 역류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국제사회의 자유무역 발전과정을 짧게 요약한 자료를 인용해본다. 가노 교수가 FTA에 강한 의구심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뒤, 1998년 5월 제네바 2차 각료회의에서 무역자유화를 위한 뉴라운드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고, 이듬해 12월에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거쳐 2001년 11월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열린 제4차 각료회의에서 합의된 다자간 무역협상이 도하개발어젠다(DDA. Doha Development Agenda)다.

가노 교수는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WTO와 DDA만 잘 활용하면 충분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무역(Free Trade)이면 됐지,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이 왜 필요한가?"라면서 목청을 높인다.

FT와 FTA의 문자적 외형은 글자 한 자의 차이 뿐이지만, 실제적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WTO와 DDA를 포괄하는 FT가 다자간 협정인 반면에 FTA는 양자간 협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노 교수는 왜 FTA 반대론자가 됐을까? 그 이유를 들어봤다.

▲ 지난 2004년 5월 8일 미국과 호주의 협상 대표들이 미국-호주 FTA협정 조인식이 끝난뒤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FTA는 오직 미국만을 위한 괴물"

"자유무역 시스템으로 이득을 보는 측은 경제선진국들이다. 그러나 이미 지구촌화 된 시대에 높은 무역장벽을 고집하는 게 불가능해서 WTO와 DDA가 출범했다면, 경제선진국들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 FT 대신 FTA을 고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말할 나위 없이, 다국적 기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자국기업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국가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미국이 그토록 그악스럽게 매달리는 FTA는 자유무역의 근간인 WTO나 DDA마저 무력화시키는 괴물이다. 호주, 한국 등을 상대로 고집스럽게 FTA를 밀고 나가는 미국의 뻔뻔스러움이 볼썽사납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도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미국의 속셈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WTO나 DDA로는 챙기기 어려운 이익까지 FTA를 활용해서 철저하게 챙기겠다는 전형적인 욕심쟁이의 심보다. 미국이 FTA를 체결하기 위해서 애쓰는 나라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FTA는 양자간 합의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양자가 아닌 제3국에는 차별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한국과 미국이 자동차 부문 협상을 벌여서 한국에 유리한 결론을 얻었다고 치자. 그건 곧바로 호주라는 제3국 자동차 수출국을 소외(차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논리를 호주-미국 FTA에 적용하면, 한국이 바로 차별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걸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호주는 FTA의 패자다"

호주는 미국의 대표적인 동맹국가다. 최근 이라크전쟁 발발 4주년을 맞아, 전 지구적인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또 하나의 축인 영국이 발을 빼버린 상황인데도 말이다.

두 나라의 관계가 이 정도라면, 2005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호주-미국 자유무역협정(AUSFTA) 또한 장밋빛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가노 교수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호주-미국 FTA에서 분명히 주고받은 게(give and take) 있을 텐데 무엇을 주고받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호주당국을 조롱이나 하듯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호주는 다 주었지만 얻은 게 없고 미국만 몽땅 챙겼다(Australia took nothing, USA took everything). 게다가 정치적 흥정의 징후까지 보여서 불쾌하다. 오죽하면 존 하워드 총리의 최대 지지그룹인 농민단체들이 그토록 호주-미국 FTA를 반대하면서 속앓이를 했겠느냐?"

그는 서가에서 호주-미국 FTA 책자를 꺼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주었다.

▲ 로스 가노 교수가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입구.
ⓒ 윤여문
호주-미국 FTA 협상 과정 요약

호주-미국 FTA는 1992년 미국이 먼저 제안했다. 그러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오자 호주 측에서 멈칫거리다가 200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협상을 개시하여 2004년 2월에 타결됐다.

미국이 협상을 지연시킨 기간도 있었다. 호주산 농산물수입에 대한 미국 농가의 피해가 예상되자 미국이 돌연 협상을 중단한 것. 그러다가 이라크전쟁의 동맹국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호주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자 비로소 협상이 재개됐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바로 이 대목이 한국 협상대표들이 챙겨야할 몫이다)

그후 호주는 가격조건에서 유리한 호주산 농축산물을 미국시장에 더 많이 팔기 위해서 협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협상결렬을 선언하려 하자 미국에게 대폭 양보하여 협상을 타결시켰다.

특히 호주측은 미국의 설탕시장에 대한 보호조치를 인정, 쿼터와 관세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대신 제약부문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인정받았다. 농업부문 협상의 최대관건이었던 설탕의 무관세 수출이 저지된 것.


그 결과 호주의 설탕업계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호주 측 협상대표였던 마크 베일 통상장관(농민이익을 대변하는 국민당 소속)은 "호주에 큰 이익이 되는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큰 틀에서 보면 결코 호주에 불리한 협상은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로스 가노 교수는 "호주의 농민출신 다운 순진한 발상"이라면서 "그렇다면 왜 양국 협상대표의 선에서 타결하지 못하고 부시 대통령과 하워드 총리가 전화통화를 통해서 최종합의를 했느냐?"고 반문했다. 문득 한국과 미국 대통령의 전화통화 모습이 그려졌다.

"호주-미국 FTA는 정치적 타결이었다"

잠시 호주-미국 FTA 타결 시점을 되돌아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 있다. 2004년 10월에 실시된 호주총선과 11월에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가 한 달 사이로 맞물려 있었던 것.

그런데 오비이락 격으로, 바로 그 시점에서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던 호주-미국 FTA협상이 갑자기 졸속으로 바뀌었다. 하워드 총리와 부시 대통령이 선거를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기 위해서 호주-미국 FTA를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연유로 호주 미국간의 FTA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가장 큰 쟁점이 됐던 부분은 모두 피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나라 모두 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했기 때문인데, 이를 두고 호주언론은 '반쪽짜리 FTA'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런 현상에 대해서 마크 레이썸 전 노동당 당수는 "협상의 와중에 미국 대통령선거를 의식해서 하워드 총리가 부시 대통령에게 선물한 꼴"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호주 측 협상대표단의 얘기는 다르다. "협상과정에서 최대한 정보를 공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주장하면서 "의료비 보조제도인 PBS를 협상하면서, 기업과 사회단체, 학계 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문을 받았으며 자문에 참가한 집단도 약 350개에 이른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이어서 "특히 웹사이트에 AUSFTA 페이지를 별도로 운영해서, 방대한 양의 언론자료, 보고서, FAQ 등을 게재하였으며 뉴스레터를 운영하면서 1270건의 질의자료에 응신했다"고 강변했다.

"정부 제소권 제외해야" 가노 교수는 호주-미국 FTA에서 투자자-정부 제소권을 제외시킨 것이 유일한 소득이라고 말했다.
ⓒ 윤여문
호주는 어떻게 투자자-정부제소권을 제외시켰나?

미국이 다른 나라와 FTA를 체결하면서 고집스럽게 양보하지 않는 조항이 투자자-정부 제소권(investor-state claim)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조가 바로 그 조항이다.

투자자-정부 제소권은 해외투자자(예를 들면 론스타 같은 미국의 다국적기업)가 상대국가에서 특별한 사유로 손해를 입었을 때(예를 들면 환경단체의 반대로 사업을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상대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 조항이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해외 투자자가 사업을 포기했을 경우, 향후에 발생이 예상되는 이윤까지 손해로 계산하여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 이렇듯 위험천만한 투자자-정부 제소권 조항이 한-미 FTA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조항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가노 교수에게 이 조항에 대한 의견을 여러 번 물어보았다. 아울러 호주정부가 어떻게 이 조항을 제외시켰는지도 함께 질문했다.

"나도 처음에 그 조항 얘기를 전해 듣고 귀를 의심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조항"이라면서 "호주가 미국과의 FTA에서 얻은 게 없다(nothing)고 말했는데, 아마 그게 유일하게 얻은 소득(something)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가노 교수는 이어서 "나중에 알아보니, 호주의 상원의원 한 분이 투자자-정부 제소권이 독소조항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동료의원들과 협상단 대표를 설득해서 관철시켰더라"면서 "그 상원의원이 '호주는 국내외적으로 성숙한 법집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조항이 필요 없다'고 미국대표를 설득했다는데, 그럼 다른 나라들은 뭐냐?"면서 웃었다.

가노 교수는 "투자자-정부 제소권이야 말로 미국이 어떤 목적을 갖고 FTA에 임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면서 "사실상 그 조항이 호주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의회는 쉽게 통과, 호주의회는 난항 거듭

호주-미국 FTA는 두 나라 의회에서 비준을 받는 과정에서도 명암이 크게 엇갈렸다. 진통을 겪은 호주와는 달리 미국의회가 협상타결 직후 바로 비준한 것. 이 소식을 접한 하워드 총리는 ABC라디오와 가진 인터뷰에서 "호주의회도 비준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면서 야당인 노동당의 협조를 촉구했다.

반면에, 그 당시 노동당 리더였던 마크 레이썸 전 당수는 "미국이야 몽땅 챙겼으니 의회가 쉽게 비준해 주었겠지만, 호주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 신중하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상원이 준비하고 있는 이번 FTA 관련 자체평가보고서를 살펴본 후 비준여부에 대한 당내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인 바 있는데, 결국 호주-미국 FTA는 호주 상원에서 두 번 부결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은 끝에 의회 회기를 하루 남겨놓고 비준됐다. 그나마 연방 총선일자 등을 고려한 고육지책의 비준이었다.

결국 호주-미국 FTA는 2004년 말에 비준되어 2005년 1월 1일에 효력이 발효되기 시작했다. 그후 2년 남짓 지난 현재, 호주국민의 반응은 "크게 얻은 것도 크게 잃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 가노 교수는 "관세인하의 효과는 결코 소비자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의 비관세 장벽은 거의 낮아지지 않은 반면, 호주는 비관세 장벽 및 지재권분야에서 많은 양보를 했다는 점"이라며 호주-미국 FTA 2년을 회고했다.

로스 가노 교수는 누구인가?

ⓒ 윤여문
호주가 한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보브 호크 전 총리의 경제수석고문이었던 로스 가노 교수가 '호주와 동북아시아의 융성'이라는 제목의 <가노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보고서는 이후 호주당국이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한 경제정책과 교육정책을 추진하는 큰 줄기가 됐다. 보고서의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호주는 오랜 유럽배경을 갖고 있지만 동북아시아와의 국제적인 상호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호주는 중간강대국으로서 국제적 힘의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정책을 통해 상호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2. 호주의 무역정책은 개방적이며 무차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하고 쌍무적 지역적 다각적인 협상을 해나가야 한다. 이에 따라 호주는 동북아시아와의 관계를 담당할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

3. 호주는 융통성 있는 국제화를 통해 이들 지역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교육 분야의 세부 건의사항으로 모든 호주학생들에게 동양의 역사 지리 경제 정치 문화를 교육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또한 <가노 보고서>는 2000년까지 모든 중고등학교는 최소한 하나의 아시아언어를 가르치도록 했는데, 특히 일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순으로 추천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한국어는 6개의 주요 국가언어(스페인어와 러시아어 포함)에 속해 이미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또한 세계 최초로 한국어가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시험(HSC)의 선택과목으로 채택됐다. 고등학교 한국어교육은 대학의 한국학과 개설로 이어져 호주에서 한국학 붐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로스 가노교수는 1989년 호주-중국 간의 외교관계가 재개된 후, 첫 번째 중국대사를 역임한 바 있고, 지금은 호주국립대(ANU) 교수와 아시아태평양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 연방의회 상하 양원의 경제자문역을 맡고 있다.

태그:#FTA, #호주, #가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