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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5일 파업에 들어간 <시사저널> 기자들이 직장폐쇄에 맞서 농성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 뒤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였고, 최근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연이어 나오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고 있다. 반이정 기자는 미술평론가다. <편집자주>
▲ 사장의 일방적인 삼성 관련 기사 삭제 이후 기자들의 파업과 사측의 직장폐쇄 등으로 <시사저널>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 언론노조는 2일 오전 삼성본관 앞에서 '<자본권력> 삼성의 언론통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결국 파국 일보 직전까지 가서야 수습에 덤벼드는 게 세상사의 부조리이런가.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동종업계의 운명공동체적 협조보다 결과적으로 경쟁업체의 분란과 그로 인한 반사 이익이, 장기화된 <시사저널> 사태를 대하는 언론사 일반의 속내였을지도 모를 터이니.

급기야 직장 폐쇄와 장외 집회라는 사측과 노조의 초강수 대립구도가 형성되고서야 기사감이 될 성 싶었던지, 웹사이트를 전전하던 <시사저널>의 벼랑 끝 위기는 근자 들어 지상파 뉴스 시간에 시청자를 찾아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BRI@내 글에 앞서 연재된 열일곱 회의 릴레이 기사를 죄다 읽어봤다. <시사저널> 기자와 경영진 사이 불화의 본질과, 지난해 870호 기사 삭제부터 899호 대체 인력 투입 발행까지 사태의 기승전결은 이 연재물 안에서 명증하거나 은유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 혹은 거칠고 감정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릴레이 기사의 필진 구성이 대체로 언론계 종사자거나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탓이리라.

더러 전직 <시사저널> 편집장들의 회고와 비사가 포함된 원고에서는 이번 사태 이전인 IMF 무렵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들이 걸어온 남모를 역경과 편집 철학의 고집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독자들에겐 이해 도모를, 교섭에 지친 기자들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격려를 주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시사저널> 파업과 대체인력 투입으로 항간에서 '짝퉁' 소리를 듣고 있는(그 같은 호칭 사용 때문에 명예훼손 고소까지 당했다고 전해지는) 899호 이후 총 5부의 발간에 대해 동질의 문제의식을 품는 나 같은 '업계 밖' 인간은 어떤 종류의 비분강개와 논리로 이 연재물을 이어갈지 실은 고민됐다.

사건의 요약 정리와 899호 이후 <시사저널> 기사들에 대한 꼼꼼한 리뷰를 비슷한 논조로 재연하거나 감상적 언사로 파업 기자들의 노고를 격려하며 글을 맺자니, 명색이 전업 필자인데 체면이 서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계 인사란 사회 현안과는 동떨어져 살아가는 존재라는 세간의 통념과 믿음(대체로 이건 사실이긴 하다만)을 확인시켜서도 곤란하겠다.

<시사저널> 파업 지지와 정상화 촉구를 내 전공인 비평 언어로 다듬을 만한, 나만의 방식은 없는 걸까?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그저 소박한 글을 써볼까 한다.

<시사저널> 사측 태도, '대필' 둘러대는 출판계 논리 판박이

나는 우연히도 '짝퉁' 1호(899호)가 발간되기 딱 한 주전인 898호에 한젬마씨의 대필사건에 관한 비평을 기고한 필자다. 한 주 차로 '짝퉁' 기고자라는 불명예를 벗을 수 있었으니 이걸 누구에게 감사한담.

어찌됐건 나는 내 원고에서 한젬마씨가 자신의 대필에 쏟아진 여론의 질타와 대필 내막을 특종 보도한 <한국일보>사에 맞서 법정 소송을 불사하겠다면서 "책 또한 예술품이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 같다"는 논리로 비난을 피해가려 한 점에 집중해서 글을 썼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책의 진짜 저자라는 한씨의 주장은(실은 아이디어조차 대필 작가의 것이거나 기획출판의 산물이었다) 예술의 성과를 결과물보다 아이디어와 동일시하는 태도, 즉 작가의 노동력과 손놀림을 중시했던 고전적 예술관보다 최종 결과물을 사전에 기획하는 아이디어 자체를 실제 예술품으로 간주하는 개념예술(conceptual art)의 전통을 출판물에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이 언어도단인 까닭은 1960년대 유행한 개념예술이 한씨의 주장처럼 출판이라는 문맥 속에서 온전히 적용되려면, 집필자가 누구건 간에 글의 전체 아이디어만큼은 한젬마씨의 머리에서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 보도와 대필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역시 출판관계자의 기획회의와 대필 작가의 경험이 반영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한젬마씨의 책은 결국 대필된 것이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이 글이 실린 <시사저널> 898호가 나가고 한 주가 지나 '짝퉁', 아니 내가 보기엔 '대필' <시사저널>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대필에 관해 다룬 내 원고와 이번 사태 사이의 인과관계란 실은 없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우연인 건지 '대필' <시사저널>이 탄생한 것이다.

모든 대필 사건의 용의자들에게는 어떤 동형성이 관찰된다. 금번 대필 <시사저널>을 발행 중인 경영진의 태도에서도 그 동형성이 반복된다. 즉 집필의 주체가 누구건 간에 그것을 실행한 아이디어의 주인은 자신이므로 그 행사 과정 또한 정당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실례에 적용해보자. 편집인의 정당한 편집권 행사로 870호의 '부적절한' 삼성 관련 원고를 예술적 방법으로 새벽에 남 몰래 삭제하려는 아이디어를 금 사장이 발안했고, 또한 실행했다. 한편 899호 이후 연 5회에 걸쳐(추후 계속 발간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대리 집필자를 대거 등용해, 정식 기자들의 '부적절한' 파업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아이디어도 금 사장이 구상했고 보다시피 실행에 옮겼다.

한젬마씨의 대필 사건이 국민 정서상 대필일지언정 출판계 관행상 대필일 수 없다는 해당 출판사의 논리는, 동일하게 <시사저널> 870호 기사 삭제와 899호 이후 '대필' 출간이 국민 정서상 불법일지언정 편집인의 정서상 합법적 행사라는 논리와 한 짝을 이룰 것이다.

▲ 사측 주도로 일명 '짝퉁' <시사저널>이 발행된 후, 잡지 표지를 내걸어 놓던 회사앞 게시판이 텅 비어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내 글쓰기의 8할은 시사잡지에서 배웠다

은유적 성토는 이 정도로 해두고 내 속의 추억거리 하나 꺼내놓을까 한다. 내 서가에는 90년 초에 발행된 <시사저널> 약 1년 치가 꽂혀있다. 미안한 얘기이나 구독으로 모은 게 아니라, 이웃집이 이사할 때 버리고 간 책 더미의 잔해 속을 뒤져 과호 묶음을 주어왔던 것이다.

이미 1년도 넘게 지나, 더는 동시대적 기사 가치는 상실된 과호 <시사저널> 더미들을 그래도 전부 읽었던 기억이 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내 기억에 일간지와는 달리 심도 있게 사안을 분석·비판·종합하는 기사들이 그저 내용의 기계적 전달을 넘어, 소설책만큼이나 읽는 재미를 더할 만큼 알차고 문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 기억이 그래도 정확했던지, 전직 <시사저널> 관계자 중에는 나중에 실제 소설가들이 배출되지 않았나.

나는 주로 정치·사회·문화면을 탐독했고, 시사 주간지를 매주 받아보는 요즘도 내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사회·문화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는 미술계이고, 관련 비평을 하는 게 내 전업이다. 그러나 주관적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균형을 잡아 사태를 바라보며, 읽는 재미와 문장미에 신경 쓰려고 노력한다.

이런 글쓰기의 철학은 미학 전공서나 미술사 교재보다 당대 시사주간지 기자들의 글쓰기 포맷에서 영향 받은 바가 훨씬 크다고, 나는 공공연히 고백해왔다. 그 중 <시사저널> 기사의 문장력은 학창 시절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책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되는 시평의 필자가 되는 소망도 품어봤다. 한참이나 지난 추억이다.

결국 내가 <시사저널>의 비정기적 필진이 된 건 지난해 9월 19일자(882호)부터다. 그러던 중 전술한 것처럼 '대필' 시사저널이 발행된 올 1월 8일부터 내 기고도 잠정 종료됐다. 기자들의 파업과 나의 기고 거부는 함께 할 터인데, 정녕 이번 사태를 두고 비평가로서 기여할 몫과 '꺼내들 칼이란 게 고작 그 알량한 투고 거부 밖에 없더냐' 하는 무력감에 젖어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미술인들이여, 불량 아이디어 신봉자에게 힘 보태서야 되겠는가

서두에서 예술 행위 혹은 예술 종사자는 사회 현안과 동떨어진 결과물 혹은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고 얘기했다. 설령 직설법으로 무장된 몇 안 되는 실천예술운동이 등장한들 역사의 순간에 긍정적인 동력을 제공하기보다 사태가 모두 종료된 직후 그것을 기록하고 전시장에 박제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예술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이며, 예술의 매체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 '감상의 대상'으로 귀결되는 탓도 그 때문이리라. 반면 예술이 대가를 목적으로 부정적 동력에 가담하기란 상대적으로 쉽다. 선전선동에 동원된 예술의 예가 그렇다. 물론 이때 그걸 두고 진정한 예술로 정의해야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지난 <시사저널> 900호 이후의 문화란 기고자 중 안면 있는 선배 미술인 두 분(김복기, 정준모)의 성함을 발견했다. 그들이 현 <시사저널> 파업 사태를 인식하고 투고에 응했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유감스런 사건에 연루된, 좋지 않은 선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미술인이 대처할 수완이란 게 좁쌀만큼 보잘 것 없을지도, 그리고 그 한 방법이란 게 고작 기고 거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량한 아이디어를 신봉하고 실행하는 이에게 힘을 보태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흠, 나를 이토록 가련하고 초라하게 만든 자는 대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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