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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이 전국 법원순시 일정의 마지막 방문지인 서울고법ㆍ중앙지법을 방문한 뒤 법원을 떠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프랑스 혁명 때다. 완벽한 공평무사를 표방했던 로베스 피에르가 집권하던 시기, 에베르가 주도했던 극좌파는 반혁명 혐의자에 대한 간주 규정을 담은 '혐의자법'을 제정했다. 이중에는 "자기의 생활수단이나 시민의 의무 이행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자"까지 포함됐다. 혁명재판소는 이 법을 근거로 리옹시에서만 1793년 12월부터 1794년 2월 초까지 무려 1667명이나 총살했다.

정영진 부장판사의 기고문을 읽었다. 정 판사는 대법원장의 과거 의혹에 대한 필자의 판단을 물었다. 그러나 질문 자체가 전혀 상식에 근거 두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필자는 정 판사가 제기하는 대법원장의 과거 의혹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단순 언론보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 점은 정 판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정 판사는 '의혹'이 있고 국민이 '불신'하기 때문에 대법원장 스스로 "거취를 결단함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의혹' 자체에 근거가 부족하고 따라서 '불신' 자체의 근거가 흔들린다면, 어떻게 '결단'을 강요할 수 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순간 프랑스의 '혐의자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또한 법률가들이 늘상 얘기하는 '국민정서법'의 실정법화를 목도한다.

필자는 대법원장의 '도덕성'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해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 판사가 주장하는 탄핵소추에 있어 위법이 아닌 '도덕성'은 결코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헌법정신이다.

그러나 '도덕적 우위'를 지닌 자만이 사법부를 맡을 수 있다는 정 판사의 사고는 참으로 위험하다. '법'과 '도덕'의 분리, '도덕'과 '정치'의 분리는 근대 법치국가의 출발에 해당한다. 정 판사가 서 있는 사법권의 독립과 근대법 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정 판사는 어느 순간 '법과 도덕의 일치'를 꿈꾼다. 근대 이전을 갈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왕정시대의 사고방식이다.

의혹에 대한 불신을 근거로 결단을 촉구했다면, 탄핵 또한 의혹을 근거삼아 요청함이 옳았다. 결단의 근거는 불신이고, 불신의 근거는 의혹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단하지 않기 때문에 탄핵을 주장하면서, 그 탄핵의 근거는 제법 엉뚱하게도 '위법한' 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승진인사를 든다. 그 모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법과 도덕의 일치‘... 왕정시대의 사고방식

정 판사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다소 '혼란'스러운 글은, 굳이 가닥을 정리해보자면 크게 네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필자가 '사법개혁'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묻고 있다. 둘째는 기존의 주장대로 고등부장 승진인사가 위법이며, 탄핵소추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세째는 대법원장의 과거 의혹에 대한 필자의 판단을 물었다. 네째는 자신의 기존 주장이 '선전선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중 세째 질문에 대해서는 충분한 답변이 됐을 것이다.

필자는 정 판사의 글에서 그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사법개혁'에 대한 한 점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기성 사법권력을 철저히 비판해왔다. 변호사들의 직역 이기주의, 용납할 수 없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필자를 포함한 변호사 출신이 11명이나 있어 변호사의 이익을 해치는 사법개혁 법안들이 훼손됐다는 식의 '악의적 문구'가 곳곳에 숨어있지만, 이 점은 논쟁을 진흙탕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과감히 무시하겠다.)

▲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법관의 관료주의, 재심제도가 있다는 이유로 결코 과거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법원의 태도 등은 늘 상임위나 국감장이나 인사청문회장에서 단골로 주장했던 메뉴이다. 특히 '사법개혁'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정 판사의 물음은 어처구니없기까지 하다.

정 판사는 그렇게 묻기 전에 한번이라도 필자의 발언록을 확인했어야 했다. 서울중앙지법이나 대법원 국감 때, 대법관 인사청문회 때, 그리고 사법개혁 법안 심사 때마다 도대체 정 판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필자는 정 판사가 '사법개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확신한다.

정 판사는 필자에게 사법개혁을 주문하기에 앞서 한나라당의 '사학법'과 사법개혁 법안의 연계에 대한 잘못을 먼저 지적해주었더라면 고마웠겠다. 참고로 필자는 과거 정보기관이나 경찰과 검찰의 인권유린과 관련해 그 책임의 절반은 법원에 있다고 늘상 주장해왔음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정 판사는 여전히 탄핵소추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고등법원 인사 실시가 '위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승진인사가 아닌, 전보인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정 판사도 인정한다. 그래서 정 판사도 '사실상의 승진인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차라리 고등부장 직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옳았다. '위법'의 문제가 아니라 '부당'한 운용의 문제였음을 왜 구태여 외면하는 걸까.

사실상 승진제도로 운용되는 관행을 제도적으로 개선하고 고등법원장이 언제든지 평판사로 일할 수 있고, 고등부장이 지법부장으로 일할 수 있으며, 부장판사들도 언제라도 평판사로 일할 수 있도록 하자. 나부터도 부장판사에서 배석판사로 발령나면 직급제의 취지에 합당한 일이기 때문에 좌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신성한 재판업무에 성실히 종사할 생각이다. 이렇게 주장했더라면 그때 비로소 정 판사의 주장은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정 판사의 주장이 논리적 근거를 상실한 '또 다른 수단의 정치'이자 일종의 '선전선동'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존중한다. 하지만 정 판사의 주장의 초점이 처음부터 사법개혁이었을까? 그리고 사법불신의 해소방안으로 단지 대법원장의 결단을 촉구한 것은 선량한 의도였을까? 네 편의 글로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주장일 뿐이다.

같은 인사문제이기 때문에 유태흥 전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처럼 역시 탄핵의 대상이 된다는 논리는 얼마나 곤궁한가. 유태흥 대법원장의 인사문제는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의 독립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왜 구태여 외면하는가.

정 판사, '사법개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확신한다

정 부장판사는 유태흥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는 "대부분 고등부장 아래의 하위직급 법관에 대한 인사"였지만, 현 대법원장의 인사는 "그보다 높은 고등부장 직급에 대한 인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 판사 스스로 고등부장 제도의 존재의의를 과대 평가한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다.

나아가 유 대법원장의 인사는 "적어도 법적 근거는 있는 것"이지만 이번 인사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정 부장판사 스스로도 "사실상의" 승진인사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법적 형식은 분명 '전보발령'이었다. 승진발령으로 발표했다면 위법이겠지만, 판사를 고등부장으로 보임한 것이 왜 위법이라는 것일까. 좀처럼 종잡기 힘든 논리적 모순을 글 여기저기에 뿌려두고 있다.

나도 정 판사의 논리대로 "소설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정 판사가 올해 고등부장 승진 대상자가 아니었던 것은 맞다고 하자. 현재의 사법연수원 기수대로라면 정 판사는 내년도 승진 대상자가 될 것이다.

어쩌면 정 판사는 내년 고등부장으로 승진되면 위법이라고 스스로 거절할 것이다. 만일 고등부장으로 사실상 승진되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이번 글에 대한 인사보복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대법원장이 헌법과 법률에 위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거취에 대한 결단도 필요하고, 탄핵소추 발의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 판사의 주장만으로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정 판사의 이번 반론 또한 솔직히 실망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주장에 결코 미치지 못하는 법률적 근거와 논리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다시 사법권력의 겸손함을 이야기한다. '권력의 사유화'야 말로 우리 헌법이 그토록 배척하는 바이다. 더 나아갈 길이 없다면 이쯤에서 물러서는 것이 옳을 듯싶다.

태그:#이용훈, #최재천, #정영진, #대법원장, #법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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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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