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차대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상륙작전에 소요될 비용과 인원을 계산해본 미국 측에서 전략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당시 미 대통령인 트루먼이 오펜하이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였다.

"다시는 저 자를 데려오지 말게. 결과적으로 저 사람이 한 일은 폭탄을 만든 거야. 나는 그 폭탄을 발사시킨 사람이고."(134쪽)

로버트 율리어스 오펜하이머.(Robert Julius Oppenheimer), 통상 오펜하이머라고 불리는 독일계 유대인 출신 미국의 물리학자로 로스 알라모스에 있는 연구소를 중심으로 '맨하탄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 그는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키가 크고 신경과민이며 늘 뭔가에 집중하고 있어 보이는 인상에, 그의 제자들이 '푸른 섬광'이라고 부를 만큼 깊고 강렬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오펜하이머와 얽힌 여러 용어들이 미국인들에게는 그만큼 친숙한 주제이겠지만, 정작 우리들에게 오펜하이머는 책 제목 그대로 <베일 속의 사나이>이다.

▲ 책표지
ⓒ 모티브
"돌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공호에서 걸어 나왔다. 극적으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세계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았다. … 나는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왕자를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245쪽)

실제로 폭탄이 투하된 후 로스 알라모스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했다는 점에 만족감을 느꼈지만, 그 다음에 일부 연구원들은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고 되뇌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참여 연구원들 중 일부는 지속적인 반핵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당시 오펜하이머를 제외하면, 원자폭탄 개발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한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29세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순수한 열정을 통한 과학기술의 개발과,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개발 결과의 양면성에 대해 고뇌해야 하는 것은, 과학자가 지고 가야 할 숙명에 가깝다. 오펜하이머가 폭탄 개발에 뛰어든 것과 아인슈타인이 '맨하탄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자 폭탄과 수소 폭탄 개발을 설명하려다 보니, 폭탄 개발과 관련된 물리적인 지식을 쉽게 풀어 설명하려는 노력들도 곁들여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엔 어릴 시절 유대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계와 천재성의 기록, 후일 폭탄 개발의 참여와 말년의 연구 생활에 이르기까지 오펜하이머의 개인적인 역사에 집중하고 있다. 정착 이 책을 읽다 보면 물리책에서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는 여러 과학자들을 배경 인물로 접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또한 이 책은 오펜하이머의 이데올로기 정체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과히 미국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연구를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 본인은 공산당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 연인이나 후일 동생 가족의 공산당 가입, 그리고 오펜하이머 본인이 러시아와 협조하는데 긍정적이었다는 사실이 충분한 의심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펜하이머를 단순히 순수한 과학자의 초상으로, 시대의 피해자로 보는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1950년대의 맥카시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전하기는 쉽지 않다"(189쪽)

좌익과 우익,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치열한 대립은 비단 우리에게 멀기만 한 주제도 아니다. 해방 전후와 6·25전쟁 전후의 상황만을 보더라도,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맥카시 열풍을 이승만이 고스란히 한반도에 수입해 왔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념 대립의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 대립이 가장 강렬했던 1950년대에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개발했던 오펜하이머는 정권 유지지자들의 목표가 되기 쉬웠으며 일면 완고하기까지 한 과학자의 특성으로 인해 여러 번 청문회에 불려 나가고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달콤한 무엇인가를 보면 그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적용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입증은 오직 그 기술이 성공하고 난 후에야 가능합니다. 오직 기술이 성공을 거두고 난 후에 말입니다. 그것이 원자폭탄이 출현한 방식입니다. 나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일에 반대자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지고 난 후에야 논쟁이 있었죠."(159쪽)

어떤 과학이든지 좋은 방향이나 나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일반상식에 가깝다. 실사용자의 도덕성에만 의존하고, 개발에는 도덕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양면성을 내포한 기술을 개발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과학자들이 지고 가야 할 숙명과도 같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 보인다. 현대에 들어 가장 큰 숙명을 지고 가야 했던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풀지 못할 질문을 던져보며 마지막으로 오펜하이머가 1963년 페르미상 수상 시 말했던 소감을 인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상은 동료들의 호평과 호의 그리고 정부의 신뢰를 뜻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242쪽)

덧붙이는 글 | 제목 :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
저자 : 제레미 번스타인/ 유인선 옮김
출판사 : 모티브 (2005)


오펜하이머 - 베일 속의 사나이

제레미 번스타인 지음, 유인선 옮김, 모티브북(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