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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 리투아니아 작곡가 나우얄리스, 그리고 베토벤의 얼굴이 그려진 빌뉴스 시내버스들.
ⓒ 서진석
모든 시민들을 문화로 무장시켜라!

요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문화사상교육'을 필히 받아야 한다. 과거 소련 시절 행해지던 강압적인 사상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래도 피부로 느끼는 정도로 보아서는 그 때 그 시절과 많이 비슷할 수도 있다. 문화교육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그냥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

작년 여름부터 빌뉴스의 대중교통수단은 시민들을 위한 '단체문화교육'의 장소가 되었다. 빌뉴스의 낙타라고 불리는 트롤리버스와 일반버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을 비롯한 전 세계의 문화예술계 인물에 관한 정보로 도배되어있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쇼스타코비치 등 유럽 최고의 작곡가들과 리투아니아 출신의 츄를료니스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는 버스들은 하루 종일 빌뉴스 시내를 누비고 돌아다닌다. 얼굴 옆쪽으로는 그 사람의 약력과 작품활동에 관한 정보도 간략하게 실려있다.

버스 안에서도 상황은 똑같다. 유명 작곡가들의 대표작품이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 작곡가들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한다.

빌뉴스에서는 여전히 '집단문화사상교육'이?

이런 '집단적인 문화사상교육'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정류장 내 광고판에는 세계의 명화들이 소개되어있다. 그 명화들 밑에는 친절하게 작품 해설까지 해두었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 집단적 문화교육은 어떻게 피해볼 수 있겠지만, 시내에 있는 대형광고판에도 이런 대형광고가 등장할 계획이라서, 빌뉴스에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24시간 동안 문화교육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좀 극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가 문화수도가 되는 2009년을 앞두고 준비하는 대대적인 홍보활동이다.

유럽의 문화수도란 1985년 그리스의 유명 영화배우이자 문화부 장관이었던 멜리나 메르쿠리의 제창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로, 매년 유럽의 한 도시가 문화수도로 지정되어 1년간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전 유럽에 홍보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질 수 있다.

1985년 아테네를 시작으로 해서 1999년까지는 매년 한 도시만 선정되었지만, 2000년 예외적으로 9개 도시가 함께 선정된 이래, 매년 두 도시가 문화수도로 선정된다.

빌뉴스는 오스트리아의 린즈와 함께 2009년 문화수도로 지정되었고, 빌뉴스 시당국은 그 기회를 유럽의 대표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9년이면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이 기록된 서적이 발간된 지 정확히 1000년이 되는 해이다.

공식적으로 건국 1000년이 되는 해와 다르지 않으므로,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문화수도행사는 2008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사람들의 심정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빌뉴스 시 정부는 2009년까지 시민들을 문화예술에 대한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시키기 위해서, 좀 극성스러울 정도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버스에서 졸지만 말고, 영어라도 한마디 공부하자구요

▲ 빌뉴스 시민들의 낙타라 불리는 트롤리버스.
ⓒ 서진석
2009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문화수도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지만, 시내 교통수단의 주요노선에서는 문화수도의 해에 빌뉴스로 몰려들 세계의 관광객들을 제대로 맞게 하기 위해서 외국어 교육도 실시된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구간에 들어서게 되면, 스피커를 통해서 영어, 폴란드어 교육이 진행되는 것이다. "버스표를 어디에서 사야합니까?", "중앙우체국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나요?" 등 기본적인 대화내용이 리투아니아어, 영어, 폴란드어로 방송이 된다. 영어는 세계 공용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폴란드어는 리투아니아 내의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 폴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길에서 공부합시다(Mokykis Kelyje)'라는 이름으로 유럽연합의 문화교육 프로그램인 소크라테스의 지원금으로 실시되는 것이다. 이미 이와 똑같은 프로그램이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영국 등지에서 실행된 바 있다. 2009년까지 정확히 700일이 되는 2월 1일에는 문화수도 700일 기념 마라톤 대회도 성대히 열렸다.

길 막히는 시내에서 영어 공부만 시키면 대수인가?

2009년 행사를 대비해서 빌뉴스 시 당국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는 단지 시민들의 문화교육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빌뉴스 시내는 몇 년전부터 고질적인 교통체증 문제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다.

빌뉴스 중심가는 무려 600년의 역사를 가진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건설되어있는데, 전차도 버스도 다니지 않던 중세에 지어진 도시이니만큼 시내는 거리가 좁아 차량통행이 아주 어려워서 차량으로 구시가지를 접근하는 것이 워낙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중심가를 벗어난 외곽지역도 2차선 도로가 거의 전부라서 요즘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량 증가율을 맞추기에는 역부족이다.

현재 빌뉴스에는 트롤리버스와 일반버스 두 종류의 교통수단이 운행 중이다. 트롤리버스는 일반적인 버스 형태이지만, 천정에 안테나처럼 생긴 전선이 달려있어 전기로 운행되는 버스로서 공해와 소음이 거의 없어 유럽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 빌뉴스 구시가지의 전형적인 거리 모습. 이런 곳에 시가 전차가 달릴 수 있을까?
ⓒ 서진석
다른 나라에서는 시가전차나 지하철에 밀려 점차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빌뉴스에서는 '시민의 낙타'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일반화된 교통수단으로, 시내 주요 거리는 전부 트롤리버스가 시민들을 실어 나른다. 그 외 일반버스는 시내에서 좀 많이 떨어진 외곽지역으로 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이다.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던 때를 즈음하여 빌뉴스로 유입되는 차량의 수는 점차 늘고있지만, 이미 수백년동안 형성된 거리의 폭을 넓히는 것은 불가능하고,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아서 빌뉴스 시당국은 언제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좁은 길에 차들이 들어차는 러시아워에 좁아터진 트롤리버스에서 무작정 시간을 보내야하는 시민들에게 들려주는 고전음악은 짜증만 더해줄 뿐이다.

빌뉴스 시내버스에 백남준 사진이 걸릴 가능성은?

그래서 빌뉴스 시당국은 고질적인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가전차를 건설하기로 결정은 내렸다. 2009년 문화수도의 해가 시작되기 전까지, 빌뉴스 전역을 2개 이상의 시가전차 노선으로 연결할 계획을 수립했고, 빌뉴스 최대의 번화가 중 하나인 콘스티투찌요스 거리에는 2009년에 빌뉴스에 들어오게 될 최신형 시가전차의 모델을 세워놓고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2009년 문화수도 홍보에 필요한 비용은 60만 리타스(litas), 우리 돈으로 대략 20억원이 들 계획이지만, 각계 각층의 후원금으로 빌뉴스 시당국이 부담해야할 비용은 5백만 리타스 정도로 감소했다.

빌뉴스 시 당국이 발표한 계획에 의하면, 2009년까지 약 700명의 문화예술인들이 대중교통수단을 통해서 홍보될 계획인데, 그 중엔 일본인을 포함한 동양인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트 3국 내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인들의 지명도가 아주 낮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백남준이나 김홍도 같은 예술인들의 얼굴이 버스 광고에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화수도는 그 나라의 문화적 상황을 유럽 전체에 홍보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크지만, 그 반대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문화적 행사가 집중된다는 기회이기도 하다.

2009년 유럽 문화수도는 리투아니아가 준비하는 최초의 세계적인 행사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듣는 영어나 폴란드어 회화 강의에도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은 것 같고, 대중교통수단의 겉면을 도배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모습도 도시의 이미지와 대중교통수단의 기능에 맞게 적당히 디자인되어있다.

2009년에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리투아니아도 계획에 넣도록 해보자.

태그:#리투아니아, #빌뉴스, #문화무장, #해외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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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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