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지덕사. 현판은 정조대왕이 하사한 편액이다
ⓒ 이정근
목마른 새 한 마리가 물을 찾아 날아가다 먹잇감을 발견하고 망설이듯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국사봉이다. 국사봉이라는 명칭은 우리의 산하에 무수히 많다. 청계산에도 있고 인천에도 있으며 경상도 거제에도 있고 전라도 영광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있다. 국사라는 낱말이 경외의 대상이어서일까? 아무튼, 많다.

관악산 줄기가 한강을 바라보며 뻗어 내리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뚝 솟은 봉우리. 진정 우리나라 국사봉의 원조다. 안양천까지 펼쳐지는 대방골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지긋이 내려다보고 서 있는 산이 국사봉이다. 그 국사봉 기슭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양녕대군이 잠들어 있다. 양녕대군 부 묘소 지덕사다.

지덕(至德)이란 이름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라 이름하였다.

▲ 왕의 자리(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자유를 위하여 왕위를 버린 왕자. 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임금 티켓을 손에 쥐었으나 왕좌(王座)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폐세자. 아니, 오르지 않은 왕세자. 예약된 티켓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붙어있는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었던 한 인간.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때론 인생길을 역주행하며 살았던 사람. 양녕대군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굴곡진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양녕대군은 조선건국 2년 후에 태어났으니 할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 초기 혼란스러움과 아버지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등극, 아우 세종대왕의 태평치세 그리고 조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두 눈으로 목격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파도 치는 격동의 시대를 호흡했던 사람이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장승백이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이 국사봉이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장조추존) 능행길에 잠시 쉬어가다 성군 세종대왕과 그의 형 양녕대군의 천륜을 어기지 않은 우애를 떠올리며 존경을 표했다는 곳이 장승백이다. 언덕 마루에 빼곡히 서 있었다는 장승의 흔적은 간 곳이 없고 현대식 지하철역이 자리 잡고 있다.

▲ 양명문
ⓒ 이정근
국사봉 기슭에 잠들어 있는 양녕대군을 찾아갔다. 지하철 7호선 장승백이역 2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를 타니 5분 정도 걸린다. 예전엔 산기슭이었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포위된 한 점 섬처럼 보인다. 왕릉엔 홍살문이 있고 대군의 묘에는 외삼문이 있는데 양녕대군의 묘에는 외삼문이 없다. 예전엔 있었지만 도시계획으로 인해 도로로 잘려나간 모양이다. 양명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만 있다.

잘 가꾸어진 경내에 들어서니 정조대왕이 하사한 지덕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원래는 숭례문 밖 도동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2년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사당에는 중국 송나라의 문호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팔곡병 목판본과 숭례문 편액 목판본, 정조대왕이 지은 금자(金字) 지덕사기 등 귀중한 유물이 보관되어있다.

▲ 양녕대군의 글을 오석에 새긴 시비. 묘향산 유람길에 암자에 하룻밤 묵을 때 스님에게 써준 글이다.
ⓒ 이정근
뜰 잔디밭에는 오석(烏石)에 새긴 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눈에 띄는 것으로 한시의 멋과 맛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양녕대군의 시를 새겨놓은 비석이다. '동국시선'에 한국의 대표적인 한시로 소개되어있는 양녕대군의 시로서 묘향산 유람 길에 스님에게 써주었다는 양녕의 글이다.

그 밖에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초서체로 쓴 대군의 글을 초당 이무호가 쓴 글씨. 그리고 양녕대군의 16대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양녕대군을 숭모하는 친필 시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중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숭례문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다.

▲ 숭례문 현판
ⓒ 이정근
현재 남대문에 걸려있는 '숭례문'이라는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 친필 글씨다. 당대의 명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현판도 양녕대군 못지않게 수난을 겪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때. 왜병이 휩쓸고 지나간 국토는 참혹했다.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문화재가 약탈되었다. 왕릉과 도성의 궁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가고 텅 빈 경복궁과 창덕궁의 모든 전각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선릉에 잠들어 있던 성종 임금의 능침도 파헤쳐졌다. 이때 양녕대군의 친필 글씨 숭례문 현판도 사라져 버렸다. 관군은 지리멸렬했지만 백성의 분노어린 의병과 조선 수군의 분전으로 왜군이 물러가고 전후 복구를 할 무렵 숭례문 현판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었다.

광해군 때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글씨를 받아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 하지만, 걸어두면 떨어지고 걸면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도성에는 남대문에 귀신이 붙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이때 욱천이 흐르는 청파동 배다리 어귀에서 밤마다 서기가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파묻혀 있었고 그것을 찾아내 남대문에 걸었더니 떨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져 온다.

▲ 양녕대군 묘역
ⓒ 이정근
잘 가꾸어진 묘역을 따라 계단을 오르니 거기에 양녕대군이 잠들어 있다. 보통의 묘역은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나 대군의 묘는 북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묘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가 시립하고 있는 무인들 같았다. 무인과 양녕.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느낌이 그렇다.

"왜 북향으로 누워 계시나요?"하고 물으니 "그야 그쪽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시니까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시야를 넓혀 먼 산을 바라보니 한강 건너 남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 양녕대군 묘
ⓒ 이정근
남산? 남산과 양녕대군을 떠올려 봐도 얼른 짚이는 게 없다. 남산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는 뭐가 있지? 라는 생각에 미치자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종묘다. 할아버지 이성계와 아버지 이방원이 배향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 건국 와중에서 걸출한 삶을 살다간 두 분을 사나이 대장부로 존경했고 후손의 한 사람으로 공경하는 효자였나 보다. 세자 폐출 후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양녕. 죽어서는 아버지 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니 아이로니컬하다.

▲ 관악산 연주대
ⓒ 이정근
"왕위를 빼앗겼습니까? 버렸습니까?"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너무나 뜻밖의 물음이어서인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허허, 젊은 친구가 너무나 당돌하구만.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답은커녕 오히려 질문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여유가 있었기에 목숨을 담보한 가시밭길을 헤치며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 수양(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목숨 걸고 안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기로 작정하고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 게야. 그것이 세상이야. 꿰맞추어 놓은 대로만 세상이 돌아간다면 재미없는 세상이지"라고 말하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한명회의 수결
ⓒ 이정근
"한명회와 사돈을 맺을 때 종실에서 제일 큰 어른으로 기분이 어땠습니까?" 칠삭둥이 한명회가 권람의 천거로 경덕궁 궁지기에서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성공시켜 수양을 임금의 자리로 밀어올렸다. 야심가 한명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첫째 딸을 예종비, 둘째 딸은 성종비를 만들었다. 이때 종실 큰 어른이 양녕이었다.

얼른 답하기 곤란한 난감한 질문이었나 보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 "비(妃)의 자리를 놓고 꼼수를 부리는 것은 하수들의 놀음이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야" 하늘을 다시 쳐다보았다. 꼼수의 장본인 한명회가 훗날 부관참시를 당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초서체로 쓴 양녕대군의 글. 현재는 초당 이무호 선생의 글씨로 오석에 새겨져 지석사에 있다.
ⓒ 이정근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묘역에 내리는 햇살이 포근하다. "정향이는 어떤 여자였어요?" 양녕대군의 영원한 여자. 평양기생 정향이에 대하여 호기심 가득 물어보았다. "남녀의 정분이란 육체적인 결합만은 아니야, 그것만을 추구한다면 축생이나 다름없지." 담담하게 말하며 조용히 미소 짓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양녕과 정향은 영혼이 교합했다는 뜻인가? 육과 영의 사랑? 숭고한 사랑이었다고 믿어주자.

육과 영, 권력과 속세를 넘나들며 살았기에 후대에 사람들은 그를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조선실록도 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호(諡號)를 강정(剛靖)이라 하였으니, 굳세고 과감(果敢)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제 명(命)대로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