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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번 국도. 강원도 고성과 충남 연기군 전의를 연결하는 길이다. 이 길 죽전사거리(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와 동수원에 이르는 길목 양지바른 곳에 한 많은 생을 살다간 두 분이 잠들어 있다. 공교롭게도 자연사가 아니라 사사(賜死)된 분들이다. 불과 2km 남짓 거리다. 세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에 올랐던 심온과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조광조다. 우선 심온을 살펴보기로 한다.

▲ 조선시대 특수 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녔던 패
ⓒ 이정근
강남산맥의 가파른 고개 판막치를 피하여 극성령에 올라서니 압록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양을 떠나 여기까지 달려온 길을 뒤돌아 생각해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직선 참로 요소요소에는 금군(禁軍)들이 쫙 깔려있어 그들을 피하여 오느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우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선천을 지나 천마산을 넘으면 지름길이지만 삭주로 돌아오느라고 하루가 더 걸렸다. 문곡에서 극성령을 넘을 때에는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니고 있던 패물을 털어주며 목숨을 건졌으니 다행이지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 앞만 보고 달려온 1050리 한양길이 아찔하기만 하다.

"금군에게 붙잡히면 너도 죽고 우리 집안도 결딴이 나느니라. 고생이 되드라도 역참이나 마을 길을 지나지 말 것이며, 만에 하나 붙잡히더라도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실직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중궁전 아이나 대감댁 아이가 아니라 판통예문사 안마님댁 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 영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다
ⓒ 이정근
장의동(藏義洞) 대감댁을 떠나올 때 부부인 마님의 글썽이는 눈망울이 눈앞을 가린다. 부부인이 누구인가? 왕비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로써 지체가 하늘에 닿는 분이다. 고갯마루에 동지섣달 칼바람이 분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의주성이 한눈에 보인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마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12월 스무하루. 의주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삼각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밤. 금군들이 철통 같은 경비를 서고 있는 신갈파진을 피하여 압록강 가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여인이다. 여인이지만 남자 옷차림으로 변복을 했다. 강을 건너면 내 나라 땅이 아니라 중국 땅이다. 그래도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야 하는 여인이었다.

1년 중 4∼5개월 동결되어있는 압록강은 신갈파진에서 주렌청(九連城)에 이르는 뱃길은 트여 있고 나머지는 얼어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길에 어디가 꽁꽁 얼어있고 덜 얼어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얼음이 깨져 빠지면 구해줄 사람도 없는 죽음의 길이다. 그렇지만 망설일 수 없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의금부 금군에게 체포되옵니다. 어서 피하시라는 부부인 마님의 전갈이옵니다."

▲ 세종대왕 동상
ⓒ 이정근
한 나라의 영상이요 왕의 장인(國舅)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던 심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9월 8일. 왕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그리고 상왕 태종의 분에 넘치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온 게 불과 두 달 남짓 전인데,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날벼락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엎드려 읍소하던 여인이 얼굴을 들었다. 가녀린 두 뺨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에 데리고 있던 아이를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갈 때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였다. 강상궁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전하는 말은 아내의 간청이며, 딸아이(공비)의 부탁이 아닌가?"

돌아가는 판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가 강상궁을 여기까지 보내 귀국을 돌리라는 얘기는 생명이 위태롭다는 얘기가 아닌가? 심온은 잠시 망설였다. 하늘을 쳐다봤다. 몇 점 흰 구름이 남동쪽으로 흐르고 한 떼의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귀국을 거두고 몸을 피한다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 아닌가. 일국의 영상으로 그것도 왕비의 애비로서 당치않은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마음을 다잡은 심온은 귀국을 서둘렀다. 심온을 비롯한 사은사 일행을 태운 배가 의주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여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에서 배가 보이지 않자 여인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목숨 걸고 소임을 마친 여인이 압록강의 원혼이 된 것이다.

▲ 태종의 수결
ⓒ 이정근
사은사 일행의 배가 의주에 닿았다. 명나라로 떠날 때 극진히 환송하던 의주목사가 안 보인다. 자신이 천거하여 의주목사가 된 임귀년이 안보이고 낯선 사람들이 보인다. 눈빛이 날카로운 장정들이었다. 의주목사가 보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귀년은 심온 집 사람들에게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일주일 전 의금부 금군에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어 전옥서에 하옥되어 있었다.

"어명이요. 대역죄인 심온은 오라를 받으시요."

상왕으로 수강궁에 물러앉은 태종의 특명을 받은 의금부 진무 이욱의 목소리였다. 예상했지만 대역죄라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체포된 심온은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압송하라는 상왕의 특명에 따라 함거에 실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갈 때는 영광의 행차길, 올 때는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는 달구지 수레길이다.

이즈음 한양에선 숨 가쁘게 돌아갔다. 특히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참로 길은 어명을 전달하는 급주마들의 말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050리 41참 의주길은 금군들의 눈초리가 번득였다. 참로 요지인 의주, 안주, 평양, 황주에는 금군들이 아예 상주하고 있었다. 판전의 감사 이욱을 의금부 진무로 임명하고 "심온을 잡아오라"는 수강궁전 태종의 명이 떨어진 것이 11월 25일. 한 달여 전이다.

"심온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평안 관찰사에게 미리 체포할 것을 준비하라"는 명을 받들어 파발마가 떠난 것이 11월 29일이고, 의주 목사 임귀년이 "심온의 종을 맞이하게 하였다 하여 파직한다"는 명을 가지고 떠난 것이 12월 4일. 북으로 향하는 함거를 저지한 연산 수령을 파직한다는 어명을 받들어 급주마가 떠난 것이 12월 5일이었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 12월 15일. 심온의 사람 "고수생에게 역마를 제멋대로 내준 죄로 황해도 참로 찰방 김관을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 12월 17일이었다. 한마디로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직선 참로는 파발마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마를 날이 없었다. 혁명을 연상하게 하는 긴박감이 천 여리 참로 길에 흐르고 있었다.

일찍이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심온은 조선조 개국과 함께 간관이 되어 형조판서와 호조, 이조, 공조 판서를 지내고 승승장구 임금의 장인으로 국구가 되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상에 올랐다. 이러한 심온이 어떠한 연유로 옥사에 연루되었을까? 병조좌랑 안현오가 밀고하고, 좌의정 박은의 간계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학자도 있지만 시야를 넓혀보자.

▲ 세종대왕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살아생전에 왕권을 강화시켜 놓고 죽어야겠다는 신념에 따라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것이 8월 11일. 막상 일을 저질러놨지만 넘어야 할 산은 명나라였다. 명나라에서 윤허하지 않는다면 물릴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끝까지 거부한다면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며 공물을 더 많이 바치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자존심에도 위배하고 백성의 기름을 짜는 일이라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대목을 태종 이방원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조선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유정현과 영의정 한상경, 그리고 대간 각 한 사람을 불러 전위한 일을 중국에 보고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의논이 아직 정해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땅히 <상왕께서〉풍병을 앓으시어 때때로 발작하여, 부득이 세자 이도(李祹)를 대리로 하여 국사를 보게 하였으며, 인장(印章)과 면복(冕服)은 감히 마음대로 전해 주지 못하고 오직 칙명이 내리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오직 이원만이 홀로 말하기를, "금년 정월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상왕께서 무양하심을 뵈었삽고, 또한 이제 이미 세자 책봉을 청하였으니, 중국 황제가 반드시 사신을 보내올 것인데, 상왕께서 만일 조정에 나와 보시지 않는다면 반드시 의심할 것이요, 만일 나와 보신다면 반드시 상왕의 병환이 사실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세자를 폐립(廢立)한 지가 아직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전위(傳位)한다면 사리가 전도되니, 우선 병을 칭탁하여 전위를 주청(奏請)하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황제가 가령 그것을 윤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청하면 반드시 윤허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연을 시켜 상왕에게 이 사연을 고하니, 상왕이 하연을 박은의 집에 보내어 물었더니 박은의 의견도 이원의 의견과 같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개국 이후로 상왕께서 비로소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으시고 중국을 지성으로 섬겨 왔는데, 이제 왕위를 주고받는 큰일을 당해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하므로, 하연이 돌아와 박은의 이 말을 상왕께 아뢰니 상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등에 큰 종기를 못 견디어 빨리 떠나가려고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리에 있어 얼른 작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좌·우 의정의 말도 옳다. 그러나 황제가 만일 윤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4일)


▲ 청천부원군 심온의 묘역
ⓒ 이정근
약소국의 설움이 눈물겹도록 절절히 배어 있다. 병을 칭탁한다니? 멀쩡한 사람을 병들었다고 거짓으로 꾸며 대여 고한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렇게 근심이 태산 같았던 명나라에 판한성 김여지를 사은사로 파견하여 칙서를 보냈는바 명나라 조정이 혼쾌히 받아들이고 답례 사신을 보내온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8월 22일이다.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영의정이 마땅하다"고 태종이 말한 것이 9월 2일. 영의정에 임명된 것이 9월 3일이고, 사은사로 임명된 것이 9월 7일이다. 아들 세종이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떠나 새로운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새로운 궁궐을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하고 이어(移禦)한 것이 9월 16일.

왕비 소헌왕후(심온의 딸)가 세종 이후 보위를 이어갈 맏아들 향(훗날 문종)을 낳고, 위(훗날 세조)를 낳은 후, 셋째 아들 용(안평대군)을 낳은 것이 9월 19일. 한마디로 궁궐은 축하의 연속이었고 왕실은 경하의 연속이었다. 병조참판 강상인의 옥사가 눈엣가시처럼 걸렸지만 태평성대였다.

강상인의 옥사도 그렇다. 명령에 죽고 사는 무인으로서 "호령이 두 군데서 나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푸념은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에 익숙한 무인으로서 임금전에 보고해야 하고, 상왕전에 보고해야 하는 일은 처음 경험하는 일로서 난처한 일이 한둘이 아녔다. 상왕 태종도 그렇게 이해했다.

강상인이 누구인가? 바로 태종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상왕을 모시고 태종의 그늘에서 큰 사람이다. 또 병권을 쥐고 있는 태종이 믿고 병조참판에 앉혀놓은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크게 해석하면 태종 자신을 능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실언을 한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공신녹권 직첩을 거두어들이고 옹진에 부쳐 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으러 마음먹은 것이 9월 12일이다.

그런데 태종이 변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180도 변한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던 날의 상황보고다. 사은사 일행이 떠나던 행차 길에 환송인파가 구름처럼 밀려들고 도성이 텅 빌 정도였다는 보고를 받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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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