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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
ⓒ 최장문
지난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강원도 원주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가 있었다. 연수 둘째 날 역사학연구소 박준성 선생님을 초청해 '1894년 농민전쟁 기념조형물에 담긴 역사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박 선생님은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조형물은 그것에 쓰인 설명과 함께 조형물의 상(모양 형상)도 역사의 상상력을 촉진하고 그 역사인식에 영향을 준다"며 "나아가 과거의 기억을 특정한 현상으로 고정 시키기도 한다"고 역설했다. 특유의 입담과 슬라이드로 전국의 역사 선생님들을 꽁꽁 묶어 놓았던 강의 내용 중 일부를 싣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현장에는 전국 곳곳에 40여개 가까운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동학농민혁명 조형물 가운데 10년 단위로 1960년대 세워진 황토재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1970년대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탑', 1980년대 황토현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1990년대 고부 신중리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2000년대 삼례 역사광장 '동학농민혁명 상징조형물' 등이 있다.

이들 조형물은 시기별로 설립 공간, 주체, 의도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조형물의 변화상을 통하여 1894년 농민전쟁이 어떻게 현대사로 재구성되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조형물을 어떻게, 어떤 형상으로 설립하는 것이 좋을지도 함께 생각해 보자.

○1963년 황토재 '갑오동학혁명기념탑'...'척양척왜'에서 '척양'은 빠지고

▲ 황토현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 전서로 새겨진 ‘제폭구민 보국안민’ 구호는 가까이 갈수록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할 자리에 있고, ‘보’자는 ‘보국안민’할 때 쓰는 ‘輔’가 아니라 ‘保’로 잘못 새겨져 있다.
ⓒ 최장문
농민군은 정읍 황토재에서 1894년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전라 감영군(지방군)과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관군과 맞붙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63년 정부 주도로 황토재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은 농민군 투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최초의 조형물이며, 농민군 승리를 상징하는 대표 조형물이 되었다.

갑오동학혁명비는 수직의 화강암 기둥 윗부분에 전서체로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 여덟 글자를 새겼다. 양 옆에 보조 석물이 있다. 전체로 보아 중앙탑과 좌우 보조 석물 사이를 떼어 놓아 모양이 시원스럽다. 그러나 보조 석물 좌우 대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중앙의 높고 육중한 화강암 수직 기둥은 권위적이고 위압스런 기념 조형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농민군은 사람을 양반 상놈으로 엄격하게 나누는 상하 수직의 신분 질서를 깨트리고 서로 대등한 수평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또한 농민전쟁은 기존의 질서와 지배의 균형을 깨고 세상을 바꾸려는 밑으로부터 일어난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조형물도 좌우 대칭의 중심에 수직으로 우람하게 선 조형의 상보다, 수평의 형상으로 농민군의 뜻을 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왼쪽 날개 돌에 새겨진 명문에는 농민군이 내걸었던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구호에서 '척양'은 빼고 '척왜'만 내세우고 있다.

강연을 들으며 생각해보니 근·현대의 공간에 만들어지는 관공서, 은행건물, 학교 등도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형이 많음을 알았다. 여기에도 '질서, 획일성, 엄격성' 등이 무의식중에 강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3년 우금티 '동학혁명군위령탑'...10월유신이 동학혁명을 계승?

▲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탑
ⓒ 최장문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우금티에 국가주도로 1973년 위령탑을 세웠다. 이곳에서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농민군은 수많은 목숨을 잃으면서 경군·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비문의 형상은 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보다도 더 숨 막힐 듯한 좌우 대칭의 화강암 이중 받침대 위에 육중한 수직의 기둥이 우뚝 솟은 모양이다. 이러한 탑의 형태는 남성의 성기를 연장시킨다. 성기 모양으로 형상화된 남성중심주의가 국가주의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은연중에 수직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2층 받침돌 중앙, 손이 닿는 위치에 비문이 자리 잡고 있어 위령탑의 중심을 이룬다. 이 비문 내용에 탑 건립의 의도가 그대로 담겨있다.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탑 비문 - 돌로 쪼아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
ⓒ 최장문
박정희 정권이 '동학혁명'을 끌어다 그 역사를 계승한 것처럼 합리화하고, 군사독재의 시작인 '5·16혁명'과 폭압적인 '10월 유신'을 정당화했다. 동학혁명군의 혁명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곧 10월 유신에 대한 부정이며, 농민군의 저항정신을 순국정신으로 규정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의식을 강조했다. 희생당한 동학혁명군을 대상으로 탑을 세웠으되 목적은 유신체제에 국민들을 순응시키려는 것이었다.

농민군이 어떠한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싸웠는지, 무엇을 지향했는지도 알 수 없다. 반농민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도 드러나 있지 않다. 오로지 동학혁명을 계승한 5·16혁명 정권과 10월 유신의 정당성 그리고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에 순응을 강조하는 조형물만이 현대사로 재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비문에 쓰여 있던 '5·16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글귀 부분은 알고 있지 않으면 뭐라고 써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수많은 답사객들이 돌멩이로 수없이 쪼아 그렇게 되었다. 역사는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돌로도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박 선생님은 돌멩이로 쓴 '새로운 역사' 때문에 이 비문은 두고두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여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강연 후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윤세병 선생님은 1000년이 넘게 내려오는 불교문화의 내면화는 우리에게 탑을 불탑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불탑의 내력을 보면 석가모니의 숭배와 관련이 깊다고 꼬집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역사교사인 나는 전근대의 불교 석탑이 갖는 의미만을 가르쳤던 것 같다. 그 탑들이 현재의 생활공간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잠재의식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 국가 기념탑 - 왼쪽이 천안 독립기념관의 겨레의 탑이고, 오른쪽은 국립 대전 현충원의 현충탑이다.
ⓒ 최장문
우리가 무심코 보아왔던 유엔탑이나 동학혁명기념탑은 과거 석가모니의 숭배와 관계한 조형물 위에 현재 기념탑을 만든 주체의 권력이 이중으로 작용하여 더욱더 수직적이고 권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데 함께했던 선생님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한 조형물을 통해 우리의 내면의식이 자기도 모르게 '국가주의, 권위주의, 수직적 질서, 국가 권력에 대한 순응'으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역사가 참 허망하게 생각되었다. 국가권력 중심의 역사를 넘어서 내가 참여하고 우리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공동체 정신을 담은 역사와 역사교육을 갈망해본다.

박준성 선생은 누구?

1984년 8월 여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도록 역사와 역사 인식, 노동자의 역사와 철학, 한국근현대사, 노동운동사, 역사기행 안내를 내용으로 하는 노동교육, 민중교육을 해 오고 있다.

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고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에서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해왔지만 "혓바닥에 단맛 들면 사람 버린다"는 생각으로 기득권 세력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했다.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산행·역사기행 모임 '역사와 산' 고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교육위원, 노동자교육센터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 최장문

덧붙이는 글 | 다음 글은 국가에서 만든 황토현 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과 민간단체에서 만든 고부 '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조형물 비교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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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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