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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촨성 광안시 덩샤오핑기념관에 세워진 덩의 동상. 오늘도 중국 인민들은 덩에게 무수히 많은 조화를 바치고 있다.
ⓒ 모종혁
지난 달 20일 쓰촨성 광안시 시에씽(協興)진 잔치(戰旗)촌. 덩샤오핑이 태어난 파이팡(牌坊)촌에서 불과 5㎞여 떨어진 이곳을 찾은 기자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농가의 대청마다 붙여놓은 덩의 사진. 덩은 자신의 고향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주민 공원슈(여)는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을 부강케 한 지도자다. 우리에게 그는 재화와 안녕을 가져다주는 수호신과 같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마을 곳곳 눈에 띄는 빈집들. 적지않은 생활용품을 그대로 놓아둔 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혹은 타지로 떠나간 농민들이 살던 집이었다. 일부는 가족 전체가 떠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가족 중 한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있었다.

쥐꼬리만한 수입, 늘어가는 세금과 교육비 부담, 발전하는 도시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 등의 피폐한 농촌 현실이 덩의 고향마저 이농현상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 살던 주민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을 그대로 남겨둔 채 버리고 간 잔치촌의 빈 농가. 이 빈 집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 모종혁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라고 했건만...

1976년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문화대혁명의 10년 광란이 종식되었다. 마오에 의해 세 번째 쫓겨났던 덩샤오핑은 1977년 권좌에 복귀하고 1978년 최고 권력을 완전히 손 안에 넣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농공업 생산력이 극도로 저하된 중국에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먹는 문제였다.

덩은 중국 인민들의 먹을거리를 해결코자 자신의 측근인 자오쯔양(趙紫陽)과 완리(萬里)를 농업 대성(大省)인 쓰촨과 안휘로 각각 파견했다. 당시 중국 농촌은 9년동안 계속된 기근과 생산된 곡식을 모두 도시로 '약탈'당하면서 빈사 상태에 있었다.

▲ 덩샤오핑의 초상화를 소중히 집 대청에 걸어놓은 잔치촌의 한 농가. 덩의 고향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덩을 무척 존경했다.
ⓒ 모종혁
자오와 완은 덩의 믿음대로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세부화된 농업생산대와 농가생산청부제를 도입, 농촌의 기근을 몰아냈다. 1979년에 이르자 중국에서는 "수수를 먹으려면 자오쯔양에게 가고 쌀을 먹으려면 완리에게 가라"는 말이 대유행할 정도였다.

마오가 남긴 인민공사 도그마에 사로잡힌 보수세력은 덩의 개혁에 강력히 저항했지만, 덩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가난이 공산주의는 아니다." 덩에게 중국 공산당의 1당 독재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가난과 폭압이 아니었다. 우선 인민들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덩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불만이 크다. 잔치촌 주민 장까이(가명)는 "덩이 중국을 잘 살게 했다지만 고향마을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군에 입대해 신장(新疆)에서 13년만에 돌아와 보니 고향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면서 "생산대의 생산력은 여전히 낮고 각종 잡세는 수십가지여서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기도 벅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도시발전 사진전시회에서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농민공. 중국 대도시에는 이처럼 몸 하나로 힘들게 살아가는 농촌 출신 농민공들이 수없이 많다.
ⓒ 모종혁
90% 사람들은 경제발전에서 소외당하다

광둥(廣東)성에서 일을 하다 다리를 다쳐서 귀향한 쉬따웨이(가명)도 "잔치촌에는 30호당 1개의 생산대가 10개 있는데 한창 일할 젊은이를 둔 생산대는 하나도 없다"면서 "잔치촌 300호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은 외지에서 일하러 나간 가족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농촌은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광둥으로 돌아가 딸아이 교육비를 벌텐데…"라면서 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쉬따웨이,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작년 여름에 만난 생산대장 리청치는 "도시에서 일하면 1년에 족히 4000~5000위안(약 48~60만원)은 벌지만 농사일은 하루 종일 일해도 1년에 1000위안(약 12만원)밖에 못 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리는 "도시에 나가 공장에서 일하는 딸과 사위가 달마다 보내주는 1500위안(약 18만원)로 생활비와 손녀 학비를 충당한다"면서 "농사일로 살아가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국의 지니계수 변화

연도

1990

1995

2000

2005

계수

0.343

0.389

0.417

0.450

* 주1) 소득분포가 완전히 평등한 상태가 0임.
 주2) 수치가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정도가 높은 상태임.
* 출처: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 오마이뉴스 고정미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을 갈파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도입했다. 그의 이론은 오늘날 중국을 미국과 패권을 겨루는 'G2'의 쌍두마차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시켰다.

덩의 개혁개방정책은 도시에 잘 사는 수혜자를 낳았지만 9억 농촌인구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을 가져다주었다. 발전된 도시에서도 선부론의 경쟁에서 탈락한 빈민들이 양산되고 있다.

중국인민대학 농업경제학과 캉샤오광 교수는 "덩의 이론대로라면 도시가 농촌을 부양해야 할 단계이지만 농촌에 대한 투자는 거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 경제가 매년 8% 이상의 성장을 이루지만 매년 새로 증가하는 8%의 부는 최상위층 8%가 독점한다"면서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경제발전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 작은 어촌마을에 들어선 빌딩 숲. 오늘날 선전은 상하이와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로 변모했다.
ⓒ 모종혁
▲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는 상하이의 포동지역. 번영하는 중국 경제처럼 포동의 발전은 극에 달하고 있다.
ⓒ 모종혁
화려한 경제성장, 도시발전 속의 명암

덩샤오핑의 '선부론'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으로 질주해온 30년, 중국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덩의 이론에 따라 초유의 경제실험장이 되었던 광둥성 선전(深圳)시는 상전벽해의 현장이다. 홍콩에 인접하여 원주민 3만여명이 살던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선전은 오늘날 중국 차기 직할시의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눈부신 도시발전을 구가하고 있다.

농민공 문제를 다루는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는 훠옌핑(여)은 "덩의 말처럼 기회의 땅인 선전에 와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않다"면서 "지금 선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에 달하고 홍콩인 부럽지 않은 부를 축적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 외지인으로 구성된 오늘날 선전을 지탱하는 것은 저임금에 혹사하는 노동자들"이라며 "중국사회가 이들의 노고를 직시하여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만 이들에 손길을 내미는 관심은 너무나 적다"고 비판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천지개벽을 이뤘다고 놀라워 한 상하이의 푸동(浦東).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중국의 야심을 보여주는 동방명주탑 아래서 푸동지역의 발전은 빛의 속도와 같다. 해마다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푸동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꿈의 낙원이다.

충칭 출신으로 푸동에서 이모부를 도와 물류업에 종사하는 위민은 "쓰촨에서 갓 대학을 졸업하여 충칭에서 찾은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은 고작 800위안(약 9만6천원)이었지만 지금은 1만위안(약 120만원) 이상을 번다"고 말했다.

그는 "내륙지방과 연해지방의 생활환경, 근무조건, 소득격차가 너무 크다"면서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선부론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연해지방의 부가 내륙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한 인텔리 청년이 현실에 좌절하여 고향을 버린 사례다.

▲ 충칭 최고의 남녀 부자인 인밍산 리판그룹 회장(왼쪽)과 허용즈 샤오텐허그룹 회장.
▲ 인 회장은 맨손으로 중국 최대의 오토바이 기업을 일구고 자동차회사까지 창립했다.
ⓒ 모종혁
소외된 인민들 "우리도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

덩샤오핑이 처음 서구문화를 접했고 한 때 왕처럼 지냈던 충칭에서도 선부론의 혜택에 따라 성공한 사람들이 적지않다.

1958년 '반혁명 우파분자'로 몰려 22년간 강제수용소와 교도소에 구금되고 출소 후에도 공장 노동자로 전전했던 인밍산 리판(力帆)그룹 회장. 그는 개혁개방정책 이후 감옥에서 익힌 영어로 대학 강사가 된 뒤 1992년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리판을 창립, 오늘날 충칭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지난 2003년 민간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중국 정치협상회의(政協) 충칭시 부주석으로 발탁되었던 중국의 대표적인 붉은 자본가 인밍산. 그는 작년 여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를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든 마오쩌둥 주석의 결정은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가지도록 했고 덩의 신정책은 감옥에서의 깨우침을 사업에서 발휘하는 기회를 주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마오와 덩에게 받은 은혜를 이제는 사회에 돌리려 한다"면서 "부국안민의 입장에서 고용을 늘리는 제조업에 집중하고 한 푼의 세금도 빼돌리지 않는 것은 이런 철학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돈 2000위안(약 24만원)의 자본금과 5개의 테이블로 시작한 훠궈(火鍋)식당으로 오늘날 충칭 최고의 여성 부자가 된 허용즈 샤오텐허(小天鶴)그룹 회장도 덩에게 고마워한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덩의 개혁개방정책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정리해고된 늙은 여성노동자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식당업에서 시작해서 식료품, 호텔, 물류, 여행, 테마파크, 부동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지만 대부분 종업원 고용증대에 초점을 둔 비즈니스"라고 소개하면서 "먼저 부를 이룬 사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길은 사업을 잘 해서 고용을 늘리고 종업원의 복지증진에 힘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부론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덩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중국사회에 공헌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머지 90% 이상의 중국 인민들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역 격차, 도농 격차, 빈부 격차는 이미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일부 인민들은 이미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도 덩샤오핑이 남긴 달콤한 파이를 맛보게 해달라"고. 덩이 죽은 지 10년 되는 오늘, 그는 21세기 중국에게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 2005년 12월 충칭시 쩡자옌에서 벌어진 주민 도로점거시위. "우리는 생존을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든 중국 인민들의 집단행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 모종혁

태그:#덩샤오핑, #10주기, #양극화,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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