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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했던 김일 선수의 젊은 시절 모습
ⓒ 거금도닷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들의 영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미 수년전 은퇴한 '박치기왕 김일'을 아직도 '김일 선수'라고 부른다.

7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그 시절 김일 선수를 가까이서 만난 적이 있다. 김일 선수와 같은 전남 고흥 출신이기도 하지만, 당시 흑백TV가 아니면 그를 직접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셨던 김일 선수가 이웃 마을에 방문하면, 조그만 시골마을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먼지나는 비포장 길을 달려와 차에서 내린 그가 어린 우리들에게는 과자를 나눠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84㎝의 거구에 말려들어간 귀,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던 그 당당했던 모습. 그는 우리들에게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바람같은 시간이 훌쩍 지난 후, 지난 2004년 5월 민속장사씨름대회가 열린 고흥 팔영체육관 귀빈석에서 초라해진 김일 선수를 다시 만났다. 그는 씨름대회에 초대돼 휠체어에 병석의 노구를 의지한 채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다.

비록 프로레슬링 대회는 아니었지만, 그는 젊은 시절 고향에서 유명한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이날 고향주민들과 많은 씨름인들의 박수를 받았다. 몇년 전 나는 씨름대회를 유치하면 고향을 빛낸 김일 선수를 초대하면 좋겠다는 뜻을 대회 주최 측에 전했고 마침내 그것이 실행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김일 선수의 마지막 고향 길이었을 것이다.

거금도 장사 집안의 아들... 10대부터 씨름판 휩쓸어

▲ 세계태그챔피언타이틀전에서 맞붙었던 루테즈와 함께
ⓒ 거금도닷컴
김일 선수는 고흥군 금산면 평지마을에서 태어났다. 거금도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장사 집안으로 유명했다. 그의 아버지도 2m가 넘는 거구였고 그 피를 이어받아 16세부터 씨름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각종 씨름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었고 전남 대표로도 활약했다. 전국을 돌며 힘자랑을 하고 다닐 무렵, 우연히 여수에서 본 일본잡지가 그의 운명을 이끌었다. 세계의 철인으로 불리던 루테즈를 꺾고 세계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된 역도산의 기사를 보면서 그의 꿈은 프로레슬러로 변했다.

결국 그는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해 역도산을 만났다. 함경도 출신인 역도산도 처음에는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1인자인 '요코즈나'는 될 수 없어 프로레슬러로 데뷔하여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김일 선수가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후 안토니오 이노키오와 야구선수 출신 자이언트 바바가 문하생으로 뒤를 이었고, 역도산이 사망한 후 이들은 훗날 강력한 라이벌로 링 위에서 만났다.

그는 역도산이 지어준 '오키 긴타로(大 金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지만, 스승이 타계한 뒤 다시 한국인 '김일' 선수로 돌아왔다.

그는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만들어 국내 프로레슬링 중흥에 앞장섰다. 장영철과 함께 레슬링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끝까지 후계자를 양성하고 그 맥을 이어온 장본인이다. (장영철 선수는 "레슬링은 쇼"라는 폭로발언으로 프로레슬링의 인기 가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당시 그와 함께 프로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만든 선수들은 당수의 명인으로 유명한 천규덕, 김일의 사위가 된 남해산, 그외에도 김덕·박성남·박승모·오대균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김일 체육관'을 개관하면서 후계자로 이왕표를 비롯해 후배들을 길러냈다. 재일교포 출신이자 '알밤까기'로 유명했던 여건부, 막내동생인 김광식(교통사고로 사망), 양승희, 임대수 등이 그의 제자다.

또한, 체육관 지원하사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제자로 입문한 백종호는 영화 <반칙왕>의 실제 모델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백종호와 함께 은퇴경기를 치른 김도유도 같은 고향출신 제자였다.

프로레슬러들의 산실이 되었던 이 체육관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몰수되었고 정동문화체육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됐지만 이마저도 얼마 전 헐리고 말았다.

'박치기'로 세계를 들이받았던 김일

▲ 전국민을 열광시켰던 추억의 70년대 프로레슬링 포스터
ⓒ 거금도닷컴
김일 선수와 경기를 치른 외국 프로레슬러로는 스승 역도산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오를 비롯하여 자이언트 바바가 있다. 세계태그챔피언 자리를 김일 선수에게 빼앗긴 루테즈는 현재 WWA회장직을 맡고 있다. 2000년 도쿄돔에서 은퇴경기 때 직접 그의 휠체어를 밀고 나와 김일 선수의 은퇴식을 축하해주기도 했다.

1967년 4월 29일 WWA헤비급타이틀경기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시 그에게 챔피언벨트를 넘겨준 선수는 '슬리퍼 홀드'라는 목(기도) 조르기 기술로 유명한 마크 루인이었다. 마크 루인은 당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던 루테즈를 꺾은 신흥 강자였다. 그러나 그도 김일 선수의 박치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반칙왕'으로 '물어뜯기'가 특기였던 프레디 블래시 선수도 있었다. 그는 WWA초대챔피언을 지냈으며 2회에 걸쳐 챔피언을 지냈고 1971년 7월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일 선수와 격전을 치렀다. 당시 시합은 피바다를 방불케 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김일 선수의 2-1 폴승으로 끝났다.

그 외에 '검은 그림자'로 불리던 흑인 거구 보보 브라질 선수가 있었다. 인터내셔널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이 사망한 이후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를 거쳐 챔피언으로 등장한 선수였다. 당시 185㎝, 140㎏의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였다.

보보 브라질은 1972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을 찾았고 역도산이 사망한지 8년 만에 챔피언 벨트를 되찾기 위해 일전을 준비했다. 박치기 대결로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1차전에서 보보 브라질의 흉기에 의한 반칙으로 1승을 내줬던 김일 선수는 2·3차전에서 강력한 보디프레스와 새우등 꺾기 기술로 브라질을 제압했다.

이밖에도 김일 선수는 현역시절 3000여회의 시합을 가졌으니 국제무대에서 상대한 세계적인 스타들은 이들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타이거 마스크, 도리 펑크, 니스라우스 즈비스코, 마이크 디비아시, 미스터 아토믹 등 당시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강호들과 맞붙어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며 힘들고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와 감동을 선사했다. 전두환 정권이 프로야구를 내세워 국민들의 관심을 돌렸다면 프로레슬링은 나름대로 유신정권 시절 그 역할을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일 선수가 무엇보다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 것은 적지나 다름없는 일본에서 일본선수를 링 위에 눕혔다는 점이다.

그가 링 위에 오를 때 입은 가운에는 호랑이와 갓, 담뱃대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당당하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한국인 프로레슬러로 세계무대를 평정한 우리들의 영웅이었고 영원한 전설이었다.

"내 소원은 고향에 전깃불 켜지게 하는 것"

▲ 우리의 '박치기왕'도 시간을 붙잡지는 못했다.
ⓒ 거금도닷컴
김일 선수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깊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자주 불러 격려를 해주었다. 어쩌면 영웅에 대한 당연한 대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이 소원을 묻자, 그는 어머니의 회갑잔치을 열어달라고 하는 대신 고향인 거금도에 전기가설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오지였던 거금도 섬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남 고흥군에서 어업전지기지로 유명한 나로도를 비롯하여 읍단위 일부지역에만 전기가 들어와있던 때였다.(차라리 연륙교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었다면 아마 남해대교보다 먼저 완공되어 전국적인 관광지로 유명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든다.)

그는 그렇게 고향을 사랑했다. 일본에서 시합을 벌여 많은 돈을 벌어들일 때 서울 집에는 고향사람들이 들끓었고 한 달에 쌀 세가마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일 선수의 말년은 편하지 못했다. 여순사건 시절 14연대에 자원입대한 마을친구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군사법정에서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육사진학에 실패한 아들은 군에 입대해 의문사를 당했다.

17세 때 결혼한 아내도 결국 백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레슬링에 입문한 막내 동생마저도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다.

자신도 혹독한 레슬링 훈련과 치열한 시합으로 속병이 들어 당뇨와 만성신부전증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일본에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던 그는 1993년 박삼중 스님의 주선으로 귀국해 서울 을지병원에서 13년동안 투병생활을 해왔다.

고단한 삶 끝낸 고인이시여, 영면하시길

▲ 고향 생가터에 건립된 김일기념관 전경
ⓒ 거금도닷컴
그런 와중에서도 김일 선수는 후배들의 경기장에 참석 격려했고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위해 애를 써왔다.

프로레슬링이 다시 국민스포츠로 부활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미국 WWE경기는 인기스포츠로 팬들이 열광하고 있지만, 국내 프로레슬링 경기는 아직도 군단위 체육관을 전전하며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그는 77세의 일기로 고단한 삶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가난과 싸우던 힘든 시절 민족적 자긍심과 감동을 주었던 '김일' 그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고향 거금도 생가에는 40여평의 그의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이제 세계적인 프로레슬러를 꿈꾸며 떠났던 고향산천 거금도로 돌아와 편히 영면하시길.

덧붙이는 글 | 거금도닷컴(www.ggdo.com) 자료를 협조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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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어용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세월호사건 후 큰 충격을 받아 사표를 내고 향토사 발굴 및 책쓰기를 하고 있으며,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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