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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출입하는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입니다.

국정감사 첫날이었던 금요일(13일)에 제가 쓴 기사로 인해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잠시 소동이 있었습니다.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이 "핵을 가진 상대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면 우리도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미국의 핵우산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 동의 여부를 묻자 이용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예"라고 답했다는 <오마이뉴스> 기사 때문입니다.

장관은 이같이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는데, 이 순간 제 머리 속이 멍해졌습니다.

마음이 혼란해진 저는 현장을 보지 못한 다른 기자들에게 "장관의 이런 답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그게 사실이냐", "경솔한 답변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행자부 장관이 국정감사 자리에서 민감한 답변을 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일단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를 쓴 뒤 답변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저는 이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행자위가 마침 정회 상태여서 이 장관을 국회의사당 복도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장관은 처음에는 자신이 그런 답변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저를 더 황당하게 했던 것은 "김 의원도 남한이 핵 보유를 해야한다는 말을 안 했다"는 이 장관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장관은 더 나아가 자신의 실언도 아니고, 의미가 담긴 말도 아니라며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병관씨, 무조건 (기사) 빼!"

순간 당황한 저는 웃으며 "(문제의 발언이) 국회 속기록에서 빠지면 저도 빼겠습니다"라고 넘어갔습니다. (국회 속기록에서 발언이 삭제된다고 해서 발언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원칙적으로 저의 답변도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 실언 '모르쇠'하고 기자에게 책임 떠넘기기만

물론, 이 장관이 위압적인 어조로 기사 삭제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농담조의 말이었다고 해도 장관이 불과 30여 분전에 국감에서 했던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기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장관의 그런 해명이 틀렸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논쟁이랄 것도 없이 국회 웹사이트의 행자위 영상회의록에서 김기춘 의원 질의 부분을 들어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고, <오마이뉴스> 기자가 녹취한 대화 내용을 그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기춘 의원 "1991년 1월20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 사이에 서명되고 2월19일에 발효된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있습니다. 이런 약속이 이번 핵실험으로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이 공동선언으로 한반도의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적어도 미국의 핵우산 밑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하시죠?"
이용섭 장관 : (침묵)
김기춘 지금 국방부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장관도 같은 생각이시죠?
이용섭 예.


또한 다른 언론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죠.

"이용섭 장관은 국정감사 첫날인 13일, 행자위 오전 국감에서 '남한도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한 언행을 보였다."<노컷뉴스>

"이 장관은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한국이 핵무장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맞다'고 답변했다가 나중에 핵을 보유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발언을 수정했다."<국민일보>

"이용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국회 행자위 국정감사에서 '핵을 가진 북한에 대응하려면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에 동의를 표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프레시안>


▲ 국회 국정감사 첫날인 13일 행자위의 행정자치부 국정감사에서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이 13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용섭 행자부 장관에게 남한의 핵무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냐고 묻자 이 장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답변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금이야 사실관계가 명확히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장관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사를 빼라고 요구한 것이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장관의 이런 해명도 문제지만, 김기춘 의원을 끌어들여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는 행자부 관료들의 태도 또한 짚고 넘어 가야하겠습니다.

행자부는 이날 오후 "김기춘 의원도 본인의 발언은 한반도 핵 개발을 해야 된다는 취지의 질의는 아니었음을 밝혔다"며 "이 장관이 한국의 핵무장에 동의했다는 <오마이뉴스>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김 의원은 나중에 행자위에서 "(자신은) 미국의 핵우산이라도 빌려서라도 국가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장관의 의견을 물었다"고 해명했는데, 김 의원이 처음에 "우리도 핵무기를 제조하거나…"라고 질문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있던 일'을 '없던 일'로 하자고 '없던 일' 되나

이 장관의 실언이 뜻하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자 그런 발언을 유도했던 김 의원도 사태 수습을 위해 자신의 질의 수위를 뒤늦게 낮춘 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김 의원이 국방·외교·통일 등 북핵 문제의 주무장관이 아닌 행자부 장관에게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입장 표명을 요구한 것이 장관의 실언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원과 행자부 장관이 '없던 일'로 합의하자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질지는 의문입니다. 진실은 국회 속기록에 계속 남아있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장관의 국감장 발언이 논란이 되자 '장관 감싸기'에 급급했던 일부 관료들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생면부지의 기자가 장관의 발언을 문제삼았으니 관료들이 조직의 수장을 보호하고자 나선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몇몇 분의 행동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용섭 장관과 얘기하는 동안 옆에서 종종 대화에 끼어든 몇몇 분의 발언을 소개하도록 하죠.

관료A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그런 말씀 안 하셨어요."
관료B "장관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기자가 왜 고집을 피웁니까?"
관료C "이걸 외신이라도 받아쓰면 어쩌려고 해요? 일단 기사를 삭제한 뒤 다시 확인해서 쓰라고…"
관료D "장관이 그런 말한 적이 없다고 확인하시잖아? 만약 틀리다면 어떻게 책임을 질 거예요?"


몇몇 분들이 너무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저는 나중에 일부 관료들에게 김기춘-이용섭 대화가 담긴 국감 녹음파일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행자부의 한 간부는 그때서야 "김 의원이 그런 질문을 하긴 했네"라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장관의 예민한 발언을 보도한 기자에게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때 기자를 꾸짖기에 급급했던 분들이 지금 저를 만나면 뭐라고 해명하실지 궁금합니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됐지만, 수많은 행정부처의 공무원들이 국감장 주변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는 풍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장·차관 이하 고위간부들이 답변하다가 막히는 대목이 있으면 실무자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민 업무도 뒷전에 돌리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국감장에 수십 명의 행자부 직원들이 나와 있었지만 장관 발언을 모니터한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되풀이될 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수많은 공무원들을 '국감 5분대기조'처럼 부리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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