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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16년 9월 9일 오전 9시 21분]
 


62세의 신랑과 30세의 신부

 

연극이나 영화 또는 TV 드라마가 인기를 얻을 때, 대부분 연기자들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연기자들의 열연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성공하기까지는 무대 뒤 그늘에서 수고한 숱한 스태프들의 노고가 있다.

 

일제 강점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이동녕 선생 등 임시정부 지도자의 영도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어른 뒤에서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셨던 독립 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아마 임시정부는 끝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동암(東岩) 차리석(車利錫) 선생, 독립운동가나 사학자들은 그분을 '임시정부 버팀목'으로 부른다.

 

그분의 생애가 임시정부 역사로, 1919년 9월 독립신문 기자로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45년 9월 9일 임시정부 환국 준비를 하시다가 임정 청사에서 과로로 쓰러지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직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이셨다.

 

독립 운동가들의 가정이 대부분 평탄치 못하였는데 동암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해외로 망명한 뒤 줄곧 홀로 지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 국내 가족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부인을 상해로 불러왔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동암은 상해를 떠나야 했으므로 다시 가족과 헤어졌다. 그로부터 10여년을 넘게 임시정부와 함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상하이에 살았던 부인은 귀국 후 세상을 뜨셨다.

 

임시정부가 비로소 중경에 정착하게 되자, 임시정부 가족들도 차츰 가정생활을 꾸려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동암이 부인을 잃고 홀로 외롭게 사는 것을 본 백범이 중매를 섰다.

 

신부는 서안포로수용소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했던 홍매영(洪梅英) 여사였다. 이때 백범은 홍 여사에게 "독립 운동가를 곁에서 도와주는 것도 독립운동이다"라고 결혼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2년 11월에 두 사람이 화촉을 밝혔는데 그때 동암은 62세이고, 홍 여사는 30세였다고 한다.

 

누구든 당신을 도와줄 것이오

 

1944년 1월 17일에 아들을 낳자 백범은 "늙은 동암에게 아들이 생긴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면서 아명을 '천복(天福)'이라 지어 주었다. 백범은 물론이려니와 중경 임시정부 요인 모두가 국운 밝아질 경사로 귀여워했으며, 중국인 작명가에게 부탁하여 '영조(永祚)'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쁨도, 조국 해방의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동암은 임시정부 비서장으로 임정 환국 준비로 동분서주하다가 1945년 9월 9일에 과로로 쓰러져 순국하셨다.

 

운명 순간 동암은 젊은 부인의 손을 잡고 "나는 조국이 광복해도 못 가보고 죽게 될 것 같소. 당신에게 어린 자식을 맡기고 짐만 지운 채 떠나가니 미안하오. 귀국하면 정부든 누구든 당신을 도와줄 것이니, 아이 키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이듬해 5월 홍 여사는 어린 아들을 업고서 귀국선을 탔다.

 


그 어린 아들 차영조씨가 이제는 환갑을 이미 넘긴 초로의 신사가 되었다. 나는 차영조씨를 3년 전 조문기 선생을 만나 뵐 때 처음 만난 이후 의병순례지 답사 길에서, 백범기념관에서, 우당기념관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당신이 기구하게 살아온 얘기를 듣고자 한 번 자리를 마련한다는 게 여의치 못해 미뤄오다가 2007년 정초에 만나기로 했다.

 

지난 1월 12일, 만남의 장소를 효창원으로 정하고, 거기서 가까운 6호선 효창공원역에서 오후 3시 20분에 만났다. 약속시간 10분 전이었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더없이 쾌청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5분 쯤 효창운동장 쪽으로 오르자 운동장이 나오고 곧 효창원이 나왔다. 효창원에 들어서 동남쪽에 임시정부 초대의정원의장, 주석을 지내신 이동녕 선생과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을 지내신 조성환 선생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역임하신 차리석 선생의 묘가 다정하게 세모꼴로 모셔져 있었다.

 

"차려! 세 분 선열에게 묵념, 바로."

 

선열 참배에 익은 차영조씨의 구령에 따라 먼저 묵념을 드린 뒤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이 묘소는 동암을 중경에 묻어둔 채 환국한 백범이 끝내 동암을 잊지 못해, 아들 신에게 지시하여 기강에 묻힌 석오 이동녕 선생과 중경에 묻힌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모셔와 이곳에다 안장하고, 뒤이어 돌아가신 청사 조성환 선생도 이곳에다 모셨다고 차영조씨는 그 유래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저는 백범 선생님을 큰아버님으로 모십니다. 전 광복회장 윤경빈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제 아버님이 쓰러졌다는 것을 백범 선생이 서안에서 듣고 곧장 달려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 동암이 백범 선생을 평생 모셨고, 아버지 어머니 중매까지 했다고 하니 차영조씨의 말에 수긍이 갔다. 여기까지 와서 백범기념관을 들르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침 바깥 날씨도 차서 오래 대담을 나누기가 어려운지라 백범기념관으로 가 접대실 탁자에 마주 앉았다. 백범기념관에서 준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나는 취재수첩을 펼쳤다.

 

차(車)씨가 신(申)씨가 된 사연

 

"어린시절부터 중년 때까지는 하도 살기가 힘들어서 아버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왜 하필 독립운동을 하셔서 어머니가 모진 병으로 고생하시고, 제가 학교도 다닐 수 없게 되었는지, 아버지의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차영조이지만 어릴 때는 신영조였습니다."

 

"네! 어머니가 개가라도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 어머니는 끝까지 절개를 지키셨습니다."

 

나는 차(車)씨가 신(申)씨로 바뀐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제 어머니는 아버님의 유해를 중경 땅에 둔 채 가 세 살배기 아들을 업고 1946년 5월에야 귀국선에 올랐습니다. 임정 식구 모두가 금의환향이 아니라, 대부분 피난민들이 고국에 돌아오는 천한 대접을 받은 거지요.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부산항에 도착하고서도 10여 일이나 배에서 머물렀고, 상륙할 때도 디디티 살포까지 받았다니까 더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서울로 온 뒤 임정요인 임시숙소로 충무로 1가 100번지 한미호텔에서 거처했지만 생계 대책이 막막한 어머니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사과궤짝에다가 양담배를 올려놓고 팔았어요. 그게 그때는 큰 죄였습니다. 길거리에 흩어진 양담배를 줍던 일과 사무실 책상 사이를 뛰어다니던 추억이 아련합니다. 앞의 일은 경찰들이 사과궤짝 위의 양담배를 발길질한 것을 줍는 일이요, 다음 일은 어머니가 경찰서나 파출소에 붙들러 가서 취조 받는 동안 철없던 저는 겁도 없이 뛰어다녔던 겁니다."

 

그래도 6.25 한국전쟁 전에는 좋았다고 했다. 첫 피난은 강화도로 가서 수복할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나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내려가다가 천안에서 부산 방향에 피난민들이 많이 밀리자 군경이 충청도로 유도하여 그들 모자는 부여로 갔다고 했다.

 

부여에서 처음에는 수용소에서 배급을 타먹고 살았지만 그 배급도 끊겨서 어머니는 빨래비누와 같은 생필품을 광주리에 이고 행상에 나섰다.

 

그들 모자는 이후 부여에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차영조씨는 신영조로 알고 지냈고, 그렇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단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1949년 백범 선생이 흉한에게 시해 당하시는 것을 본 어머니는 독립운동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동암 차리석의 아들이 아닌 양, 차(車)씨를 버리고 한자의 두 획을 뺀 신(申)씨로 바꿔 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도 당신의 초등학교 친구들은 당신을 '신영조'로 안다고 했다.

 

옛날에 이성계가 고려왕실을 쓰러뜨리고 이씨조선을 세우자 왕(王)씨들이 두 획을 보태 전(全)씨가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했다.

 

"해방 후에도 창씨개명이 있었군요."

"그런 셈이죠."

 

우리 두 사람은 묻고 답하고는 씁쓸히 웃었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2016년 9월 8일 차리석 선생 외손자 유기수씨로부터 차 선생 생애와 가족관계에 대한 제보를 쪽지로 받은 바, 차리석 선생 첫 부인은 강리성(康利聖) 씨로 1961년에 돌아가셨고, 장녀 차애련(車愛蓮) 차녀 차영희(車永喜)를 두었다고 함.

이 기사는 2회로 되어있으며 도서출판 역사공간에서 펴내고 장석흥 국민대 교수가 지은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을 참고하였습니다.


태그:#차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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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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