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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2일 다케시마의날 제정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고 다음날 오키노시마를 다녀왔다. 오키노시마.(隱岐の島)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풍경이 아름답고 일본신화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오키노시마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 선박은 가가(加賀) 시치류이(七類) 사카이미나토(境港)에서 출발하며, 오끼섬의 목적지에 따라 항구는 달라진다. 비행기는 이즈모(出雲)공항에서 도고(島後)의 오키공항까지 운항한다.

▲ 오끼제도와 독도위치도
ⓒ 독도수호대
오키노시마는 여러 섬이 모인 군도로 도고(島後)와 도오젠(島前) 두 지역으로 구분하고 도오젠섬은 세 개의 주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촌정으로 나뉘는데 도고는 사이고정(西?町) 후세무라촌(布施村) 고카무라촌(五箇村) 쓰마무라촌(都万村)이며, 도오젠은 니시노시정(西ノ島町) 치부무라촌(知夫村) 아마정(海士町)으로 구분한다.

오키노시마는 우리나라의 울릉도와 같이 독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독도를 행정구역에 포함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주소는 시마네현(島根懸) 오키도(隱岐島) 고까무라촌(五箇村) 다케시마(竹島) 관유무번지(官有無番地)이다.

오키노시마는 독도를 행정구역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를 떠나 독도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옛날부터 오키노시마는 독도 가는길의 중간기착지로 이용되었고, 침략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특히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이후 오키노시마 어민들의 독도조업은 수시로 이루어졌고, 독도는 수산시험소의 실험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23일 아침 마츠에역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시치류이항으로 갔다. 시치류이항은 마츠에로부터 40여분의 거리에 있으며 도고섬의 사이고항(西鄕港)까지 2시간 20분이 걸린다. 하루 일정으로 오키노시마 모두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고섬의 고카무라촌을 목적지로 정했다.

고카무라촌은 도고섬의 서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 독도로 가는 뱃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사이고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여객터미널 벽에 있는 "돌아오라! 다케시마 (かえれ! 竹島)"라고 쓴 광고판이다. 독도의 위치와 면적등을 쓰고 독도를 함께 그려놓았다. 길너편에는 "다케시마! 돌아오라 섬과 바다로(竹島! かえれ 島と海)"라고 쓴 입간판이 서있다.

사이고항에서 고카무라촌까지는 20여분이 걸린다. 고카무라촌에는 오끼의 역사와 민속자료를 전시하는 오키향토관이 있다. 독도를 행정구역으로 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민속자료와 함께 독도관련 행사 포스터, 독도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강치잡이, 미역채취, 영토표식 설치, 조업을 위한 임시 건물 등을 찍은 것들이다.

▲ 향토자료관 내부에 전시된 독도관련 자료
ⓒ 독도수호대
이곳 주민은 물론 대다수 일본인들은 이 사진을 통해 독도가 일본땅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과 한국에 대한 분노를 키워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 사진 이전의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속의 모든 모습은 삶의 일부였고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야 하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통해 기억하는 독도의 모습이 잘못된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만약 독도가 한국 땅이었다는 사진 이전의 역사적 사실(일본측 자료)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이들의 기억을 바로 잡는것이 독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쿠미(久見)로 향했다.

▲ 독도침략의 전진기지라는 느낌은 전혀 느낄수 없는 한적한 쿠미항
ⓒ 독도수호대
쿠미(久見)는 고카무라촌의 최서북단에 있으며 독도를 가기위한 마지막 항구이다. 시마네현 오키에서도 독도와 가장 가깝고 가까운 만큼 가장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부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방파제에 붙여놓은 광고판이다. '돌아오라 섬과 바다' 흔히 보았던 광고판이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녹이 슬어 꽤 오래된듯 했다. 일본인들의 삶에서 독도와 가장 관련이 깊은 곳이지만 광고판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독도를 느낄수 없었다. 느껴지는 평화로움과 조용함은 우리나라의 어촌에 와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 다케시마반환요구운동실시중 ‘돌아오라 섬과 바다’
ⓒ 독도수호대
동행한 <산음중앙신문> 기자의 도움으로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했다는 두 명의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50여년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시마네현 고시의 불법성과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던 기억과 색 바랜 사진속에서 독도를 보기 때문이다.

사이고 어업협동조합의 이사이기도 한 야와타 쇼조(八幡昭三)씨는 1954년 이후 독도에 가지 못했다며 한국의 영유권 주장에 불만을 나타냈다. 50여년전 독도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만으로 독도를 바라볼때 독도는 일본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도의 모든 기억이 잘못된 역사의 산물임을 자각하도록 홍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증언의 1954년은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 상주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흔히 창설연대를 1953년으로 알고 있으나 생존대원의 증언과 관련자료에 따르면 1954년 5월 이후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와키타 시게루(脇田茂)씨인데 1946년과 1949년 사이에 독도에서 가져온 돌을 정원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규정한 SCAPIN 제677호와 맥아더라인(MacArthur Line)이 적용되는 시기로 일본어선은 독도 12해리내에 접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도에 상륙하고 돌을 가져온 것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당시의 모든 기억은 '한국령' 독도에 침략했다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 높이 63cm, 너비 36cm, 둘레 100cm - 어른이 겨우 들 정도의 무게이다.
ⓒ 독도수호대
오늘날 독도문제는 한일양국에 가장 민감한 외교현안이며 시마네현은 그 중심에 있다. 특히 독도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키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이다. 침략의 역사가 오히려 '일본땅 다케시마'를 증명하는 기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키의 주민이 50여년 전의 모든 기억은 '침략'이었다고 자각하는 그 순간 독도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제정 1주년 기념식을 참관하고 오키섬을 조사했습니다. 이글은 3월에 작성한 글로 개인블로그와 민중의 소리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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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수호대 대표, 문화유산 해설 기획과 문화유산 보존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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