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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금요일 밤차로 기차표 끊었슴니더."
"금요일 날, 일 마치고 바로 출발하려면 피곤할 낀데…."

"괜찮습니더.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어 예."
"말이야 고맙지만…. 그래도 올케가 피곤할 낀데…."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 몇 번 만류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거기다 쌍둥이들까지 챙겨 밤차를 타고 오는 게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올케가 한편으론 무척 고마웠습니다.

▲ 부모님과 딸아이와 쌍둥이 조카들입니다.
ⓒ 김정혜
나흘이란 시간은 참 짧았습니다. 눈만 뜨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손가락을 꼽아대며 안달복달 기다리던 딸아이의 기다림에 비한다면,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준비하시며 오매불망 쌍둥이 손자손녀들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애타는 기다림에 비한다면, 나흘이란 시간은 정말이지 야속하리만큼 짧았습니다.

그래 봐야 1년에 두어 번 얼굴 맞대는 사촌들인데 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을까 싶지만 그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미처 해도 뜨지 않은 뿌연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아이들은 셋이 한데 어울려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대로 아들, 며느리 얼굴이 다 닳아지도록 보고 또 보고….

먹고 놀고, 먹고 놀고…. 그저 먹고 놀았습니다. 명절이란 것이 그런 것 같았습니다. 질리도록 먹어대던 김치, 된장도 어울려 함께 먹으니 진수성찬 부럽지 않았습니다. 평소엔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TV 오락프로도 어울려 함께 보니 그리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치 한 조각에도 달짝지근함이 아삭거리고, 개그맨 몸짓 하나에도 비실비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그런 행복. 바로 명절이었습니다.

▲ 부모님과 동생네 식구들입니다.
ⓒ 김정혜
그럼에도 한순간, 지난 추석 때보다 더 야윈 듯한 동생 내외의 얼굴을 바라볼 땐 가슴이 짠해져 왔습니다. 아니, 오히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동생 내외가 더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다들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요즘이고 보면 동생 내외도 예외일 수는 없을 터. 얼핏 지나가는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올케는 사정이 말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나조차도, 아이가 그리 좋아하는 태권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가르치려 했는데 그나마도 중단해야 할 지경이니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이렇다저렇다 자식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나 봅니다. 밥상머리에 앉은 아들 내외에게서 애달픔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십니다. 하루 밤새, 두 눈 퀭한 아들 내외보다 더 움푹 들어간 어머니의 깊은 두 눈이 이 딸자식의 가슴을 더 아리게 후벼 팠습니다.

평소, 당신들 밥상엔 얼씬도 않던 굵은 갈치 토막을 연방 아들 밥그릇 위에, 며느리 밥그릇 위에 올려놓으시며 이젠 나이 들어서 비린 게 싫다고 거짓말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부모님 거짓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시 바른 갈치토막을 다시 부모님 밥그릇 위에 올려놓습니다.

▲ 온가족이 다 모여 앉았습니다.
ⓒ 김정혜
부모는 삶이 버거운 자식들에게 힘이 돼주지 못해 많이 미안하신가 봅니다. 그렇다고 뭐 하나 내어 줄 게 없는 부모는 한 뼘이나 처진 자식들 어깨만 내내 다독이십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더 죄송스럽습니다. 효도는 고사하고 늘 궁색한 살림살이로 인해 부모님께 심려만 끼쳐 드리니 말입니다.

죄송한 마음 대신해 환하게 웃으며 부모님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 보고 싶은데, 등걸 같은 부모님 손은 어느새 삶의 무게로 축 처진 자식의 어깨를 다독이고 계십니다.

명절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명절이 지나간 자리엔 공허한 허기와 다시 시작되는 긴 기다림이 남았습니다. 주어도, 주어도 못다 준 것 같은 정이 허기로 남은 채 결국 못다 채울 그 허기를 또다시 견뎌야 하는 긴 기다림에 벌써 목이 길어집니다.

▲ 딸아이와 쌍둥이 조카들입니다.
ⓒ 김정혜
아들 내외가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는 분주하십니다. 뭐 하나 더 챙겨줄 게 없나 좁은 집안 구석구석을 몇 번이나 훑고 다니십니다.

가을 내내 들에 나가셔서 떨어진 콩을 주우시더니 며느리에게 주시려고 그랬나 봅니다. 손바닥만한 빈터에 두어 고랑 심었던 고추, 맵싸한 것이 아주 맛나다고 가을 내내 자랑이시더니, 어느새 꽁꽁 언 고추봉지가 며느리 짐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세배 드리면서 드린 부모님 용돈도 어느새 고스란히 자식들 짐 보따리 한구석에 들어가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자식들의 짐 보따리는 부모님을 뵙고 나면 항상 한두 가지 늘어나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마저도 자식들 손에 들리기 안쓰러워 개찰구 앞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손수 들고 가기를 고집하십니다.

개찰이 시작되고 발길 옮기기를 주저하는 동생네 식구들에게 어머니는 어서 가라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십니다. 그러나 점점 멀어져가는 손자손녀를 한 번 더 눈에 넣고 싶으신 부모님의 까치발에 가슴이 짠해져 옵니다.

▲ 딸아이와 쌍둥이 조카들입니다.
ⓒ 김정혜
자식들이 떠난 집. 휑한 집보다 부모님 가슴이 더 휑한 듯싶습니다. 손자손녀들이 먹다 남긴 과자 부스러기들을 당신 입에 털어 넣으시는 어머니.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져 옵니다. 미처 챙기지 못한, 뒤꿈치가 하늘하늘해진 아들의 양말 한 켤레. 어머니는 기어이 뜨거운 눈물 한줄기를 쏟고 맙니다.

어둠이 드리워진 시골동네엔 며칠 깔깔거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생생합니다. 새끼노루처럼 뛰고 구르던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모습들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다시 그리움이 되었고, 그 그리움은 시골에 드리운 어둠처럼 부모님 가슴을 먹빛으로 물들였습니다.

담뱃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내내 생 연기만 피워 올리며 먼데 어디를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아버지께서 불쑥 한마디 하십니다.

"추석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

설 끝에 벌써 추석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벌써 시작된 아버지의 그 하염없는 기다림에 이 딸자식은 목이 메 옵니다.

태그:#추석, #부모, #온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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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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