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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황토현 전봉준 장군 동상... 머리는 '죄수', 몸체는 농민군 '지도자'

지난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강원도 원주에서 진행된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 둘째날. 주제는 '1894년 농민전쟁 기념조형물에 담긴 역사상'이었다.

불을 뿜는 듯한 역사학연구소 박준성 선생님의 강연은 70년대 박정희 정권을 넘어 80년대 전두환 정권으로 접어들었다.

▲ 강연 모습.
ⓒ 최장문
1983년에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전봉준장군 유적정화사업'이 시작 되었다. 그렇게 건립된 기념관의 중심 시설물은 전봉준 장군 동상이다. 5.6미터 되는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청동으로 주조하여 만든 2.7미터 높이의 동상은 오른손을 불끈 쳐든 모습으로 우람하게 우뚝 서 있다.

▲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 최장문
그런데 전봉준 장군 동상 머리는 맨 상투다. 어떤 상황의 사진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압송당하는 전봉준'으로 알려진 사진을 모델로 하여 두상을 만들었기에 머리는 맨 상투의 '죄수' 모습인 데 반하여, 몸체는 백산에서 격문을 낭독하는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다.

▲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좌)과 백산 봉기 기록화(우)
ⓒ 최장문
동상 뒤쪽에서 좌우로 날개처럼 동상을 감싸고 있는 농민군 부조는 높이가 동상 받침대와 비슷하다. 장군의 동상이 농민군 부조를 밟고 있는 꼴로 보인다. 전체로 보아 자신이 스스로 농민이었으며, 농촌 지식인으로 농민들과 아픔을 같이 했고, 결국 사형을 당한 녹두장군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농민군 모습 어디에도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 목숨 걸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도시락 싸들고 소풍가는 듯하다.

▲ 전봉준 장군 동상 밑에 있는 농민군 부조물.
ⓒ 최장문
이렇듯 역사의식을 찾아볼 수 없고 손재주만 남아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의구심은 동상 받침대 뒤쪽을 보면 쉽게 풀린다. 여기에 시행청이 '전라북도'이고, 조각한 사람이 김경승(金景承)이며, 1987년 10월 1일 완공했음을 알려주는 까만 표지판이 붙어 있다.

김경승(1915∼1992)은 동상 제작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934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해방 후 만들어진 조선 미술 건설본부에서 김경승은 형 인승과 함께 친일 작가로 분류되었으나 이화여대, 홍익대 교수를 지내면서 각종 기념조형물 제작을 독차지하였다. 오랫동안 국전심사 위원에 심사위원장까지 거쳤다.

그의 경력에 걸맞게 그가 만든 동상의 주인공들도 손꼽히는 위인들이었다. 남산 공원의 김유신 장군상, 안중근 의사상, 김구 선생상, 도산공원의 안창호 선생상, 덕수궁의 세종대왕 동상,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부산 용두산 공원 그리고 통영 남망산 공원의 이충무공 동상을 그가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4월 혁명 때 무너진 이승만 동상,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또 같은 친일 인사로 규정된 고려대 김성수 동상과 이화여대 김활란 동상도 그가 만들었다.

김경승에게는 엄혹한 우리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시대의 모순과 과제를 해결하려 온몸을 던져본 삶과 사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가까이 지냈던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에게는 1894년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농민군의 투쟁의지, 농민전쟁의 의미, 전봉준 장군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실천과 경험이 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권력과 김경승의 권위는 쉽게 손잡을 수 있었으나, 그들에 의해 제작된 동상에는 역사는 사라지고 그들을 닮은 형체만 남아 있다.

1994년, 고부 신중리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밥그릇', '농기구', '농민 얼굴'

전봉준 같은 농민군 지도자는 기록에도 남아 있고, 옛집도 복원되고, 동상이나 기념물도 세워졌다. 그러나 농민전쟁뿐 아니라 어떤 역사도 지도자들만이 싸워 이룬 것이 아니다. 이름이 없던 것이 아니라 이름은 있되 역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민중이 노동과 투쟁으로 이루어온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 역사에서 그렇게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쓰러져간 농민군의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려고 정읍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에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을 세웠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녹두회관 앞에 세워졌다.

▲ 정읍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세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 최장문
▲ 뒷모습.
ⓒ 최장문
동학농민군위령탑은 관 주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여기 세워진 조형물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지 않다. 가운데 주탑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라고 이름을 새긴 받침대 위 네모난 화강암 판에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감싸 안고 죽창 들고 외치는 농민군 모습을 얕게 파서 새겼다.

그림의 이미지는 80년대 민중판화와 걸개그림을 많이 따왔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이 본격화되기 바로 전, 6월 9일 최루탄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학생을 일으켜 안은 동료가 전두환 정권을 향해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진, 그것을 걸개그림으로 만들어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리잡은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연상된다.

토막토막 따로 세운 1-2미터 크기의 32개 보조탑에는 '밥이 하늘이다'를 상징하는 밥그릇, 무명농민군의 얼굴, 농민들이 무기로 썼던 농기구를 새겼다. 화강암 돌기둥 위, 아래, 중간에 새긴 농민군 머리는 표정과 거칠기를 달리하여 삶과 죽음을 표현하였다.

▲ 보조탑.
ⓒ 최장문
박 선생님은 답사 안내를 하면서, 조형물에 가까이 가 보라고 하면 "잔디가 깔렸잖아요"라며 머뭇거린다고 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경고에 익숙해져 밟기가 겁난 듯한 대답이다.

그런데 주탑을 중심으로 보조탑들 사이사이에 공간을 둔 것은 그 사이로 가까이 다가가 돌아다니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안아도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라고 그런 것이다. 멀리 밀어내어 쳐다보기만 하는 먼 역사가 아니라 조형물로 끌어당겨 가까운 역사로 느낄 수 있게 한 배려이다.

그런데 주탑의 액자 틀 같은 직사각형 선이 답답하고, 보조탑 어느 기둥에도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모습은 없다. 모두 어른 남자 머리뿐이다. 남성중심, 어른 중심의 시각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박 선생님은 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부족한 점은 있으나, '1894년 농민전쟁' 역사 조형물이 1963년 황토현에서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서 시작하여 30년 세월이 지나면서 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정도의 수준까지 발전했다. 또 다시 새롭게 만든다면 이것을 디딤돌로 삼을 만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번 강연은 역사교사들이 역사 공부를 하고 또 가르치면서 자칫 간과할 수 있는 미학, 공간, 이데올로기 문제가 역사 기념조형물 속에 어떻게 얽혀 있고 작용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1894년 갑오년, 전국의 농민들은 생존권을 위해 농사짓던 낫과 삽을 들고 탐관오리 숙청과 반외세를 외치다 그렇게 죽어갔고, 20년을 못가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2006년, 한·미 FTA와 관련하여 전국의 농민들은 또 다시 울부짖고 있다.

현재의 또 다른 갑오년 농민전쟁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 지난 7월 13일 오전 서울 을지로 훈련원공원에서 열린 '한미FTA 저지를 위한 농축수산 대표자 결의대회' 참가자들이 한미FTA 2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신라호텔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덧붙이는 글 | 정읍 동학 농민이야기와 관련하여 인터넷에서 조광한 기자의 정읍통문을 참고하였습니다. 좋은 강연을 해주신 박준성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강원도 원주 답사 마지막 이야기 ‘명성황후 피난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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