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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쌍둥이들 이른바 '말괄량이 쌍동이' 시리즈. 지경사 명랑소녀소설의 대표격이다.
ⓒ 지경사소녀소설 재번역 출간 모임
등단한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작품이) 정말 끝내주는 소녀취향이네요."

(진짜 말하셨나요? 따귀는 안 맞았는지) 대부분의 작가에게 위의 말은 그다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어느샌가 '묵직한 삶의 깊이'와 '소녀취향'은 서로 다른 쪽에 있다고 믿어버리게 됐기 때문이다.

@BRI@소녀들도 성인이 되면서 자신의 취향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이사를 다닐 때에 명작도 학습서도 아니었던 '명랑 소녀소설'은 제일 먼저 버려졌다. '소녀취향'이라는 단어는 언젠가 껍질을 깨듯 벗어버려야 하는 과거의 유치한 취향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진짜 소녀들이 사라진 자리의 한편에는, 성적 대상으로서 소녀를 소비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소녀'를 쳐볼까. 쏟아져 나오는 건 포르노와 <롤리타>류의 성인 소설이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위인전도, 명작 시리즈도 부족한 현실에서 진짜 소녀들은 왜곡된 소녀상 속에 갈 곳을 잃은 건 아닐까.

<캔디캔디>, '소녀소설'의 원류

'말괄량이 쌍동이'를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플롯시'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성이라면 알 법한 '소녀스타'들이다. 초등학교 시절 밤마다 이불 속에서 이들과 큭큭거렸을테니까.

한번 되짚어 보자. 수많은 소녀를 울리고 웃긴 '소녀취향'은 어떻게 나타나 어디로 흘러갔는가?

학원사(현재의 주부생활사)의 세계명작시리즈 <키다리 아저씨>는 50년대에 출판됐다. <빨간 머리 앤> 등 이후로도 여러 출판사의 명작시리즈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딱히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은 많지 않았다.

일본 만화계를 통해 순정만화가 국내로 들어오고 엄희자, 민애니 등의 만화가가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1977년 만화영화 <캔디캔디>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된 이후 10여년간 침체됐던 순정만화계가 활기를 띠었다. 김숙 등의 만화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범우사의 사루비아 문고와 동광출판사의 파름문고가 인기를 끌었다. <유리의 성>, <유리가면> 등이 나왔다. 1980년대 후반 지경사에서는 '소녀명랑소설' 시리즈를 냈다. <말괄량이 쌍동이의 신학기>, <플롯시의 꿈꾸는 데이트>, <발랄한 신입생 다렐르> 등이 크게 인기몰이를 했다.

'소녀취향'의 정서는 순정만화계로 흘러들어가 김진, 신일숙, 강경옥 등의 탄탄한 작가군을 형성하게 된다. 아직까지 만화계는 여성 작가가 '꽉 잡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들의 뒤를 잇는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한편 순수문학이 중시되는 문단에서는 딱히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기획물이 나오지 못했다. 베스트셀러였던 지경사의 <소녀명랑소설> 시리즈도 '일본색이 짙다''가볍다'는 등의 비판과 함께 절판되어 사라져갔다.

그러나 진정한 명작은 역시 독자가 알아주는 법. 당시의 애독자들은 10~20여 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절판된 시리즈를 찾아 헌책방을 뒤진다.

'쌍동이'와 '플롯시'의 귀환... '소녀취향' 찾아 헌책방 뒤지는 마니아들

다렐르와도 친했다면... 당신은 '소녀명랑소설 마니아'.
ⓒ 지경사소녀소설 재번역 출간 모임
블로그 사이트 '이글루스'(www.egloos.com)에서는 '지경사소녀소설 재번역 출간 모임'이 꾸려졌다. 지난 해 4월부터 알음알음 찾아온 블로거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출판사를 통해선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이들은 직접 원서를 들여오고 책 목록을 작성하는 등 이미 '마니아군'을 형성했다.

"연애의 결여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이글루스 가든(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공간)의 기획자 에피(별칭)는 소녀소설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이 자라서 남성 중심의 성적 판타지 문화로 편입되고, 주체적인 여성상이 남아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섞이지 않은 상태의, 이른바 '여학교 정서'가 당시 소녀들의 수요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성장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욕망을 드러내는 데 솔직하잖아요. 흔히 말하는 내숭이랄까 남성들을 의식하는 게 없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예쁜 것들이 잔뜩 나왔던 감각적인 면에도 많이 끌렸죠. 이런 것들을 소위 '밝히는' 소녀들이라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밝히는 소녀들'은 어디로 사라져간 걸까? 주체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던 여성들도 몰성적인 사회에 편입되면서 스스로의 취향을 유치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지켜가기보다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다. 에피는 자신이 '소녀'에서 '여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예로 들었다.

"이를테면 사촌언니들도 대학생이 되면서 제게 '엽서 수집책' 같은 걸 다 넘겨주었지요. 예쁜 걸 밝히면 안되는 건가."

온라인선 '재출간 준비모임'... 피규어 제작하고 동인지 만들기도

나도 기억해줘요 '플롯시 시리즈'도 있었다.
ⓒ 지경사소녀소설 재번역 출간 모임
에피는 문화적 다양성에 가혹한 사회의 획일성을 '소녀 실종'의 주범으로 꼽는다. 재미를 배격하는, 즉 구체적인 사람이 실종된 학교교육에도 불만이 많다.

국사 수업 시간에도 '당시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학교 수업은 어땠을까' 등의 공감 가는 친숙한 소재로 풀어갈 수 있을 텐데, 관심도 없는 왕과 정복의 역사 중심으로 채워져 있다는 의견이다.

에피는 자신의 취향을 지켜가는 방식으로, 친구들과 함께 맘에 맞는 책을 구해 읽어보고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피규어(캐릭터 인형)를 제작하거나 동인지 통신 판매(같은 취향의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만화 잡지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것)를 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소비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책이나, 과거의 애독서,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소녀물을 찾아보는 정도죠."

가뭄에 콩 나듯 팬들에게 반가운 소식도 있다. 최근 홍익문고사에서는 에니드 블레이튼의 알려지지 않은 판타지 동화 <매직 트리>를 출판했다.

한언출판사에서도 <세인트 클레어의 말괄량이 쌍둥이>를 출판했다. 하지만 판매율은 저조하다. 에피는 이 책을 살리는 웹링(동일한 주제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연결해 공유하는 사이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문단의 '쿨한 소녀', 배수아의 힘

▲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 변병준이 만화로도 만들었다.
ⓒ 대원씨아이
문단에서도 '가부장적 각본'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여성작가들의 시도가 드문드문 이어져왔다.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며 소설을 쓰고 있는 이아무개(26)씨는 20대 초반 한국 작가 배수아의 소설에 열광했다.

기존의 여성작가들이 '한국여자의 지난한 경험들'을 그야말로 지난하게 다뤘다면, 배수아는 한국적 토양을 염두에 두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소화해냈기 때문이다.

가난과 고통을 다루면서도 사회적인 서사로 편입하거나 구조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는다. 권력관계를 까발리는 것도 아니다.

배수아가 다루는 여자 혼자의 삶은 낱낱이 분석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냉정하게 끊어버린다. 이씨는 그런 점에서 "배수아의 소설은 쿨하다"고 말했다(<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책세상)의 저자 권명아는 소녀를 끊임없이 '가족 로망스'의 서사틀에 가두려는 한국 문단의 근대성을 분석했다.

4·19정신으로 아버지를 부정한 소년들이 70년대 청년문화, 80년대 민중운동을 통한 동지의식으로 성장했다. 이 가운데 여성은 오빠를 그리워하는 누이로 왜곡됐다. 신경숙의 <외딴 방>은 민중운동의 주체인 '오빠'를 불러오는 누이로 '잘못' 읽혔다.

여기에서 나아가 배수아는 <프린세스 안나>에서 이모와 엄마를 착각하고, '공주'라고 딸을 호명하는 아버지를 그려낸다).

이씨는 말한다.

"배수아에게서 무엇을 배웠냐고? 외로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싶은 것. 그런 거였지."

대체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외롭다는 건 뭘까.

"가정이 없다는 거야. 고아이거나 결혼을 못했거나, 자식이 없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연인이 없다는 것보다 가족이 없다는 게 더 큰 외로움인 것 같아."

가정 없으면 외로워야 하나, 이성애만 사랑인가

▲ 일본의 소녀소설은 로맨스로 유명한 코발트문고가 대표적이다. <마리아님이 보고계셔>도 그 중 하나.
ⓒ 서울문화사
그는 결혼의 해피엔딩으로 수렴되지 않는, 여성들 간의 관계를 다루는 소설을 직접 쓰고 있다. 남자가 개입되는 서사구조는 사회에 넘치니까 말이다.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드라마의 로맨스 구조를 보며 '순간 멋있어 보일 때' 스스로 끔찍함에 속이 탄다고 한다.

앞으로도 소설 창작을 계속할 계획인 그는 이성에 눈을 뜨며 성장하는 과정의 '이성애 로맨스'는 자신의 소설에 담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대신 그의 소설에는 여성들 간의 동성애가 등장한다.

"가부장적인 대안의 제시냐고?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삶도 있구나, 이렇게 관계 맺는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뿐이야. 사회의 관습적 관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와 비슷하게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는 '의자매'를 맺는 여학생들 간 동성애를 다룬다. 상류층 여학원이 배경인 이 소설은 일본의 소녀들 사이에서 이미 붐을 일으켰다. 최근 만화영화화 되어 국내에서도 케이블채널 '투니버스'를 통해 방영됐다.

'소녀취향', 여기 또 있다
뭘 읽을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제발 지금 이 순간에 열여덟 살이 되었으면. 이제 안경을 끼고 두리뭉실한 스타일과는 안녕 했으면. 베라와 퍼거스에게 마음껏 뽐내고 엄마에게 그린샐러드를 먹으라고 명령받는 아홉 살이 아니기를.'

<플롯시의 꿈꾸는 데이트>의 한 구절이다.

플롯시가 열여덟 살이 되어서 막상 입맛에 맞는 읽을거리 찾기조차 힘들다면 얼마나 낙심했을까. 게다가 '소녀취향'은 이제 모두 벗어버리고 남자들의 진짜 세계를 동경하라고 강요받는다면?

그래서 모아봤다.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는 동시대의 소녀소설!

[사랑의 역사] '첫번째 소녀'가 찾는 사랑의 발자취

ⓒ 민음사
"첫 번째 여자는 이브일지 몰라도 첫 번째 소녀는 알마다."

로맨틱 미스테리물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한은경 옮김)>는 폴란드 이민자가 잃어버린 '사랑의 역사'라는 원고를 칠레에서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첫사랑을 찾아온 80대 노인 유대인 레오, 깜찍한 10대 소녀 알마, 자신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엉뚱한 동생 버드 이 세 인물이 주요인물로 활약하며 교감을 나눈다. 모두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독'을 앓고 있지만,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는 열정에서 이들은 아름답다.

소통을 고민하는 니콜 크라우스는 남편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의 저자)와 함께 뉴욕의 천재 부부 작가로 유명하다.

[프라하의 소녀시대] 주름 안고 찾아나선 소녀시절

ⓒ 마음산책
누가 이들을 가볍다 하랴. 논픽션 다큐멘터리로 동유럽의 현대사를 다뤘다. 저자 요네하라 마리(이현진 옮김)는 일본 공산당 잡지의 편집위원인 아버지를 따라 체코의 프라하에서 십대 초반의 소녀 시절을 보낸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읊는 대사들은 떠나온 각자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세월이 흘러 프라하의 봄도 지나고, 동구권이 몰락하고,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그리고 이제 얼굴에 주름을 새긴 나이든 저자가 옛 친구들을 찾았다.

단서라고는 어렸을 적 나눠가진 메모, 그림 같은 것들 뿐. 이코노미스트의 저널리스트 출신인 저자가 끌어가는 서술은 대화체의 풍부한 인용, 통통 튀는 표현으로 진지한 주제를 발랄하게 끌고 간다.

[키키 스트라이크 1·2] 걸 스카우트에서 퇴출 당한 소녀들

ⓒ 랜덤하우스중앙
<키키 스트라이크 1·2(키어스틴 밀러·김난영 옮김)>는 판타지 추리 문학이다.

뉴욕의 안개 낀 11월 아난카는 아파트 옆 구덩이에 드리운 밧줄을 타고 지하도시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잊혀진 어둠의 도시에서 온 몸을 검은색으로 무장하고 광폭하게 스쿠터를 몰고 다니는 키키 스트라이크를 만난다. 걸 스카우트에서 퇴출당한 문제 소녀 다섯 명과 수백만 마리의 굶주린 쥐 떼.

저자 키어스틴 밀러는 광고회사 중역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청소녀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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