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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널드 슈워제네거 스타디움 정보와 스타디움 내부.
지난 12월 13일, 미국의 사형수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가 26년 전 무고한 시민 4명을 살해한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국 최대 갱단 '크립스'의 설립자였던 윌리엄스는 개과천선해 반 폭력 운동가로 변신했으며 6차례나 노벨평화상과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배우 숀 펜을 비롯해 많은 미국인들과 바티칸 교황청, 유럽인들이 그의 사면을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의 사면권을 가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사형 집행 수 시간 전 "야만적 살인 행위에 대한 진정한 참회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며 마지막 감형 탄원을 기각했다.

사형제 반대론자들이 "캘리포니아 주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며 사형제 폐지를 촉구한 가운데 감형을 거부한 아널드 슈워제네거에게 비난의 화살이 모아지고 있다. 그 비난 여론은 유럽, 특히 슈워제네거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도 들끓고 있다.

자랑스런 오스트리아인이 사형 승인을?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 출신 중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하며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혀 왔다. 그 이전에 가장 유명했던 오스트리아인이라면 단연 독일 나치 정권의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임을 부끄럽게 여기는 오스트리아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와 히틀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고 평화와 박애를 추구해 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사형은 불법이며, 유럽연합은 사형제 철폐를 가입 요건으로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때 자신들의 영웅이었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윌리엄스 탄원 기각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 그라츠는 직접적인 후폭풍을 맞고 있다.

그라츠 시는 1997년 슈워제네거가 운동을 했던 스타디움을 '아놀드 슈워제네거 스타디움'으로 개칭했으며 2년 뒤인 1999년 그에게 '명예의 반지'까지 수여했다. 하지만 사형을 감행한 슈워제네거에 대한 찬반 논쟁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오스트리아 녹색당은 슈워제네거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제안을 했고, 그라츠 시의회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스타디움'에서 그의 이름을 빼자는 제안을 다음 회기 의회에 접수했다. 기독사회민주연합의 의장인 리하르트 샤다우어는 슈워제네거의 이름을 빼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아예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 스타디움'으로 개명하자는 획기적인 제안까지 내놓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스타디움, 이름 바꾸자!"

▲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글 그라츠 시장에게 보낸 공문.
대서양 건너편 모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된 슈워제네거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지난 19일 그라츠의 지그프리트 나글 시장에게 아래와 같은 공문을 보내왔다.

"그라츠 시의회 의원님의 격앙을 가라앉혀드리기 위해 저는 그라츠 스타디움에 사용됐던 제 이름을 철회합니다.… 올해 말까지 스타디움에 걸린 제 이름을 없애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광고 선전에 제 이름을 절대 사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그라츠 시민들이 저를 더 이상 친구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1999년에 받았던 명예의 반지도 돌려드립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맞불'에 나글 시장은 한발 양보한 답신으로 응했다.

"명예의 반지는 제발 간직해 주시기 바란다. 주지사와 주지사의 고향 도시 그라츠와의 관계는 사회민주당, 녹색당, 공산당 정치인들 때문에 큰 손해를 봤다. 보수당과 대다수 국민들은 주지사가 언제나 그라츠 시민이자 오스트리아인으로 남기를 바란다."

나글 시장의 답신을 두고 일부 여론은 나글 시장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슈워제네거가 유행시킨 "I'll be back"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거냐고 빈정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경제부장관 칼 하인즈 그라서는 20일 한 TV 인터뷰에서 "스타디움에서 슈워제네거의 이름을 빼자는 그라츠 시의회의 제안은 한마디로 어리석다"며 "그처럼 세계적으로 성공한 배우이자 정치가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로 오스트리아의 미래를 내다보고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슈워제네거의 문제가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찬반논쟁으로까지 번지게 됐을까.

정치권으로 번진 슈워제네거 찬반 논란

▲ 일간지 <데어슈탠다드> 인터넷 슈워제네거 논쟁페이지(좌)와 <터미네이터> 영화 포스터.
슈워제네거에 우호적인 발언을 한 경제부장관 그라서와 나글 시장은 모두 보수당 소속이다. 독립 후 60년 간 오스트리아의 여당으로 군림했던 보수당은 작년과 올해 잘츠부르크와 슈타이어마르크 주에서 있었던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에 패했다. 이로써 슈워제네거의 고향이자 슈타이어마르크의 주도인 그라츠도 보수-진보의 대립이 더 팽팽해졌다.

보수당은 경제적 손익에 맞춰 슈워제네거를 옹호하고 있는 반면, 사회민주당 등은 오스트리아의 명예에 초점을 맞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이번 슈워제네거 논쟁은 각 당의 정치적 견해를 설파할 장을 제공하고 있는 셈.

실제 내년 1월 슈워제네거 스타디움 이름변경 건과 관련해 보수당은 "슈워제네거의 이름 없는 스타디움은 셀 수 없는 금액의 손실"이라며 초조해하는 반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그리고 공산당은 "(당사자가 이름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의회까지 가서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며 만족해하고 있다.

또 나글 그라츠 시장은 공영방송 ORF와의 인터뷰에서 "슈워제네거가 없다면 수백억의 돈을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라츠의 하르트-슈트레마이어 관광홍보청장은 "이번 사태는 액수가 아니라 유감의 문제"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그라츠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슈워제네거의 명성이 부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며 "우리의 관광 홍보에 그의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유감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름 빼도 마음만은 고국에?

▲ 1999년 명예의 반지를 그라즈 시에서 수여받고 기뻐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 Der Standard
이런 가운데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공문을 보낸 바로 다음날인 20일, 다시 한번 부연설명을 담은 공문을 그라츠 시장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그라츠 시와 내가 공식적으로 묶여있지 않아야 내가 미국의 주지사로 행하는 행동이나 변명이 그라츠 시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이 미국 주지사로 성공한 이상 '영화배우-광고선전' 같은 모습이 아닌 깨끗한 정치전선을 성립하길 원한다고 밝혀왔다.

또 "그라츠 시는 (스타디움을 개명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며 "나는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이러한 일이 있어도 내 근본이 되는 그라츠 시민, 슈타이어마르크 주민, 오스트리아 국민으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찬반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나글 시장은 21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민주당, 녹색당, 공산당이 '우리'의 '아들'인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우리의 도시로부터 혐오스럽게 쫓아냈다"고 발표했고, 시민들은 "그라츠 시민들이 모두 보수당원은 아니다"라며 반발했다.

이 가운데 그라츠 출신 영화감독 야콥 에르바가 1천여 명의 지지서명을 받아 "살인을 저지르고, 혹은 잘못을 저지르고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그런 아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한번도 그라츠의 아들인 적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나글 시장에게 전달하면서 오히려 확산되는 추세다.

오스트리아의 언론은 현재의 시국을 "달걀춤(Eiertanz)"에 비유했다. 달걀춤이란, 널려있는 달걀 사이를 눈 감고 춤추며 도는 것으로 어려운 때의 신중한 태도를 빗댄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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