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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권사 표지석
ⓒ 이정근

청권사.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청권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청권사가 무슨 회사 이름이냐? 비밀문서로 분류됐던 김-오히라 메모가 공개되고 과거사 진상규명을 한다는데 청구권 자금을 조사하는 곳이냐?'라고 되물을 만큼 생소한 곳이다. 청권사는 조선 역대 국왕 중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의 형님이며 이방원으로 알려진 태종대왕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의 묘소가 있는 사당이다.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걸으면 청권사란 표지석이 나온다. 도시교통의 총아 지하철역에서 불과 1분 코스에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녹색공간과 역사 향기 그윽한 옛 사당이 있다는 것은 도시인들에게 위안이며 행운이지만 주변에 있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가볍게 산책할 뿐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사당 앞을 지나는 도로가 '효령로'로 명명되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조선 역대왕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홉 분의 임금과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정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살았던 효령대군의 성품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그 당시에도 권력이 그를 멀리했고 지금 현재에도 세상이 그를 몰라주고 있을까?

▲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족보
ⓒ 이정근

최근 통계청의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총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9.6%가 김씨, 이씨, 박씨, 정씨에 몰려 있고 14.8%가 이씨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이씨 중에서 전주이씨가 제일 많고 105개 파로 나누어진 전주이씨는 창덕궁앞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 많은 이씨 중에서 제일 많은 효령대군파의 총본산이 청권사이다.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이름 하였다.

부왕 태종이 장남과 둘째를 건너뛰어 셋째 충녕(훗날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계승해줄 세자로 마음먹고 있을 때 첫째아들 양녕과 둘째아들 효령은 얼마나 가시방석이었을까? 아버지 이방원이 어떤 사람인가? 할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 개성 선죽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며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린 사람이다.

▲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태조계비 강씨)능 석물로 확인된 석물. 복원된 청계천 광통교에 있다
ⓒ 이정근

또한 효령대군이 좌찬성 정역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여 결혼한 이듬해 할아버지 이성계가 세상을 뜨자, 생전에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던 신덕왕후(태조계비 강씨)의 정동에 있던 무덤을 훼손하여 묘지는 동소문 밖 정능으로 보내버리고 석물은 뜯어내어 경복궁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개천에 다리를 놓아 만백성이 밟고 다니게 했던 사람이다.

최근에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문헌으로만 남아 있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졌다. 일제시대 청계천에 묻혀버린 신덕왕후 능에서 사용했던 명문이 새겨진 석물이 발견된 것이다. 600여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유물이 햇빛에 드러나자 문화재 관리청과 강씨 후손들이 다툼을 벌였지만 있는 그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서울시가 밀어붙여 다리를 복원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광통교이다.

▲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 색갈이 짙은 석물이 그 당시 신덕왕후 능 석물이다
ⓒ 이정근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가 동생 충녕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두 형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이 보장된 양녕대군은 밤이면 개수구멍으로 대궐을 빠져나와 저잣거리에서 주막집 주모와 시시덕거리고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그 소식이 구중궁궐 대궐 담장을 뛰어넘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랐으며 효령대군은 불경에 푹 빠져 중 아닌 중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외삼촌 민무구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 태종을 도와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옹호하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민무구, 민무질 두 외삼촌은 누나인 태종비 민씨의 힘을 믿고 세자 양녕대군을 끼고 돌면서 무엄하게도 태종과 각을 세우다 인척이 발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태종의 명에 의하여 사약을 받았으니 이때가 1410년으로 효령대군 나이 열네 살 때 일이다.

▲ 경복궁 경회루. 이곳에서 펼쳐진 연회에 가장 많이 참석한 사람중의 하나가 효령대군이다
ⓒ 이정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한양에 도성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을 무렵, 개성에 있는 정안궁에서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의 몸에서 태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은 할아버지 이성계의 건국초기 혼란스러움과 아버지 이방원의 왕자의 난, 아우 세종대왕의 태평치세 그리고 조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성종의 태평성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청권사의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보이고 그 뒤로 고즈넉한 고택의 풍모를 자랑하는 모련재가 자리 잡고 있다. 옛 정취가 물신 풍기는 모련재 오른쪽에 돌 거북등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효령대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이다. 효령대군의 생전의 업적을 살펴보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잘 다듬어진 잔디위에 서 있는 문인석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 잘 가꾸어진 잔디 언덕
ⓒ 이정근

중앙에 자리한 석등을 지나 제단을 마주보고 바라보면 왼쪽이 효령대군이고 오른쪽이 예성 부부인 해주 정씨의 묘이다. 주변을 바라보니 풍화에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시위하고 있지만 치솟은 빌딩과 고층아파트가 대군의 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대군이 살아서 빌딩과 아파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대군의 이름을 따 명명한 사당 앞 도로 효령로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고 그 차도 아래에는 지하철이 다니며 주변에는 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어서인지 효령대군은 분명 600여 년 전 사람이고 죽어서 이곳 청권사 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인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따사로운 가을 햇살아래 잔디에 앉아 대군과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거치면서 외삼촌 둘은 사사되었고 외할아버지는 자진하는 등 외갓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양녕의 폐위를 반대하던 황희 정승은 유배를 갔지만 형제는 다치지 않았고 아우 세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는데 양녕, 효령, 충녕 이들 3형제의 우의가 돈독해서 그리된 것입니까?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너그러워서 그리된 것입니까? 누워 있는 효령대군은 말이 없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가을햇살 아래 어른거린다.

▲ 효령대군 묘소. 왼쪽이 효령대군이고 오른쪽이 부부인 해주정씨 묘이다
ⓒ 이정근

아버지 태종이 살아 있을 때야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지만 할아버지 이성계, 아버지 이방원이 죽고 아우 세종마저 죽은 후 종실의 어른으로 '황표정사'를 맞이했는데 날뛰던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 여덟 명의 조카들 중에서 누가 제일 욕심이 많았고 누가 제일 어질고 착했습니까? 라고 물어도 역시 대답이 없다.

1450년 세종이 죽고 세종의 큰아들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즉위 2년 3개월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때 어린 세자가 단종이다.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되어 사사 당한다. 이때 61세의 종실 어른으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라고 물어도 역시 대답이 없다.

▲ 효령대군 묘소는 빌딩과 아파트에 둘러싸여있다
ⓒ 이정근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사되기 1년 전. 단종복위 사건이 터진다.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문관과 유응부, 성승 등 무관들이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건에 가담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단종복위에 가담했던 집현전 학사들과 무관들은 모두 붙잡혀 살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지는 국문을 당한 끝에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내걸리게 된다. 이때 죽은 이가 사육신(死六臣)이 아니냐고 묻자 그것은 생육신(生六臣)중의 한사람인 남효은이 지어낸 말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육신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제위하고 있는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던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등을 현재에는 생육신으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어떠했습니까? 라고 물어도 여전히 대답이 없다.

▲ 효령대군 사당
ⓒ 이정근

칠삭둥이 한명회가 권람의 천거로 경덕궁 궁지기에서 수양대군의 책사로 등장하여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조카 수양이 금성대군을 유배시키고 똑똑하다고 칭송이 자자하던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사사케 하는 밑그림을 그렸으며 첫째 딸은 예종비, 둘째 딸은 성종비를 만들어 역사에 유례가 없는 자매가 대를 이어 왕비가 되었는데 종실의 어른으로서 한명회를 사돈으로 맞이할 때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라고 물어도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다.

가을 햇살이 따갑다. 효령대군이 잠들어 있는 묘소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가슴깊이 느껴오는 것이 있었다. 권력이란 태양처럼 뜨겁고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것을 효령대군은 일찍이 터득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90년 동안 권력의 핵심부와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정치에 초연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편안히 누워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1483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할아버지 효령대군이 1486년에 죽지 않고 무오사화(戊午士禍)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종실 어르신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토록 참혹한 살육의 만행과 악행을 저질렀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개인 연산군에게도 손실이었고 국가적으로도 유능한 신하를 잃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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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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