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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4월 구속된 화교 정수평씨는 국가기밀 누설에 따른 간첩 혐의로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대기업이 하면 무죄, 보따리장사꾼이 하면 유죄?

대만계 화교 정수평(70)씨는 지난해 4월 '국가보안법상 간첩 및 간첩 미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돼 국내자료를 북한에 건넸다는 게 핵심 범죄사실이다.

인혁당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이중간첩 이수근사건' '신귀영 일가간첩사건' 등 군부독재시절 조작된 간첩사건의 진상규명이 속속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간첩사건이 또 터진 것이다.

간첩은 맞지만 '사상범' 아닌 '생계범'

사건 당시 검찰은 정수평씨를 기소하면서 '북한 황태자의 잠행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뉴스위크> 한국어판 등의 시사지와 이 뉴스가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국제택배로 중국에 보냈다고 밝혔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남과 관련됐다는 것이다.

또한 검찰은 국내 포털업체 이메일 계정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정씨와 거래하던 북경의 조모씨가 '김철'이라는 가명을 쓰던 김정남과 주고받은 편지를 확보했다고 했다. 이를 놓고 검찰은 "북한이 공작원을 통해 책자나 비디오테이프를 수집한 건 최고위층이 외부 시각에 민감하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 CIA북한보고서>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 등의 북한관련 단행본, <미친 곳에서 쓴 일기(노베르트 폴러첸 저)>, <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다(이영국 저)> 등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이 쓴 책, <휘파람 공주> <이중간첩> 등 북한관련 영화테이프, 2001년 말 발행된 남북한 연감을 북한에 보낸 것도 국가보안법상 간첩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을 접한 한 언론은 일반적인 간첩사건과 달리 국내 최신정보를 북한에 보냈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인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검찰도 정수평씨를 '사상범이라기보다는 생계범'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실형을 각오하고 상대국의 비밀정보를 타국에 건네는 일을 했다는 말이 된다. 거액이 걸린 단 한 방의 '사건'도 아니다. 지난 6년간 고작 '20% 마진'을 남겨먹는 장사를 해온 것뿐인데, 어이없이 간첩사건에 연루됐다.

서울구치소에서 1년여의 형기를 치르고 있는 정수평씨가 당혹스러워하는 대목도 바로 이 점이다. 더군다나 정씨는 한글과 한국말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 화교다.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 생계형 간첩사건. 북한에서도 한국드라마 등 한류열풍이 한창이라는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벌어진 이 '황당 사건'의 실체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자.

<인명사전>도 <정보학회지>도 검찰 눈에는 '국가기밀'

▲ 정수평씨가 중국 북경의 조모씨에게 보낸 홈쇼핑 책자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정수평씨는 2000년 6월 무역거래 도중 중국 북경에서 알게 된 중국인 조모씨와 상거래를 하게 됐다. 북경에서 조씨가 팩스로 물품목록 주문서를 보내면 정씨는 국내에서 해당 물건을 구매하는 것.

정씨는 20%의 수수료를 가산한 구매비에 운송비·포장비·교통비를 합산한 금액을 받는 식으로 거래해왔다. 그가 2000년부터 2006년 4월 구속되기 직전까지 조씨와 거래한 물품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등의 TV프로그램 녹화테이프, <오만한 나라 미국> <김정일 일본 요리사 회고록> 등의 서적류, <국가정보화백서 2001> <정보통신표준화 백서 2001> <연합연감 2001> 등의 정부기관 백서류, <여성중앙> <우먼센스> 등의 여성잡지, <꼬마박사 토토콤> 등의 게임기, 앙고라 풀오버·스트라이프 팬츠 등의 의류 및 각종 생활용품, 전자해도와 심해전지 등이다.

검찰은 이번 사건에서 정수평씨가 실질적인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연합연감2001> <한국인명사전 2001> <정보보호학회 회지>, 전자해도와 심해전지 등을 보낸 것은 심각한 간첩행위라고 피력했다.

<연합연감> 등은 한국 지도급 인사들의 사진이나 주소 등 각종 신상정보가 망라돼 있어 북한의 대남공작에 이용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으며, <정보보호학회지>나 논문 등은 최신 정보와 첨단 기술·이론에 관한 논문이 수록돼 있어 북한이 이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사이버 공작이나 해킹 기술개발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일간지 웹사이트의 인물정보가 <연합연감>이나 <한국인명사전>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인물정보를 다루고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인물검색만하더라도 무려 27만명에 대한 검색이 가능하다. 만일 북경 조모씨가 한국 언론사나 포털에 회원으로 가입하면 언제든지 27만명에 대한 정보검색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정보보호학회지> 등의 논문도 가입비만 입금하면 특별한 제한없이 회원으로 가입해 무료로 학회지와 논문 등을 받아볼 수 있다.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도 직접 방문해 돈을 내면 제한없이 누구나 학회지를 구입할 수 있다.

심지어 정부는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을 만들어 북한의 내각 교육성과 함께 평양정보기술대학을 설립해 착공에 들어갔으며, 이 대학은 정보과학학부, 생명과학학부, 공학부, 경영정보학부 등을 설치해 북한의 정보통신분야 인재육성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소프트웨어 공동개발에 합의해 북한과의 정보통신 교류는 활성화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서울구치소 면회실에서 만난 정씨의 아내 왕본지(64)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조모씨가 사다달라는 책을 들춰보지도 않고 그냥 보냈습니다. 시중에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게 간첩행위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시중 물건 사서 보낸 게 국가보안법상 비밀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왕씨는 "매월 발행되는 홈쇼핑 책자를 보내주면 조씨가 옷·신발·그릇·도자기·침대 시트커버·전자요나 장판 등을 사다달라고 요청했다"며 "물건을 그쪽에 보내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지 그걸 누가 쓰는지 장사꾼이 알 바 아니다"고 말했다.

검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왕씨는 "고작 책 보내준 걸로 간첩죄를 적용한다면 너무 억울하다"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왕씨는 격일로 5시간 거리에 있는 서울구치소까지 남편을 만나러 면회를 다니고 있다. 고령의 남편이 한국식 식사와 잠자리에 익숙하지 않고 심장병과 허리디스크 등을 앓고 있어 매우 걱정된다며 한숨을 토했다.

집에서 주문받아 우체국으로 보내는 간첩?

▲ 신정때 조상에게 제를 올리기 위해 마련해놓은 상. 정수평씨는 한국에 살지만 집에서는 항상 중국말과 중국식 음식, 중국신문 등을 접하면서 생활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또한 검찰은 "정씨가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돼 국내자료를 북한에 건넸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간첩' 정씨는 이같은 물품을 주문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을 숨긴 적이 없다. 주문 및 배송 과정에 가족이나 우체국 직원의 도움도 받았다.

집에 팩스 주문서가 오면 아내 왕본지(64)씨가 받아서 큰며느리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화교출신인 왕본지씨도 정씨와 마찬가지로 한국말과 한글이 서툴기 때문이다. 큰며느리는 해당 물품을 직접 구매하거나 홈쇼핑 등에 전화를 걸어 주문했고, 결제는 큰아들의 신용카드로 했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물건이 집에 배달되면 정수평씨와 아내 왕씨,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함께 물품을 포장했으며 집 부근에 있는 우체국까지 박스를 카트에 싣고 가서 부쳤다. 간혹 박스의 양이 많을 때는 우체국 직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정씨의 주변인들도 만일 "정씨가 '간첩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최소한 집에서 주문을 받고 가족이나 우체국 직원을 대동해서 물품을 포장하고 송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씨는 "남편이 간첩이라면 우리에게도 속이고 말하지 않는 대목이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편은 30년간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대만에 사과와 배를 수출하고 필리핀에서 땅콩과 바나나·옷감 등을 수입하는 일을 해왔다, 무역업자에 불과한 남편에게 왜 간첩혐의를 적용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수평씨와 함께 무역업에 종사했던 한 관계자도 "정수평씨의 거동이 수상했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신고했을 것"이라며 "그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난달 24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이 관계자는 "정씨가 북경에 보낸 것들은 다 시중에 나다니는 물건"이라며 "그걸 국가기밀로 본다면 소가 웃을 일"이라고 반발했다.

그는 "인터넷만 통해 전세계 어디서든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돈주면 살 수 있는 물건들을 사서 보냈다고 해서 간첩행위라고 하면 정말 웃기는 일"이라며 "고령의 노인에게 무리하게 간첩죄를 적용한 것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요즘 중국에서 무역하는 사람 가운데 북한 사람 접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며 "북경 조모씨는 예전에 LG상사와 금괴거래를 한 일이 있다, LG상사는 아무런 처벌도 안 받았는데 보따리장사꾼 정씨는 왜 간첩죄로 처벌하느냐"고 검찰의 이중잣대를 비판했다.

실제 LG상사는 9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북한의 금괴를 수입한 적이 있는데, 이때 중간에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 바로 북경 조모씨다. 조모씨는 "내 재량으로 담보없이 후불조건으로 300만 달러 상당의 금괴를 LG상사에 제공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주변인들의 평가가 있기도 하다.

또한 이 관계자는 정씨가 사상적으로 '오염'될 리 없는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도 아닌 정씨가 한국에 대한 국가관이 있겠냐는 것이다. 그는 정씨에 대해 "사업에 실패한 경험 때문에 장사해서 빨리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전했다. 그런 사람이 한국정치에 관심 갖고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를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산동반도 출신인 정씨는 대만신문만 읽을 정도로 한국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집에서도 중국말만 하고 중국TV를 시청하는 외국인. 아들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에 무척 반대했으며, 아버지 초상 때도 종이를 태우는 등 대만식으로 3년상을 치른 사람이다.

정수평씨가 북경 조모씨와 만났더라도 사상적 교감은 없었을 것이라는 이 관계자는 "조금이라도 어려운 우리말은 따로 토를 달아 해석해줘야 할 정도로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이라며 "조씨가 북한공작원이라고 하더라도 한국말도 잘 모르는 사람과 사상적 교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단순 돈거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말도 못하는 외국인이 한국의 간첩이라니

▲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과 태극기.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검찰은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북경 조모씨를 북한공작원으로 지목했다. 따라서 그와 접촉한 정수평씨는 간첩이라는 주장이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는 신문조서에서 스스로 '조모씨는 북한 공안소속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정씨는 보석허가신청서를 통해 "검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들은 "여러 모로 따져봐도 조모씨를 북한 공작원이라고 볼 만한 사항은 없다"면서 "자신의 지위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하게 만들어 북한과의 거래에서 자신이 중재자로 나서려는 수준 낮은 장사꾼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검찰이 조모씨를 북한 공작원이라고 전제하고 정수평씨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사건을 몰고 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한 변호사는 "정보보호학회지나 논문, 전자공학회지나 논문은 반국가단체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가 탐지하거나 수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며 "이 내용이 누설된다고 해서 북한에 이익이 되고 한국에 불이익이 초래될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단정했다. 정보보호학회지나 논문, 전자공학회지나 논문 등은 국가기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해도와 심해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검찰은 전자해도나 심해전지가 북한의 특수요원들이 해상침투에 이용하는 군사용으로 활용될 위험이 높다면서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 변호사는 "국립해양조사원은 2000년부터 우리나라 전 연안에서 전자해도를 판매하고 있다"면서 "일반인들도 돈만 내면 아무런 제한 없이 전자해도를 구할 수 있고 외국으로 수출도 하고 있어 전세계 어디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미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실질적으로 비밀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공개된 자료라면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며 "검찰은 비공지성(국가기밀), 요비닉성(비밀로서 공개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 실질비성(실질적 비밀여부) 등을 들어 국가기밀 유출로 인한 간첩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정씨가 북경의 조모씨에게 보낸 것은 모두 공개된 자료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봄부터 3척이 넘는 담벼락 안에 갇힌 뒤로 1년 내내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정수평씨는 "한국에 살면서 소수자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에게 몇 차례 대형 사기를 당하고 지게 된 엄청난 빚을 빨리 청산하려고 장사를 벌렸다, 이렇게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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