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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국의 입장에서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를 무대로 식민통치 피해배상을 받아내겠다’던 한국 정부의 당초 전략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미국은 과도한 대일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함과 함께 한국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배제함으로써, 또 일본은 제1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을 상대로 식민통치 관련 배상금으로 46억 8300만 달러를 청구하는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의 배상청구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제2차 한일회담 당시 미국이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자 주>

제1공화국 당시 총 3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회담의 주된 의제로는 식민통치 배상문제 외에도 평화선 문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평화선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식민통치 배상과 관련한 청구권 문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제2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2년 2월 15일~4월 25일 기간에 열린 제1차 한일회담은 일본이 대한(對韓) 청구권 문제를 전격 제기하는 바람에 주객전도가 된 채 결렬되고 말았다. 한국의 대일 청구권 대신 일본의 대한 청구권이 핵심 의제가 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회담 전략에 한국이 휘말려든 것이다.

이후 약 1년간 한일회담이 열리지 않았지만, 두 나라는 끊임없이 회담 재개 압박을 받았다. 양국을 회담장으로 내몬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은 미국의 압박이었다.

미국-일본-한국 3국 동맹으로 동북아 전략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상호 반목하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한·일 양국이 제2차 한일회담을 열도록 계속 압박을 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회담을 갖기에 불리한 때였다. 바로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비위를 거스를 수도 없었고 그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된 일본의 비위 역시 거스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불가피하게 ‘관용’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4월 15일에 제2차 한일회담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 회담 역시 양국의 입장 차이만 드러낸 채 또 결렬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 때문에 회담이 결렬되었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그 점에 관하여는 지난 두 편의 기사에서 이미 충분히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회담 결렬과 관련하여 미국측이 어떤 정세 인식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당시 미 국무부의 정보 보고서를 살펴보기로 한다. 검토할 사료는 <한·일 교섭과 관계개선의 전망>(ROK-Japanese Negotiation and Prospects of Improved Relations)에 실린 6287번 정보 보고서다.

덜 완고한 지도자 출현 희망한 미국

국사편찬위원회 박진희 연구원이 역사 학술지인 <사림> 25호에 기고한 논문(‘한국의 대일정책과 제1차~제3차 한일회담’)에서, 그 정보 보고서의 핵심을 발췌하기로 한다. 논문의 내용과 논평을 구분하기 위해, 논문 인용 부분에 “논문에 따르면” 혹은 “논문은 지적하였다” 등의 표현을 부기했음을 밝혀 둔다.

정보 보고서 내용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미국이 인식한 한·일 양국의 태도와 관계개선의 장애 요인이다. 먼저, 한국의 대일 분위기는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형성·통제되고 있다고 위 논문은 지적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한일회담의 걸림돌이라는 미국의 인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의 속내와 관련하여 정보 보고서에서는 흥미로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위 논문의 표현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회담 지연을 통해 이승만보다 덜 완고하고 타협적인 지도자 출현을 희망했을 수도 있다고 적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바로는, 일본은 회담 지연을 통해 시간을 끌다가 다음 대통령이 나오면 그때 가서 한일회담을 종결지으려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 논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그 후 실제로 성취되었다. 바로 일본에 대해 ‘이승만보다 덜 완고하고 타협적인’ 박정희가 등장하여 식민통치 배상문제를 ‘아주 깔끔하게’(일본 시각에서) 마무리해 주었던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온건한 한국 지도자의 출현, 미국의 대한(對韓) 공약의 강화, 한국전쟁 휴전으로 인한 일본의 반공동맹 필요성 인지(認知), 특히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협상 타결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미국은 한국에 온건한 지도자가 출현하고 미국이 한국에 지원 공약을 해줌과 함께 일본에 대해 압력을 가하면 한일회담이 성사될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위 논문에서는, 위 국무원 정보 보고서에 기초하여 ‘미국이 인식한 한일관계 걸림돌’ 2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 한·일 양국이 상대국과 협상하기보다는 미국을 움직이는 데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승만의 완고한 대일 태도와 일본의 대한(對韓) 우월감이 한일관계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당시 한일관계에서 핵심적인 주역은 직접 당사자인 한·일 양국이 아니라 미국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양국이 상대국을 움직이기보다는 미국을 움직이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상황 하에서 한일회담이 거듭 파기되고 또 그에 따라 제1공화국 시기에 식민통치 배상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직접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미국이 ‘한·일 간 식민통치 배상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덜 완고하고 타협적인 한국 대통령이 출현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이승만의 ‘대타’를 고려하였던 것이다. 이는 10여 년 뒤에 출현할 박정희 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미·일 양국이 한국의 식민통치 배상청구 의지를 꺾고 한일관계를 적당히 매듭짓기 위해 타협적인 정권의 출현을 기대하였으며 훗날 실제로 그런 타협적인 한국 정권이 등장하였다는 점은, 이제까지 대일 청구권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은 진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의 무능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일 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다음 기사인 마지막 제4편에서는 제3차 한일회담이 어떻게 결렬되었는지에 관해 다루기로 한다. 제3차 한일회담에서는 일본측 대표 구보타의 거침없는 망언이 회담장을 뜨겁게 달군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나라가 한국을 점령하여 너희 민족은 더욱 비참해졌을 것”이라는 발언은 구보타 망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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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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