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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하면 생각나는 게 무엇일까? 맨 먼저 베를린은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반으로 갈라졌던 상처를 안고 있다. 또 베를린필하모니와 베를린영화제로 유명한 곳이며, 요즘은 극우난동분자들의 유색인종 테러로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 겨레에겐 베를린올림픽과 손기정이 생각나며,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통일운동가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 베를린 여행의 시작, 베를린 공항(위)과 우리가 묶었던 '실터 호프' 호텔 앞에서
ⓒ 김영조
그 베를린을 나는 여행한다. 민족예술공연단 공연에 동행 취재를 하는 기회의 틈새를 노리는 것이다. 나는 어렵게 간 베를린에서 동서 냉전의 아픈 상처와 특히 윤이상 선생의 묘소는 꼭 보아야만 했다.

인천공항에서 탄 네덜란드항공사의 보잉 747기는 무려 11시간을 비행한 끝에 갈아타는 곳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뒤 2시간을 기다려서 작은 여객기를 타고 다시 3시간 걸려 베를린 공항으로 갔다.

기내에는 외국 국적사이지만 한국인 여행자들이 반 이상이어서인지 한국인 스튜어디스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네덜란드인 스튜어디스들은 대부분 나이도 들고 예쁘지도 않으며 뚱뚱한 사람도 있다. 네덜란드항공사가 일부러 못생긴 스튜어디스를 고른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처럼 미모나 날씬함이 기준이 아닌 모양이다.

반소매 차림으로 간 대부분 일행은 추적추적 비가 오는 10도의 쌀쌀한 날씨에 추워서 떤다. 이게 베를린의 시작인가? 공항으로 우리를 마중 나온 관광버스는 이층버스처럼 높다랗게 생겼다. 나중에 보니 관광버스들은 모두 이런 모양새다. 사람은 위쪽에 타고, 아래쪽은 대형화물도 실을 수 있는 짐칸이며, 간이화장실도 있다고 한다. 운전사는 배 나오고, 흰 수염에 빨간 옷차림, 산타클로스처럼 보인다.

나는 공연 리허설을 하기 전 공연을 기획한 최홍자씨를 따라 몇 군데를 가본다. 공연장 가까운 곳에 처음 본 건물은 "카데베(KaDeWE)"라는 유대인 소유의 백화점이다. 인상 깊은 것은 백화점 벽면에 커다랗게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의 얼굴이 걸려있다. 한 기업의 광고물이라지만 우리의 박지성 선수도 거기엔 당당하다.

▲ 박지성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는 카데베 백화점
ⓒ 김영조
▲ 채소, 과일 등을 파는 베를린 중심부의 노점상들과 점심을 먹었던 이탈리아 식당 앞에서 일행과
ⓒ 김영조
근처 노점상들이 밀집한 곳을 들러보았다. 이곳 노점상들은 직업적이라기보다는 거의 자신이 재배하거나 만든 채소, 과일, 빵 따위를 가져다 판다고 한다. 과일을 파는 사람이 말을 무척 빠르게 주절주절했다. 알고 보니 최홍자씨가 과일을 듬뿍 사주자 고맙다는 말을 했단다. 최홍자씨는 여기서 파는 물건들은 믿을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우리는 이곳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점심을 들기로 했다. 앗! 큰일이다. 난 이탈리아 음식은 먹어본 적도 먹어볼 생각도 없는데 어쩐다. 하지만 일행이 모두 가는데 나만 버틸 수 없지 않은가? 어! 그런데 닭고기가 들어있는 스파게티 등은 먹을 만하다. 나는 지레 겁을 내었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는다. 귀국하면 이탈리아 음식도 먹었다고 딸에게 큰소리쳐야지!

'부서진 교회당'에서 독일인의 생각을 읽다

▲ 베를린의 대학로, 쿠담거리
ⓒ 김영조
▲ 베를린의 충치라 불리는 부서진 교회 앞에서
ⓒ 김영조
백화점을 지나서 가니 베를린의 대학로라 할만한 거리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쿠담 거리(Kurfuerstendamm)이다. 이 거리는 4km에 달하는 시내 중심부로 베를린의 생활중심지이다. 고급호텔, 백화점, 자동차 전시장, 레스토랑, 영화관 등의 시설이 밀집해 있으며, 조그만 광장이 있고, 여기선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사람, 조각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옆에는 '부서진 교회당'이 보인다. 폭격을 맞아 벌집처럼 부서진 교회당은 원래 1888년에 지은 것으로 르네상스양식이다. 그러던 것이 2차대전 때 부서진 것이지만 재건축을 하려다가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전쟁을 잊지 말자는 기념물로 남겨 두었고, 그 옆에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베를린의 충치'라고 부르는 이 부서진 교회를 보며 나는 독일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부서진 교회를 본 다음 백화점에 들어가 봤다. 백화점 내부는 한국의 그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특히 유럽이 통합된 이후 물가가 많이 비싸져 사람들의 백화점 이용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같이 간 공연단 한 사람이 맥가이버칼을 산다. 독일의 상품 중에는 자동차가 유명하지만 칼은 세계적이라고 하여 기념으로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 동서독 분단의 흔적 앞에서 사진을 찍는 공연단 일행
ⓒ 김영조
다음날 공연단 대부분은 시내버스로 관광을 했다. 시내버스는 모두 이층버스인데 잘 보이는 2층에 자릴 잡았다. 그런데 버스비가 2유로, 우리 돈으로 2400원 정도여서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에서 내려 동서독 분단의 흔적을 지난다. 도심 한복판에 1m 정도의 담벼락을 남겨 놀았다. 일행들은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분단과 통일의 현장, 브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의 문(Brandenburger Tor)'에 갔다. 옛 베를린의 18개 성문 중에서 보존된 유일한 것으로 1788~91년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입구 성문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이는 베를린이 새로운 아테네, 즉 학문과 예술의 도시가 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문은 2차 대전 때 부서졌으나 1958년에 복원된 것이다.

이 문을 통해 그간 여러 번 큰 행진이 있었는데, 1806년 베를린을 함락시킨 나폴레옹 군대, 1870~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군대의 행진과, 1933년 히틀러를 지지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횃불 시위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후에는 독일분단의 상징이 되었지만 1989년 11월 9일 국경이 열린 뒤는 독일 통일의 현장으로 기리고 있다.

문 위에는 유명조각가 샤도가 만든 '말 네 필이 끄는 고대 로마의 전차를 모는 여신상'이 있고 그 여신상 사이로 햇빛이 찬란하다. '브란덴부르크의 문' 근처에는 히틀러가 자살한 자리에 유대인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설치한 무덤형식의 대형 조형물이 있다. 엄숙한 조형물임에도 미로찾기나 술래잡기를 하면서 즐기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 브란덴부르크의 문, 문위의 말 '네 필이 끄는 고대 로마의 전차를 모는 여신상'이 눈부시다.
ⓒ 김영조
▲ 제국의회 의사당, 국기가 5개 걸려있다.
ⓒ 김영조
또 멀지 않은 곳엔 '제국의회 의사당(Reichstag)'이 있다.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의회 의사당은 1945년 연합군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가 전쟁 뒤 돔을 빼고 재복원된 건물이다. 그 거대한 '제국의회 의사당'에는 곳곳에 5개의 독일 국기가 걸려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국가 의식의 발로란 생각이 든다.

'제국의회 의사당'을 들러보고, 103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간다. 그런데 40여 분 기다렸나? 다리는 아픈데 버스가 안 온다. 나중에 103번은 3대가 한꺼번에 왔다. 독일은 1 도시당 하나의 대중교통회사가 버스, 지하철과 배를 모두 관리하여 대중교통 연계가 아주 잘 되며, 버스정류장 시간표가 잘 맞지만 이렇게 일부 막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독일에 오기 전 주변 사람들은 극우난동분자들의 유색인종 테러에 대해 걱정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의 주변엔 그런 인상을 줄 만한 독일인들은 볼 수가 없었고, 그저 친절한 독일인들만이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하는 만국공통어에도 그들은 어떻게든 도우려 했다. 베를린 교포들이나 독일인들에게 물었더니 위험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만 가지 않으면 괜찮다고 한다.

상품이 어수선하게 진열된 편의점에서 면도기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점원에게 "쉐이브 나이프?"라고 해본다. 그녀는 얼른 알아듣고 안내를 해준다. 호텔에서 한방을 쓰는 친구가 피곤함에 지쳤는지 먼저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고 있다. 도리가 없다. 프런트에 가서 직원에게 "룸메이트 슬리핑" 하니 바로 알아듣고 열쇠를 들고 앞장선다. 약간의 영어 단어와 몸짓은 만국공통어임이 실감난다.

한 가지 독일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편의점이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면도기를 챙겨가지 않은 나는 날이 훤해 저녁도 되지 않은 줄 알고 편의점에 갔더니 이미 문이 닫혔다. 근처를 모조리 뒤졌지만 8시 이후엔 살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더부룩한 수염으로 하루를 버텼다. 그뿐만 아니라 하지에 가까워진 독일은 밤 10시가 되어도 대낮 같았고,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교포들과 보낸 베를린의 마지막 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뜻밖에 교포들의 방문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오래 민주통일운동을 해온 분들이었다.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독일 맥주를 앞에 놓고, 우리는 결과도 못 보고 온 한국의 지방자치 선거 결과 이야기, 교포사회에서의 통일운동가들의 애환, 문화운동 이야기 등을 진지하게 나누었다. 베를린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내게 커다란 의미를 던져 주었다.

독일 맥주 외에는 안주도 없다. 그저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실 뿐이다.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물 대신 먹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맥주를 파는 술집은 마시는 시간도 새벽 2시 이후는 허락하지 않는다.

▲ 베를린 도심가는 곳곳에 녹지대가 있어 부러웠다.
ⓒ 김영조
다음날 우리는 함부르크로 가기 전 버스를 타고 2시간여 베를린 시내를 관광하기로 했다. 베를린은 도심 곳곳이 녹지대이다. 서울과 비교해보는 나는 그런 점에선 베를린이 참 부럽다. 땅이 넓은 나라의 특징이라지만 정치지도자들의 철학이 없이는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베를린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는 교포가 안내를 맡았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많은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줬다. 어제 들렸던 제국의회 의사당 근처를 지나며 그는 히틀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제국의회 의사당이 1933년 불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의 방화범으로 사회주의자를 지목하고 탄압했다. 하지만, 지금 밝혀진 사실은 그것이 자작극이었다고 한다." 세기말 광인, 히틀러는 권력욕 때문에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베를린 중앙역(지하철) 개통하는 날 일어났던 사건을 얘기해 준다. 그날 범인은 무려 27명이나 칼로 난자했는데 문제는 처음 찔린 사람이 에이즈 환자여서 그 뒤 찔린 2~3명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정말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다.

그는 또 베를린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도 했다. 1989년 무너진 장벽의 거리는 113.4km였으며, 베를린은 늪지대에 지어진 도시여서 늘 습하고, 지반이 약한 탓에 통일 전 서베를린에서는 35m 높이 이상으로는 건축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베를린에는 2500여 명 정도의 교민이 살고 있다.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거리 이름이 정겹다는 생각이 든다.

부슬비를 맞으며 윤이상 선생 묘지를 찾다

▲ 윤이상 묘소에서 꽃을 바치는 윤인숙 공연단장
ⓒ 김영조
도중 윤이상 선생의 묘지에 들러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묵념을 했다. 동서 냉전에 큰 상처를 입고, 그렇게도 꿈꾸던 고향, 통영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뜬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나는 비를 맞으며 사후에나 뵙는다. 내가 고국에서 윤이상을 조명하는 몇 편의 기사를 올린 것이 그나마 윤 선생을 뵐 수 있는 염치를 만들어 준 것만 같다.

윤이상의 묘소 주변에선 아름다운 새소리가 우리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듯했다. 아침에 호텔 창문을 열었을 때 들었던 새소리와 똑같다. 한 사람은 내게 그것이 지빠귀의 일종이라고 일러준다. 흔히 지빠귀는 새벽 5시와 저녁 5시에 주로 노래를 하는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와 "퇴근해야지!, 퇴근해야지!"라고 들린다고 말해준다.

베를린, 베를린을 나는 꼼꼼히 돌아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짧은 일정에도 나는 몇 가지 의미있는 경험을 했고, 가치있는 말들을 들었다. 언제 또 베를린에 갈 것인지 모를 나는 아직도 베를린을 생각한다. 독일인들의 철학과 교포들의 애환도 잊지를 못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시골아이고향, 대자보, 참말로에도 송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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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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